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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존재를 인정하고 세계를 넓혀준 힘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으로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번 기사의 필자는 대학 여성운동 경험을 기록한 20대 ‘남성 페미니스트’ 무사고님입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계집애”같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
난 페미니즘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는 소위 ‘여성적인’ 남자아이였다. 또래친구들은 “계집애”라고 부르며 나를 놀리거나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던 한 살 터울 형과 달리 혼자 집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던 나를, 모부(母父)님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게 나를 대하셨다. 아버지는 여리고 울음이 많았던 내가 걱정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사소한 잘못에도 매를 드셨다. 매가 아파 울음을 터트리는 나에게 오히려 더욱 크게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20대 초반부터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에게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념이었다. 하지만 강한 아들이자 강한 아버지여야 했고, 가족에 대한 압도적인 책임감에 짓눌리며 살아오신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 방식은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내겐 큰 괴로움이었다. 할머니는 남매 중 맏이였던 누나는 딸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면서 먹을 것부터 입을 것까지 모든 부분에서 형과 나를 먼저 챙기셨다. 누나는 첫째인데다가 딸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동생들에게 양보해야만 했고, 어린 나이부터 가사 노동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나는 그런 누나가 서글펐고, 할머니가 미웠다.
할머니는 맞벌이 부부였던 모부님을 대신해 우리를 키워주셨기 때문에 강한 애정의 대상이었지만 누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어린 나에게 그 간극은 너무 멀어 보였다. 할머니는 왜 형만 좋아할까? 할머니는 왜 누나를 괴롭히는 걸까? 왜? 풀리지 않는 질문들은 쌓여만 갔고, 나는 할머니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여성학을 공부하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중학교 때부터 가졌다. 그리고 여성학을 만난 순간, 나는 나를 힘겹게 만들었던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또렷하게 목도하게 되었다.
‘여성주의’와 만나 힘겨웠던 삶에 위로를 받다
▲ 가부장제의 훈육 ©일다 -정은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서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부장제’라는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억압과 ‘정상적인’ 남성으로의 훈육과정이 힘겨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숨막히게 만들었고, 학교 또한 나의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보여주는 폭력성도 나와 맞지 않았고,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학교 교육과정도 힘들었다. 그렇게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틀 안에서 머물러 있지도 못한 채 힘겹게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마쳤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오게 된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여성학을 배우며 위로를 받았다. 내가 느껴왔던 불편함과 괴로움, 그리고 불만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경험은 그 동안의 힘겨움을 이해 받고 보상받는 느낌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와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여성운동을 하며 생겨난 ‘딜레마’
학교에서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나 여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서 여성주의 교지를 만드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학여성주의자네트워크(이하 대학여넷)와 교내 반성폭력 기구 두 곳에서의 활동을 병행하게 되었다.
대학에서의 여성주의 활동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여성주의 그룹은 일상 속의 폭력이 두려워 늘 긴장 속에 살아가야 했던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불안함과 직면하게 되었다. 극과 극은 맞닿아 있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높아질수록 불안지수 또한 동시에 높아졌다. 그것은 그룹 내에서 배척되거나 배제되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남성’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는 강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원치 않아도 가질 수 밖에 없는, ‘남성’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권력을 부정(否定)하려는 것인 동시에, 여성주의 그룹 내에서 동지애 혹은 자매애로 발현되는 동질감을 함께 느끼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중성적인 혹은 무성적인 존재로 타인에게 느껴질 수 있기를 바랬고, 어떤 경우이든 튀지 않고 스며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함께 존재하기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여성주의 그룹은 운동을 함께 하기 위해 택한 공간이었지만 처음으로 내가 가지게 된 ‘내집단(in-group)’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소속과 정서적 유대감의 의미는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남성/개인이 아닌 무성적/무명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유지했던 긴장감은 매우 힘겨웠다. 늘 경계선에 서 있어야 했고, 때로 ‘남성’일 때와 ‘남성’이 아닐 때가 필요했고, 존재감을 드러낼 때와 아닐 때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이자 운동의 실효성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남성이 ‘NO브래지어’와 ‘월경’을 말한다는 것
나는 일부러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며 운동을 했었다.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냥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보다 득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남성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여성주의 활동이 주위에 더욱 설득력을 지니는 지점들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하고 싶은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특질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성’ 그리고 ‘페미니스트’ 라는 정체성을 크게 부각시키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남성’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싫어하고, ‘난 남자다’와 같은 부류의 말과 행동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사람이 스스로 ‘남성’임을 강조해서 부각시키는 상황은 깊은 괴리감과 자괴감을 동반하게 만들었다. 결국 운동과 ‘나’ 사이에 갇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 딜레마는 ‘운동의 효과’에 대한 고민에서도 지속되었다. 직접 겪은 불편과 차별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들으며 배워 머리로 알게 된 것들을 바탕으로 운동을 했던 상황은 점점 많은 부분에서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고,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동반되는 편견과 고정관념의 문제를 겪으며 느끼기도 하였다.
