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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원히 빛이 꺼지지 않는 삶을 위해
<시설을 나와 홀로서다>③ 박현, 詩에 담은 자립이야기 _최성규 기록
2010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을 포함해 지역사회단체들이 함께 시작한 장애인주거복지사업을 통해 16명의 시설거주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적 지원이 많이 미비한 상황에서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찾기 위해 용감하게 홀로 선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나, 자립했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이 중 일부를 <일다>에 옮겨 싣습니다.
시설 거주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홀로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우리 사회가 어떠한 지원체계를 갖추고 어떻게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삶은 장독대를 열어 맛을 보는 것과 같아요’
▲ 13살부터 시작된 시설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자립생활을 시작한 박현씨. 그는 시설 안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 고은경
“바깥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뭐랄까 장독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골집 뒷마당에 가면 있잖아요.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장독대. 하나만 달랑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가 모여 있구요.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작은데 뚜껑을 열고 맛을 보면 모두 다르거든요. 대부분 맵고 짜지만 싱거운 것도 있더라구요. 하하… 속을 알 수 없는 장독대를 열어서 여러 가지 맛을 본 것 같았어요.”
시설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갇혀버린 사람들. 상상할 수 없는 질곡의 시간을 묻는 질문에 그가 꺼내놓은 것은 투박한 장독대였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항아리들이 굳게 박혀 있는 뒷마당. 그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서 뚜껑을 열고 맛을 보고 왔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 대해서, 아니 그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져도 한참 가졌었나보다. 깊고 어두운 터널 같았을 거라고 상상하는 내 앞엔 시골집 항아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곳에도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에 조금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가을비가 그친 제법 쌀쌀한 어느 날, 뉴스에서는 올해 들어 가시거리가 가장 먼 하루로 기록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걸음을 늦출 때마다 시설에서 썼다는 그의 습작시들을 떠올렸다. 시인을 만났구나. 시설에서 탈출한 장애인이 아니라 묵묵히 그곳을 통과한 한 시인을 만났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잊힌 침묵의 삶들을 장독대에 담아, 조심스럽게 세워 놓은 발걸음 위로 겹겹이 써내려간 시. 시인의 이름은 박현이다.
희망의 작은 모습
길가에 한마리 새가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작은 몸짓을 치며
걷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내 마음이 매여지는 것 같습니다
하얗게 눈이 내린 겨울날
저 새의 몸짓은
삶의 끈을 잡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오늘도 그 길에서 따뜻한 눈길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 날’ 이후 돌아가지 못한 집
“학교는 가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은 모두 일을 하셨고, 가끔 동네 아주머니가 와서 봐주셨구요. 2살 위 누나가 있었는데 늘 차가웠어요. 장애가 있는 나를 더 걱정하는 집안 분위기에 질투가 났던 거라고 생각해요. 한 3살차 남동생은 나를 조금 따랐던 것 같은데 기억이 별로 없어요. 아빠도 기억이 별로. 엄마보다 내 편을 더 들어준 것 같았는데 그냥 저 하고 싶은 거 하게 두라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으니까.”
그는 13살에 시설에 입소했다. 친구들 있는 곳으로 가자고만 했지 시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출퇴근을 하는 복지관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야 입소가 가능했던 시설은 면회도 너무 자주 오면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한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일 년에 한 번이 되고, 그렇게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은 그냥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과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가족을 원망하지 않았냐고 묻는 질문에 처음엔 그랬지만 받아들였다고 했다. 늘 차가웠던 누나, 그냥 놔두라는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은 원망보다 이해였다. 나만 빠지면. 모든 게 제자리니까.
바램
세상을 날 수 있는 작은새가 되고 싶습니다
행복을 전해줄 수 있으니까
소나기가 되고 싶습니다
아픔과 상처가 많은 세상 잠시나마 씻겨 줄 수 있으니까
해가 되고 싶어라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은 냉정하고 굳어버린
세상 사람들 조금이라도 마음을 녹여줄 수 있으니까
“현이씨 시에는 작은새가 자주 등장하는 거 같아요.”
“네. 그 작은 몸이 움직이는 걸 보면... 귀엽다기보다 애쓰면서 살고 있구나 싶어요. 잘 눈에도 뜨이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죠. 저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사실은 새가 되고 싶어요. 어디든 날아가잖아요. 턱도 넘고 담장도 넘고. 물고기는 육지를 건너지 못하고, 육지동물은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새는 무엇이든 건널 수 있으니까요.”
