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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나와 홀로서다> ② 전기영, 좌충우돌 자립생활 1년 이야기
 
[2010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을 포함해 지역사회단체들이 함께 시작한 장애인주거복지사업을 통해 16명의 시설거주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적 지원이 많이 미비한 상황에서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찾기 위해 용감하게 홀로 선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나, 자립했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이 중 일부를 <일다>에 옮겨 싣습니다.]
 
‘하지 마라, 아무 것도 하지마라’던 시설생활 

▲ 전기영 씨는 14살부터 32살까지 18년을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살다가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사진-고은경 
 
그녀는 14살부터 32살까지 18년을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살았다.

“엄마가 저 때문에 어디 밖에도 못나가고, 나가더라도 빨리 오고 그게 참 싫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가족들은 시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엄마의 하나뿐인 딸이었던 기영 씨는 “엄마가 시설에 가겠느냐고 물어서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하루 종일 생각해서 그 저녁에 말했어요. 엄마 나 갈래. 그냥 엄마 때문에 간다고는 얘기 안하고 그냥 공부하러 갈래. 이렇게 말했는데… 밤에 엄마가 부엌에서 막 울더라고요. 저는 사실 가기 싫었죠. 그런데 저도 소리는 못 내고 그냥 울기만 했어요.”
 
그렇게 스스로 찾아간 시설에서의 생활, 행복하지 않았다. “한 1년은 적응도 못하고 애들이랑 말도 잘 안 하고. 그런데 1년 넘어가니까 그냥… 그런데 한 10년 살고 보니까 그때부터 서서히 제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그때부터 우울증이 있었죠.”
 
시설은 그녀가 ‘무언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설에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찾아와 검정고시 준비를 도와주었지만 ‘더 많은 걸 알면 더 많은 걸 요구할까 봐’ 시설에서는 검정고시에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몰래 몰래 검정고시에 응시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장애수당 가로챈 시설, 부모들도 내 편이 아니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 시설에서는 거주인 중심의 권익모임인 ‘권익보호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녀는 그 모임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친구들과 일일찻집을 진행하고 수익금으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리모컨이 있는 선풍기 여섯 대를 구입해 모임의 이름으로 시설에 기증했다. 시설관계자들과 부모님들의 반응은 시설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반응과 달랐다. “어렵게 이걸 해서 뭐 하느냐고, 그냥 사는 게 더 낫지, 뭐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시설에서 나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시설이 장애인들에게 지급되는 장애수당을 가로채고 있었다는 것이 감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감사 이후에도 시설은 장애 당사자들에게 장애수당의 절반만을 지급했다. “돈 없다고 하고, 보일러 값도 만만치 않다고 그러고…”
 
‘권익보호협의회’의 회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모회(부모회)’를 찾아갔다. “장애수당이 겨우 8만원뿐인데, 이것의 반을 뚝 자르면 4만원밖에 안 되는데, 이건 진짜 너무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우린 부모회 모임이 저희 편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모회와 시설의 총무는 권익보호협의회 회장인 그녀와 부회장을 사무실로 불러 폭언을 퍼부었다.
 
장애수당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시설에 있는 장애인 중 ‘뇌병변·지체 장애인에게만’ 장애수당을 모두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200여명의 장애인 중 20명 내외의 장애인들만이 해당됐다. 그녀는 시설의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시설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설에 들어온 지 14년만이었다.
 
준비부터 ‘혼자’였던 자립생활

 
“나 여기서 나갈래.”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다. 엄마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이 있었다. “엄마가 가게도 하는데 너를 어떻게 보살피니?” 그때부터 가족들에게는 시설에서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혼자서, 그녀 혼자서 시설 밖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가 장애인 카페에 가입을 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친구를 만나고 언니도 만나고. 그래서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활동보조인 제도도 그 때 알았어요.” 시설에서는 장애 당사자들에게 활동보조인 제도와 같은 장애인 관련 복지제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탈시설 자립생활에 대한 안내나 도움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혼자서 준비해야 했다. 그녀에게 의지가 된 것은 장애인 동료들뿐이었다.
 
자립생활을 꿈꾸는 그녀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살 집, 생계를 위한 수급권, 그리고 활동보조인’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제도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임대아파트 입주여부, 활동보조인 제도와 이용가능시간, 수급권자 여부. 결론은 “조금 힘들겠다.”였다. 가진 재산이 하나도 없었지만 시설을 나가면 다시 조사한다는 수급권자격심사도 두려웠고, 무엇보다 집을 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룹 홈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시설을 나설 준비를 하던 그녀가 자살을 시도했다. 시설생활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우울증’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내 생활이 없는 시설에서의 생활이 지겹다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족들은 그녀와 삶을 나눌 수 없었다. 활동보조인 이야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시설’이라고 생각했다.
 
