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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고윤정의 멘토 찾기(5) 교육복지사 최미화  
 
요즘 심경이 복잡하다.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아버지의 시름과 오랜 자취 경력에 이력이 난 나머지 ‘에이 모르겠다. 하고 후회하자’며 결혼 준비에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한 몸 건사도 벅찰 지경에 괜한 일 저지른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다.
 
다른 문화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조율해야 하고, 잔소리는 늘어만 간다. 새삼 걱정되는 노후문제에,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부동산 시장 변화까지 살피고 있는 최근 일상은 출퇴근 인파로 꽉 들어찬 서울 지하철 2호선 같다.
 
무엇보다 30년간 나름 보장받던 내 자율권과 자주적 여성으로의 독립 의지가 ‘제도적으로 규정된 가족 체계’ 안에서 훼손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아아.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에게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그렇제? 우짜겠노”

▲ 최미화. 그녀는 마음의 경계를 녹이는 얼굴을 가졌다.  

 
최미화. 그녀는 내가 종사하고 있는 업계에서 ‘복지형 미인’으로 불린다. 둥글둥글한 턱 선에 윤기가 흐르는 피부와 도톰한 눈매는 저절로 마음의 경계를 녹여준다. 그래서 그녀와 이야기 하다 보면 처음 꺼낸 화제 외에도 무의식 언저리 맴돌던 불안과 억압 꺼리들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때가 많다.
 
그렇다고 그녀가 쉽게 상대방의 감정에 동조 되어 눈물을 흘린다거나 상담에서 잘 쓰이는 손잡기와 포옹 등의 비언어적 격려를 잘 쓰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나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은 그녀를 찾고 또 그녀를 좋아 한다.
 
그녀가 잘 쓰는 어투가 있는데 “그렇제? 우짜겠노.”이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방식 자체를 무디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야기 하다보면 “그렇지. 그래서였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온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공식보다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 상대에게도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가 된다.
 
최근 나의 골칫거리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확 엎어버려?" 랬더니, "힘들제. 우짜겠노"랬다. 여기서 우짜겠노는 '같이 생각해보자 + 어떤 방법이 있겠나 + 상대방은 염두에 두어봤나'의 줄임 말이다. 세 문장 중에 1문장이라도 마음이 와 닿으면 감정이 풀리게 된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쏟아 부은 사람을 떠올리면서 "내가 뭘 잘 못했나 생각을 해보니까. 그 사람도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황희 정승처럼 너(A)도 옳고 너(B)도 옳다는 논리가 아니다. 상대가 잘못했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 올 때 손잡아 줄 수 있는 품. 그녀의 이런 넉넉함이 나는 참 좋다.
 
서로 다른 것들이 잘 섞일 수 있도록
 

▲ 아이들에게 나눔과 배려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희망봉사단 발대식.    

 
2003년도에 학교복지사로 처음 그녀를 만났다. 그때 그녀의 인상은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며 두 아이 엄마였다는 점,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는 것 외에 특별한 인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그녀를 더 알고 싶다고 느끼게 된 건 아이들은 물론이고 교사와 학부모들까지 두루 팬으로 만드는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교사뿐인 학교 현장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기로 하찮은 사회복지 전문지식까지 다 동원하며 학생을 클라이언트(client)로, 단순한 놀이과정도 프로그램(program)이라 명명하며 잘난 척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비해 별다른 ‘끼’를 부리지 않아도 아이들을 바꾸고 학교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책 읽어주는 학부모들을 만들고, 교사들을 지역사회 밖으로 끌고 나오고, 어린이 봉사단을 조직해 내며 한 아이가 행복해지기 위해 온 마을을 들썩거리게 하는 사람. 지금은 '멘토링'이라고 해도 많이 이해하지만 2003년에는 생소한 그 단어를 '사랑의 끈 잇기'라 고쳐 부르며 알려냈던 그녀 덕에 옆집 아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마을 어른들이 많아졌다.
 
작년 이맘때 쯤 교육복지 홍보 동영상을 촬영 한다고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여중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이제 고작 14살이 된 소녀는 그녀에 대해 "엄마 같아요. 제가 집안 사정으로 너무 힘들어 하니까 낙동강에 데려가면서 ‘강물처럼 다 흘려버리라’고 하셨어요"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단연코 인고(忍苦)의 표상인 한국 전통 어머니 상은 아니다. 그녀의 둘째 딸에게 ‘삼성’ 취직을 권유하며 ‘취업 후 노조 활동을 하라’고 한다거나 오로지 김치로 여러 날 반찬을 연명하기 일쑤다. 한 명도 키우기 힘든 세상에 세 명의 자녀를 둔 그녀는 '설렁 설렁'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도 적당히 여유롭게 대한다. 그래도 그녀의 세 아이는 가치 있게 잘 자라고 학교 아이들은 좀 더 자기 긍정성을 얻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빛내고자 많은 시간을 투자 한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것, 차이를 무기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녀를 보면 '무던함'의 매력을 배우게 된다. "뭔가 잘 포장된 결과물을 내는 것이 어렵다"며 뭐 하나 딱히 잘하는 것이 없다고 자평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각기 다른 것들이 잘 섞일 수 있도록 하는 무던함이 누구도 정말 갖기 힘든 장점이에요"
 
함께 고민을 나누는 리더십

▲ 전국여성노동조합 행사에서 교육복지사 지회 대표로 발표하는 모습.  