“시설에는 아픈 사람들이 많았어요. 시설 안에도 병원은 있었지만 아픈 사람들을 제때 치료해 주진 못했어요. 친한 사람이 있었는데 입소 후 한 두 달 뒤에 같은 방을 썼던 아저씨였어요. 그 분은 저의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글도 그 분께 배웠고 장기도 배웠어요. 시설에서 장기를 가장 잘 두셨는데, 수제자였던 제가 시설 내 장기 대회에서 그 분과 결승까지 가서 1등을 한 거예요. 너무 기뻤어요. 근데 상품이 페트병 소주 2병. 황당. 18, 19살이었는데 말이에요. 암튼 그런 분이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디가 아파서 외부에 있는 병원에 가셨다는 거예요. 수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시설은 그렇게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지는 곳이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낮에 있다가 밤이 되면 퇴근하는 직원들, 잠깐씩 있다가 가는 봉사자들도 모두 그에겐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요. 같이 놀았던 봉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봉사자가 급하게 집에 가야한다고 차비를 빌려달라고 하더라구요. 5만원. 그리고는 안 나타났어요. 카세트가 있었는데 그것도 가져갔구요. 직원한테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없다는 거예요. 어떤 직원한테도 당했는데, 며칠 무단결근을 하다가 이미 짤린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일하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시설에서 거절했었죠. 그런데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겠다고 며칠 나오더라구요.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내 방에 찾아와서 장기를 두자고 나가자고 하더니 강당에 저를 혼자 앉혀놓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고는 빈 방에 다시 간 거였어요. CD 플레이어를 가져갔는데 그거 말고는 가져갈 만한 게 없었죠. 그때는 기분이 나빴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해 보였어요.”
미움과 원망 대신, 손을 내밀다
▲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새가 되고 싶다는 박현씨. ©고은경
아름다운 손
손은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끈이며
손은 사람을
알게 합니다
손은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끈으로 살짝 묶어줍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그 끈을
건네지 못하고
난 마음이 아파
내 작은 손으로 기도합니다
그는 사람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미는 일. 시를 쓰게 된 이유였다. 문자로 좋은 노래와 글을 사람들에게 보내주니까 좋아했다고 했다. 학교에 갈 시간에 보내고 잠이 들기 전에 보내주면 너무 고맙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시설에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들어와서 같이 사는 사람들 중에는 또래가 없고, 늘 아저씨들과 살게 되었다. 외로웠다고 했다. 그러다가 멀게만 느꼈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짧은 문자 메시지에 노래 가사나 좋은 글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직접 쓴 글을 보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에 시를 쓴 것이다.
나의 어머니
나의 삶에서
늘 힘이 되어 준 그 사람
이제는 곁에 없다 해도
나는 당신의 품을
잊지 못합니다
세상에 빛을 보여주었던
나의 소중한 사람 힘들고 지칠 때
내 마음 아시는 듯 그 따뜻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당신의 포근한 품으로
안겨주던 그 사람에게 나는 힘이
되어주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늘 담아 두었던 말
그 흔한 말 이제서야 꺼냅니다
나의 어머니 사랑합니다
“이 시는 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쓴 시예요. 마음에서 보내드리려고. 그리고 다른 엄마가 생겼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어쩌면 그 분께도 들려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요. 두 엄마에게 모두.”
“어느 날 그 분에게 문자를 보낸 게 처음이었어요. 엄마… 라고 불러도 될까요? 한참 있다가 답이 왔어요. 괜찮아. 하고. 그때부터 문자 메시지가 좋아졌어요. 엄마에게 가끔 메시지를 보냈어요. 문자보다는 전화를 주시거나 다음에 오실 때 잘 받았다고 얘기해주셨지만 괜찮았어요. 그래도 너무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의 몸에서 시인을 불러냈던 문자 메시지. 문자가 좋아졌던 건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다른 엄마가 생긴 것이다. 잘해주시는 직원 아주머니와 함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엄마-아들 하면 되겠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단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러고 싶었다고.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새 엄마가 생기고 나서 쓴 시였지만, 진짜 엄마를 어쩌면 영영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다가 쓰게 된 거라고 했다.
