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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1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딸을 다시 만난 건 14년만이었다. 그리고 딱 한 번을 더 만났을 뿐이다. 아이를 만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고, 딸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정리도 채 하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때, 아이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앞으로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녀는 이 편지에 ‘엄마는 나를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또 엄마가 아니라면 외갓집에서…….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안 이상 더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는 지금 가족과 정이 들었고 그들을 더 사랑한다’고 썼다. 또 만약, 자기를 자꾸 데려가려고 한다면, 엄마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자기를 포기했지만 지금의 엄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길러준 분이므로 지금의 엄마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아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초부터 나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솝우화 <늑대와 새끼 양>을 떠올렸다.

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새끼 양을 발견한 늑대가 소리쳤다.

“넌 누군데 감히 내 물을 더럽히는 거냐?”
“전 물을 더럽히지 않았어요. 물은 늑대님 쪽에서 제 쪽으로 흐르고 있는걸요.”
“내가 더럽혔다면 더럽힌 거야! 그리고 넌 일 년 전에 내 욕을 하고 다녔잖아!”
“전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는데요.”
“그럼, 네 형이 내 욕을 한 거로군.”
“전 형이 없는걸요.”
“그럼, 네 친척이 욕을 했나보구나. 아무튼 너희 가족들, 양치기, 목장의 개들, 모두 다 내 욕을 하고 다니잖아. 그러니 이제 내가 복수를 할 테다.”
그러면서 늑대는 새끼 양을 잡아먹었다.

이 이야기의 늑대처럼 아이는 아무리 ‘너를 데려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더라도, 온갖 이유를 대가며 내가 자기를 데려가려 한다고 우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난 그 편지를 자기를 데려 갈까봐 걱정이 되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만나기 싫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딸의 편지가 상처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며칠 전만 해도 ‘엄마를 만나면서 살고 싶다’고, ‘그럴 용기를 내겠다’던 아이가 바로 얼마 뒤,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이 이해가 안 갔다. 십 수 년 만에 다시 만나, 단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도 금방 “엄마! 엄마!” 부르며, 몸에 착착 감기던 아이가 갑자기 왜 돌변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보다 자기의 새엄마가 더 친엄마 같고, 내가 더 새엄마 같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나는 이 말에 정말 화가 너무 많이 났다. ‘내가 딸을 버려서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그건 딸에게서 바로 이런 말을 듣는 것이겠구나!’ 했다. 이 말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받아야 할 벌을 다 받았구나’ 하는, 홀가분함을 느끼게 해 준 것도 사실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난 딸을 보내고 단 한 번도 전남편에게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그의 새로운 가정을 불편하게 한 적도 없다. 그것은 아이가 평화로운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만 참으면 된다며 아이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다 잡고 이렇게 세월을 빠져나왔던 것인데, 내가 딸을 위한다면서 한 행동의 결과로 결국 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구나, 하면서 울었다.
 
물론, 울며불며 매달린다면 왜 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또 그럴 자신도, 근거 없지만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어린 딸을 붙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구질구질하게 생각되었고, 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지 말자는 것이 큰 이유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속이 많이 상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차분하게 묻지도 않고, 딸의 편지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으로, 또 서로 연락을 나누자며 딸에게 쥐어준 휴대폰을 해지시키는 걸로 내 입장표명을 대신했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선언을 괘씸하게 여긴 나머지, 어느 날 마음을 되돌려 날 만나러 온다 해도, 다시는 아이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했었다.
 
이 사건도 벌써 4년 전의 일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딸을 절대로 보지 않겠다던 당시의 결심도 언제였나 싶게 녹았고 지금은 내가 잘못한 점을 더 많이 생각한다. 그때 좀 더 냉정했더라면, 그렇게 폭력적으로 딸의 편지에 반응하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도 한다. 또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 자녀와의 관계 맺기에 내가 얼마나 서툰가도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친엄마를 만나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을 전남편과 새엄마의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스스로 요구받았을 것이다. 굳이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면, 나라도 현재의 부모를 선택했을 것 같다. 아빠와 새엄마가 자기에게 지금까지 쏟은 정성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아, 친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딸아이의 선택은 합리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것들보다 더 큰 깨달음은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줬다는 ‘새 엄마가 더 친엄마 같다’는 말 자체에 내가 너무 천착했다는 걸 생각해낸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새엄마가 사랑으로 딸을 키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진심어린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기에 아이가 새엄마에게 이런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이라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비로소 헤아릴 수 있었다. 새엄마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준 아이가 고맙다. 시간이 지혜를 준다. 그래서 속상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딸에게도, 나에게도 행운이었다고,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관계가 이렇게 끝나 안타깝지만, 그녀를 잠깐이나마 만났던 사건 역시 내게는 또 큰 행운이다. 이제 딸의 얼굴도, 그녀가 사는 곳도, 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도 아니까 말이다. 그녀와 내가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만날 것이고, 인연이 없다면 이렇게 세월이 흐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물론, 나는 마음 깊이 다시 아이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그런 큰 행운을 꿈꾼다.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더 믿으며, 그렇게 딸을 생각한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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