자립생활하는 장애인을 만나보지 못한 가족들, 장애인은 모두 시설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황을 바꾼 건 그녀였다. “그때는 이판사판으로 엄마, 아빠 나 그럼 죽이든지 아니면 주거복지사업(시설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에 지원하게 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부모님들은 주거복지사업에 지원하는 걸 허락하긴 했지만 모든 일은 그녀가 혼자 처리해야 했다. 부모님들은 그녀가 ‘혼자’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자립 후 부모와 생이별… ‘부양의무제’가 뭐길래 

▲ "진짜로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혼자 힘으로 주거복지사업에 선정되었고 자립생활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사진-고은경  
 
“진짜로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혼자 힘으로 준비해서 주거복지사업에 선정되었다. 자립생활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주거복지사업으로 살 집이 마련되었고, 활동보조를 신청했다. 그러나 자립의 보대낌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신청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전입신고와 함께 수급 재심사도 진행되었다. 사실 그녀는 시설에서도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재심사가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시설에 살 땐 수급자였다가 자립해 지역에 산다고 수급자에서 탈락될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전화가 왔어요. 동사무소였는데, ‘부모님 집 번호를 아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알려줬지요. 그리고 며칠 있다 또 전화가 왔더라고요. 수급자가 안 될 수 있다고요. 영문을 몰라 미소(주거복지사업 실무자)에게 전화를 했지요. 그때 곧이곧대로 이야기한 게 잘못이었던 거지요. 동사무소에서는 부모와 연락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던 과정이었던 거예요.”
 
가족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실상 기영 씨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많은 빚을 안고 있었고 어머니는 밤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고 있던 터다. 수급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아다니고 사정도 했다. 결국 동사무소에서는 가능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아야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가. 굉장히 혼란스런 상황에서 뉴스에 사정을 이야기 할 기회가 생겼다. 부양의무제에 관련했던 내용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나를 부양할 여력이 안됐기 때문에 시설에 입소했고 생활했던 건데. 이제야 겨우 혼자 살아보겠다고 시설에서 나오니까 부모님 재산 때문에 내가 수급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느냐고, 나 때문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팔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럼 진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그럼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했어요. 9시 뉴스에 나왔더라구요. 이틀 뒤에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언제 안 해준다고 했냐면서.”
 
그렇게 겨우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동사무소에서는 재심사 때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영 씨가 자립에서 수급비가 빠진다면 자립은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수급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가족과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통화 내역도 남기면 안 되고,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다. 시설과는 또 다른 감시가 그녀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올 추석에는 집에 갈 엄두도 낼 수 없었어요. 가족들하고 전화통화도 안하고. 가끔씩 공중전화를 이용해요. 목소리는 듣고 싶으니까. 부모님도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요.”
 
더 이상은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아닌, 자립한 딸의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부양의무제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얻기 어려웠던 활동보조
 
두 번째 관문은 활동보조인이었다. 2011년 7월 22일부터 자립과 함께 활동보조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 받은 활동보조시간은 월 총 100시간이었다. 하루에 세 시간 남짓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처음에 나왔을 땐 솔직히 죽는 줄 알았어요. 복지부에서 딱 100시간 나왔거든요. 오전 오후에 각각 세 시간씩 썼어요. 그때만 해도 월초가 되면 전달에 남은 시간이 다음 달로 이월됐거든요. 22일에 나왔으니까 열흘 동안 최대한 아껴 쓰면 다음 달로 얼마의 시간이라도 이월해서 쓸 수 있으니까 아껴 써야 했죠.”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침대나 휠체어. 그녀는 몸이 옮겨지는 공간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그녀, 생경한 자립의 시작에서 활동보조인의 부재는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이었다고 말한다.
 
“처음 자립을 하면 교육이 많잖아요. 매일 교육을 받으러 나가야 하는데, 서울 길도 잘 모르고 그때만 해도 휠체어 운전도 서툴 때니까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시설에서 나올 때 모아놓은 돈이 딱 80만원이었는데, 그 때 그 돈 다 쓴 것 같아요. 차비로.”
 