어떤 어머니냐고 묻는 내게, 아마도 두 어머니에게 모두 쓴 거라는 이상한 말을 했다. 마음속으로 진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문자 엄마를 빈 마음에 채웠던 것이다. 더 이상 곁에 없다 해도,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두 어머니 모두에게 보냈던 사랑한다는 말…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립을 위해 넘어야 했던 ‘벽’들
아름다운 선물
난 창 앞에서
잠을 자듯 눈을 감았습니다
그 어둠속에서
작은 빛이 떨어지고
잠시 뒤
푸른 하늘 그 사이사이
떠있던 구름 조각이 떨어집니다.
어느덧 내 손은
머리 위로 향하고
한발 한발 다가가니
그 작고 힘없는 조각이 모여
내 주위를 장식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주는 선물이라고
“이 시는 죽음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니예요. 어느 핸가 12월 31일 밤이었는데 눈이 오는 거예요. 시설에서는 한 해에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한 이벤트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는데 창 밖에 눈이 오더라구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작고 힘없이 떨어지는 눈송이가 너무 예뻤구요.”
그의 시에는 슬픔이 없다. 어딘가 슬픔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의 마지막은 ‘사랑합니다. 기다립니다.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 끝나고 있었다. 늘 누군가 위로를 하고 있었던 거다. 죽음의 순간을 그린 것 같다고, 어딘가 슬프게 보인다고 묻는 질문은 모두 빗나갔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시설에서 나오게 된 과정을 물을 수 있었다. 어쩌면 전쟁터가 될 수도 있는 바깥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진작부터 나오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어요. 근데 시설장이 자립할 방법을 알려줬죠. 한뇌협(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을 소개시켜줬고, 교육도 받았어요. 먼저 나간 분이 있었는데 발바닥(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도 소개시켜줬어요. 집안에선 반대가 심했어요. 장애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혼자 살 수 있냐는 거였죠. 생활비나 집을 구하기 위해 음성 군청에 활동가들과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을 준비했어요. 그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음성군은 거부했고, 어떤 직원은 외출을 하려고 하면 부모님께 연락을 했어요. 부모님은 소송을 취소하겠다는 지장을 강제로 찍게 하기도 했구요.”
그야말로 거센 반대였다. 13살에 입소해 16년만이었다. 가족과 시설과 지자체가 그의 자립을 반대한 것이다.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은 2009년 탈시설 자립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거주지, 정착금 등의 지원을 구체적인 욕구에 따라 집행할 것을 요구한 싸움이었다. 탈시설 자립생활에 대해 정보를 주고 지원을 하도록 되어있는 복지법이었지만, 실상은 돈을 받고 싶으면 기초수급신청을 해서 받고 관내에 국민임대주택을 신청하라는 것에 불과했다.
관료적이고 무책임한 행정은 그를 주저앉히려고만 했다. 그렇게 변경 신청이 거부당하고 나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몇 년의 싸움이었지만 결국 패소 판결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사회복지서비스가 얼마나 실효성이 없고 전시행정이었는지 알리는 계기가 된 거였다.
2011년 1월 6일 드디어 그가 자립을 했다. 3년만이다. 그는 자립을 실감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동사무소에 가서 직접 전입신고를 했던 날을 떠올렸다. 방 안에서 마음대로 티비를 보고 외출을 하고 밤에는 늦게 잘 수도 있는 그런 자유가 자립이 아니었다. 지역 사회에서 당당하게 신고를 하고 구성원이 되는 기억. 그거면 충분했던 거다.
“넘어야 하는 벽은 계속 나타났어요.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비장애인도 살아가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제일 힘든 건 사람 관계였어요. 대인관계 경험이 없다보니까 활보(활동 보조인)와 마찰이 있었어요. 내가 채용한 일꾼인데 내가 눈치를 보게 되더라구요.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거기 직원이나 봉사자들처럼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미안하고, 필요한 걸 말 못하는 거죠. 친해지기도 힘들고.
때로는 이상한 사람도 있었어요. 사람 많은데 이동보조를 시키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게 부끄러웠나 봐요. 마음먹고 술 한 잔 마시면서 풀어보려고 했는데 더 황당한 말을 하는 거예요. 앞으로 해달라는 거 해줄 테니까 술심부름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나이어린 놈이 술심부름 시키는 건 못 참겠다는 거였어요.”