 
올 초 그녀가 인터넷메신저 대화로 이런 문장을 보내왔다. "요즘 감동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지칠 만도 했다. 올 초 교육복지사 해고 논란 속에 사회복지계에서는 매우 드문 노조, 그것도 여성 노조 가입 결성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태생이 갈등을 싫어하는 유형이다. 온갖 성격 검사를 다 해봐도 가장 못 견뎌 하는 스트레스가 논란이나 갈등이니 오죽 했을까 싶다.
 
사실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조차도 두려움도 컸다. TV로만 주로 접했던 노조. 빨간 띠 두르고 구호를 질러대는 집단이라는 세간의 인식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노조 가입을 사이에 둔 동료들 간의 갈등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내 머릿속에 그려졌던 지도자 이미지는 문제가 되면 책임은 고스란히 안고 먼저 비전을 제시해야 해서 '투사'같았다. 문어체를 주로 사용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회의를 열고 '동지 힘내시게'를 연발하는 상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녀의 활동을 보면서 지도자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같이 고민을 나누는 사람'으로.
 
그녀가 노조를 만든 과정도 그렇다. 동료들이 직장에서 힘들고 외로운 이야기를 그녀에게 나누자 그녀는 그 고민을 흘려버리지 않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또한 그들로부터 받은 여러 조언을 다시 동료들에게 전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울림들이 생겼고 공동체 의식이 성장해 단체 행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발생 된 책임감은 올 초 그녀를 지치게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 속에서 힘을 얻게 하기도 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한진 중공업 크레인 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이라는 사람을 과격한 투사로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함께 고민을 나누는 사람, 대안을 먼저 제안하고 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도자라는 것을 최미화라는 사람을 통해 배웠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비결”
 

그녀를 떠올려 보면, 결혼이라는 당면 과제가 좀 덜 부담스럽다. 결코 그녀가 완벽한, 아니 완벽 비스무리라도 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 남자 친구가 보낸 문자를 보였더니 "에구! 난 하루만이라도 이런 말 들어봤으면 좋겠다. 복이 넘쳤구만"이라며 등짝을 툭 치는 그녀다.

 
그다지 살갑지도 가정적이지도 않다는 부부 사이에 학령기 자녀 세 명, 의지할 가까운 친척도 없는 도시 생활 중인 그녀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면 3년도 못가 금방 도망치고 싶은 심정일 것 같은데 그녀는 용케도 잘 헤쳐 낸다.
 
"어떻게 집안 일, 직장 일 다 그렇게 해낸대요?"라고 물었더니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비결"이랬다.
 
사실 나는 슈퍼 우먼이 되고 싶지 않다. 일 잘하고 돈 잘 벌며 미모 가꾸고 애들 교육에 집안 살림까지 다 잘하는 슈퍼 우먼은 분명 정신 병리를 앓게 될 것이라는 섬뜩한 상상도 든다.
 
게다가 나는 세상에 아직 못해본 것들이 너무 많다. 일단 지겹도록 놀아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생각과 시간, 공간 모두에서 독립 의지조차 저당 잡힐까봐 괜히 불안하다. 그런 나에게 결혼 생활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조언 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물론 그녀도 대놓고 대충 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일구는 삶을 보면 완벽하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두지 않아도 멋져 보인다. 남편이나 아이를 삶의 전부로 두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 해나가고 싶은 것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방식을 택했다. 엄마로서 최미화 뿐만 아니라 인간이며 여성으로써 최미화도 함께 살아 있다.
 
직장일 외에 그녀가 하는 활동도 교육, 여성, 노동 등으로 돌봄과 환대의 지역 만들기를 위한 '줌마 파워'를 키워내는 것들이 많다. 교육희망네트워크, 총선 대비 공약 제안, 게다가 여행까지.
 
그녀는 나에게 "에너지가 참 좋다. 꿈을 항상 잊지 않는 것이 매력"이라고 했었다. 그래. 그녀처럼 에너지를 다스릴 수 있도록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같은 그녀다. 천지 팔도를 꼬불꼬불 에둘러 흐르며 천천히 길을 만들고 양분을 보내주는 사람. 언젠가 공간이 생긴다면 그녀와 아이들 문제를 고민하는 엄마들과 '대충 살기의 위대함'을 주제로 수다 실컷 풀어보면 참으로 재미나지 않겠는가. (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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