지금의 활동보조시간을 확보하는 데 꼭 두 달이 걸렸다. 이의신청을 하고,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활동보조시간을 신청하고, 인터넷을 뒤져 복지부가 초기 탈시설 장애인에게 20시간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자립을 하고 두 달 만인 9월에야 지금의 393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사실 시설에서 갓 나왔을 때가 길도 사람도 제일 모르고, 그러니 더더욱 사람이 필요할 때잖아요. 가장 필요할 때 (활동보조)시간을 적게 주고 조금씩 얹어주니까 사실 그게 제일 힘들고 무서웠어요.”

그런 고된 절차들을 밟고서야 성동구에서의 자립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은 그녀에게 또 다른 시련을 준다.
 
‘관계 맺기’를 배운 호된 신고식
 
그녀는 주중에 두 명, 주말에 두 명. 모두 네 명의 활동보조인을 이용하며 생활했다. 그 중 주중에 그녀와 생활하는 활동보조인이 그녀에게 억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맨 처음에 활동보조인에게 많이 의지했어요. 모르는 것도 많이 물어보고 했는데. 6개월이 넘어가고 그러니까 ‘아, 이런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활동보조인은 그녀에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녀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녀의 외출을 제한하고, 집으로 그녀의 손님들이 방문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외출을 하려면 활동보조인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나는 가겠다고 그러면 어떨 때는 내가 이기고, 어떨 때는 활동보조인이 이기고. 거의 활동보조인이 이겼어요. 내가 교육을 간다고 하면 “언니 교육받으러 가면 뭐 알아?”라고 그러고. 야학도 다니고 싶었는데 “언니, 언니는 의지가 약해서 조금 다니다가 말거야. 그러니까 아예 다니지 마” 그러는 거예요. 활동보조인은 그녀의 생활 전반을 통제해 왔다. 호칭은 언니이지만, 지시형 언어들이 떨어졌다. ‘언니 이거해, 언니 저거 해.’ 시설이랑 뭐가 다른가.
 
자립생활이 6개월에 접어들던 무렵, 그녀는 주거복지사업을 함께하던 활동가를 만나 다시 시설에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장 활동보조인을 교체하라고 조언하고 이후 과정을 도와주었다. 활동보조인은 일을 그만두는 과정에서도 그녀를 괴롭혔다. 일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거칠게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핸드폰을 그녀의 가슴에 집어던지고, 10여분 동안 때려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 후에도 활동보조인 교체 의사를 바꾸지 않자, 혼자 있는 그녀의 집에 밤늦게 찾아와 수없이 초인종을 눌러댔다. 활동보조인이 아니, 의지했던 한 사람이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내가 그렇게 살았을까. 거기는 시설도 아니었는데, 내 집이고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컸어요. 무섭기도 했고, 나의 무기력함에 너무 열 받았고.”
 
이후 그녀는 집을 옮겼고, 활동보조인이 두 번 더 바뀌었다. 그 후 그녀에겐 습관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활동보조인과 연결되기 전에 면접을 꼭 해요. 활동보조인이니까 무엇보다 성실성이 중요하죠. 시간개념 같은 거요. 그런데 뭣보다 말투, 눈빛을 보게 됐어요.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보게 되는 거죠.”
 
시설에서의 관계 맺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직원, 혹은 동료. 자립은 수많은 관계맺음의 기회가 주어지고 요구된다. 그녀의 호된 자립생활 신고식은 바로 관계맺음이었다.
 
친했던 언니의 죽음을 바라보며
 
자립생활도 제법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올 여름은 비가 많았다. 곳곳이 폭우로 난리였고, 기영씨도 난생 처음 물난리라는 것을 겪었다.

“새벽 세 시에 깼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안자고 있었어요. 화장실에서는 뽀글뽀글 소리가 나는데, 나는 가 볼 수가 없잖아요. 어쩌나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지는 거예요. 옆집에서 물이 넘친 거죠. 머리맡에 스탠드를 켜려고 손을 뻗었는데, 스탠드가 안 켜지는 거예요.”

누전이었다. 침대 옆 충전 중이던 전동휠체어의 전선을 잡아 당겼는데 ‘찰랑’ 물소리가 났다. 방안까지 물이 차고 들어왔는데 알지 못했던 거다. 당황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는데 다들 깊이 잠들었을 시간, 쉬 연락이 닿질 않았다.
 