가슴에 품은 사랑이야기 하나
하루
길었던 하루가 지나고 있습니다
어느덧 햇님도 그대와의 이별이 아쉬운 듯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천천히 져가고
내 마음도 어느새 어두워집니다
난 그대와 보낸 하루가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그대는 날 봐주진 않지만
내가 그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이 긴 밤도 그대는 날 생각하진 않겠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내 앞에 한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 앞에 서지 못합니다
얼굴을 마주보면 내 마음 알까봐
나는 고개를 돌립니다
내가 너무 초라해
손도 내밀지 못하는 내 삶이지만
나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그 모습 잊지 않게 내 눈에 항상
당신이 있으니까
가슴 아프게
마음 속으로 외치는 말
이젠 입으로 외치고 싶습니다
그 힘든 말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를 인터뷰하기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탈시설-자립한 장애인과 함께 진행했던 워크숍, ‘스토리텔링 - 내 안의 역사쓰기’에서 떠난 강릉의 바다에서였다. 운전기사 겸 좋은 사람들과 파란 바다에 초대되었던 거다. 그 곳에서 처음 보게 된 박현은 힘겹게 마이크를 잡고 마음 속 으로만 좋아했던 짝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를 시설에 데려간 가족도, 시설에서 돈과 CD플레이어를 훔쳐간 누군가도, 나를 힘들게 했던 활동보조인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가 가슴에 품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23살 어린 나이였죠. 동갑이었어요. 시설에는 봉사자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눈에 뜨이는 거예요. 핸드폰 주소록에 그녀는 이쁜이였어요. 법학과 학생이라고 들었고 1년 휴학을 하면서 봉사를 하는 거 였나봐요. 공부도 잘하면서 이런 곳에 왜 올까 생각했었어요. 동갑이었는데 잘 어울리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녀가 직원 숙소에서 살면서 어려운 점이나 자기 마음에 힘든 이야기를 내게 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녀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듣기만 하는 건데 편했나봐요. 그저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 뿐이었어요. 그녀는 마음에 상처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이쁜이는 처음엔 예쁘지 않았는데 내게 와서 심장에 박혔어요.”
손수건
슬픈 이별을 했습니다.
언제나 나뭇가지에 나뭇잎처럼
항상 곁에 있고 싶어했던 내 마음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내 마음에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겨울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오지만
그렇지만 나는 다시 나뭇잎이 되어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장의 손수건을 드립니다
나뭇잎은 다시 이별을 말하지만
내 마음 이 손수건이 되어
힘들고 슬플 때 언제나 당신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시는 곧 노래가 되리
그렇게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 어느 시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즈음에 더 이상 시를 쓰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녀를 떠내 보내서가 아니라 시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시설에 있던 ‘시인문학반’에는 나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많았고, 운율에 맞춰야 하고, 어렵기만한 시 공부를 해야 했다. 혼자 쓸 때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자유롭게 썼지만 시를 배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었다고 했다.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쌓다보니 앎이라는 돌 벽에 갇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에 실은 모든 시는 시설에서 1~2년간 썼던 것이다.
그가 오늘 내게 해준 이야기들은 세상과 싸운 이야기도 큰 꿈을 이룬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갈 뿐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말끝마다 비장애인도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되묻는 그를 보며 나는 그의 키가 갑자기 커 보인다고 생각했다.
앎이라는 돌집에 창문을 내고 있는 사람. 단단하게. 더 큰 집을 짓고 있는 그를 상상한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쯤 가장 최근에 썼다는 시를 보여주었다. 근 6년 만에 쓴 시였다. 그의 집이 세상 누구보다 크게 지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의 시가 노래가 되기를.
“시설에서 나오면서 장애인 인권 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시설에서 초등학교 검정고시 까지만 하고 도와주던 교수님이 사정이 생겨 중단했었어요.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 쉽진 않겠죠? 일단 도전해보고 변호사가 어렵다면 장애인권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장애인 야학에서 공부도 하고, 집회나 각종 행사에도 나가고 있어요. 활동을 하고 있으니 반 정도는 활동가가 아닐까요. 하하. 참. 시도 다시 써 보려고 해요. 시 라기 보단... 노랫말을 쓰고 싶어요. 누군가 내 글을 노래로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인생
많은 것을 품고
이 길을 걸어 왔습니다
햇빛보다 먹구름
꽃향기보다 비바람
설레임보다 두려움이었던 길
허나 여기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알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영원히 빛이 꺼지지 않는
삶을 위해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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