대학여넷에서 활동할 당시 ‘노(NO)브래지어 운동’과 ‘월경’, 여성의 ‘자위’에 대한 주제로 다양한 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남성’인 내가 ‘노 브래지어’를 주창하고, ‘월경’과 ‘자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운동에 방해가 되는 상황들이 있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노 브래지어 운동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나 목적에 대한 이해를 하기 전에, 생물학적 남성이 노 브래지어를 이야기하는 표면적 상황만을 보고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오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논의를 진행하다 보면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나 본래 이야기하고자 했던 의미는 자꾸 퇴색되곤 하였다.
결국 내가 동참할 수 있는 운동 영역과 동참하기 어려운 운동 영역에 대한 구분점들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그 구분점을 없애기 위해서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치마를 입으면서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외형적 특징을 없애기도 하였다. 또 외형적으로 남성으로 인식되는 여성친구들과 함께하며 혼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임시적인 처방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협력자나 조력자로 한정 지어 판단되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위치성 또한 나에겐 큰 딜레마였다.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남성활동가들과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넓고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단순히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정도로만 판단되거나, 운동의 당위적인 차원에서만 여성주의를 인정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많이 겪고 봐왔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운동의 진정성을 증명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나는 평소에 치마를 즐겨 입는다
내 삶에서 여성주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삶의 지향점이다. 그리고 여성운동은 세상을 보다 좋게 만들고 싶다는 거창하고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들 중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성을 바꾸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여성주의였다. 그리고 나를 위로해 준 것도 여성주의였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내 세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난 평상시 치마를 즐겨 입고 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치마를 왜 입고 다니는지를 설명하고, 왜 남성은 치마를 입으면 안 되는가? 반문하고 있다.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인식하게 만들고, 변화된 모습을 실제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옷에 대한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그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남성이 치마를 입은 모습을 관념 속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게 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여성운동을 하고 싶지만 ‘남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딜레마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중, 대학원에 진학해 여성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성공회대 실천여성학과정에서 공부하며 ‘내가 과연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에서의 활동을 기록한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논문은 ‘기억’에 대한 갈증으로 시작되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치열하게 존재했던 그/녀들의 '여성주의 활동' 경험과 고민들에 대한 기억들이 잊혀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아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랬지만 '기록'되어지는 역사가 되어 '기억'되지 못할 것 같기에 직접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글 자체가 하나의 '인정투쟁'이자 '정신승리'를 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은 2000년대 후반에 대학교를 다니며 여성주의 활동했던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키워드이다. 관심 받지 못했던 활동 경험에 대한 기억들도 다수가 공유하고 있다.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여성주의 운동판을 떠난 현재의 상황에서, 운동의 '의미'를 외부로부터 부여 받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이 ‘기록’이 되어 현재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왔을 모든 20대 페미니스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난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그/녀들을 격려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운동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여성학 연구를 하며 끊임없이 여성운동을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여성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언제까지나 여성주의와 함께 존재할 것이다. (무사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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