“겨우 활동보조인과 연락이 닿았어요. 활동보조인이 전화를 받고 집까지 오는데 한 20분 걸렸는데, 그 사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동이 틀 때까지 물을 퍼내고 방을 닦았지만, 다시 비소식이 이어졌다. 집주인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방법을 찾을 길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자장면 배달원에게 ‘동사무소에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더라.’라는 말을 듣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과 실랑이가 좀 있었어요. 전동휠체어가 고장 났는데 비싸니까 다른 거 말고 충전기만 좀 바꿔 달라고 했는데 그걸 왜 해주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사무소에서 모래주머니 가져다 놨을 때 그것도 현관 앞에 못 쌓아 놓게 하고… 거기에 옆집 할머니는 ‘그냥 죽으면 되지’라고 말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더라구요.”
 
한바탕 큰소리가 오고간 후 어찌어찌 집주인을 설득해서 하수구를 뚫고 물이 넘치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현관 앞에 쌓아놓으니 다시 밤이 찾아왔다. 다행히 다시 물이 넘치는 일은 없었지만, 다음 달에 다시 쏟아진 폭우, 이번엔 벽에서 물이 쏟아졌다.
 
“물이 무서워요. 비만 오면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을 못자요. 또 이상한 냄새가 나도 못자겠어요. 불 날까봐. 주영언니가 그렇게 가고 나서 더욱더 그렇고요. 주영언니 사고 후에 평소에 먹던 우울증 약을 반절 정도 올렸어요.”
 
지난 10월, 화재사고로 사망한 고 김주영 씨는 기영 씨가 이용하고 있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던 이다. 그녀는 합선으로 일어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활동보조인이 집으로 돌아간 지 세 시간 후에 화재가 일어났고, 불은 화재신고 후 10분 만에 진화되었지만, 다섯 발짝을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화염 속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기영 씨의 집에 덮쳐 들어온 게 물이 아니라 불이였다면… 그녀는 아찔해한다.
 
“다른 건 몰라도 활동보조인은 24시간 지원됐으면 좋겠어요. 집에 물이 들어왔을 때 휠체어가 고장 났는데, 충전기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휠체어컨트롤러를 뜯어보니 다 타있더라고요. 만약 혼자 있을 때 충전하다가 불이라도 붙었더라면…”
 
자립의 요건들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자립은, 일종의 모험과 같은 것이다. 대다수의 시설에서 살던 장애인들은 자유를 쫓아 시설에서 나왔다.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자유로운 삶을 위해 그녀는 한 마리의 불나비가 되어야 했다.
 
‘연애는 당분간 보류. 자유를 동료들과 나누고 싶어요’

▲ 나비가 된 전기영 씨는 자립생활의 최고의 장점을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 사진-고은경

그래, 나비가 된 그녀는 자유롭다. 자립생활의 최고의 장점을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슬픈 기운을 돌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예뻐진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예전에도 멋쟁이인 줄 알았지만 유독 우아해지는 것 같아 비결을 물었다.
 
“예전엔 거울도 잘 안 봤는데 지금은 거울을 잘 봐요. ‘내가 꽤 예뻐졌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하하 비결은, 돈 쓰면 다 예뻐지던데요?! 전엔 화장품도 하나 없었거든요. 화장을 하고, 미용실 가서 매직스트레이트 파마도 하고, 옷도 많이 샀어요. 집 근처에 보면 5천 원씩 싸게 파는 옷들이 있는데 거기 잘만 보면 예쁜 게 있거든요.”
 
새침한 서울아가씨가 잠시 그녀 위에 앉았다 간다. “와! 기영씨, 서울 사람 다 된 거 같아요. 이제 연애도 해야죠?”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가운데, 기영 씨는 들꽃사이 해바라기처럼 빛이 나곤 한다. 당당하고 차분한 말솜씨는 후광까지 만들어내곤 하는데, 그만큼 인기가 대단한 그녀다. 그런 그녀가 “당분간 연애는 보류”라고 외친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난 목표가 있으면 해내는 성격이거든요. 동료상담자격증을 따서 자립생활센터에서 상담사로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자립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니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네 번의 교육을 받았고, 2년 정도 상담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자격증을 받을 수 있어요. 지금은 목표를 위해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예요. 지금은 내 할 일에 충실해야 할 시간인 것 같아요.”
 
다부진 포부의 그녀다. 자립이 혼자서 살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안다. 열린 공간이 때론 닫힌 공간보다 더 외롭고 두려운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그녀는 스스로 터득하고 배워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제 2, 제 3의 전기영에게 말을 건넬 준비를 하고 있다. (이은영, 효정) 

 * 어두운 시대 희망의 불을 밝히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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