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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할머니와 나, 우리들의 불편한 동거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이미정 씨는 희곡작가이자 연극평론가입니다. www.ildaro.com]
갑작스레 등장한 친할머니라는 존재
페미니즘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나는 여성으로 살고 있지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해마다 다르게 느끼고 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로서 존재하지만 은밀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힘의 역학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약자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올바른 것’과 ‘욕망하는 것’의 사이에서 흔들린다.
내게는 할머니가 계시다. 아버지를 낳은 분이셨지만 기르지는 않으셨기에 다소 관계가 멀었다. 할머니가 사셨던 마을에 변이 일어나 마을 사내들이 모두 끌려가 죽었고, 졸지에 젖먹이 아들을 둔 과부가 된 할머니는 아버지를 친인척에게 맡겨두고 재혼을 했고, 행복하게 사셨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잊혀졌고, 선 자리에서 처음 만났던 어머니에게 “나는 고아다.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 같긴 하다”라고 고백하셨다고 한다. 내게 친척이란, 태어난 이래로 외갓집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내가 친할머니라는 존재를 깨달은 것은 할머니가 재혼한 할아버지와의 사별 이후였다. 할머니는 재혼 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는데,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인지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셨다. 계모도 아니고,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인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여간 홀로 된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은 우리 집이다. 어머니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상황을 쉬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지붕 아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손녀
만약 내가 할머니의 손에서 양육된 손녀였다면 달랐을까. 어쩌면 피붙이 혹은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느끼며 깊은 관계를 맺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춘기를 지나고 나서야 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아는 것과 동시에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할머니와 손녀의 애틋함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며느리로서의 나의 어머니와 시어머니로서의 할머니였다.
나는 시어머니로서의 할머니를 참을 수 없어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칼날처럼 날카로웠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온 낯선 타입에 대한 경계감이 모두 혼합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그저 가족으로 받아들일 만큼 조금 더 어리고 순수하거나, 오갈 데 없는 노인을 그 자체로 연민하며 끌어안을 만큼 나이가 들고 성숙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그저 흔들렸을 뿐이다. 왜 내 어머니가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것일까. 할머니가 그토록 예뻐하는 다른 아들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할머니가 집안의 어른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작은 일 하나하나마다 나는 예민하게 반응했고, 은밀하게 무시했다. 옛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라서 며느리와 손녀 혹은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 자체가 낡은 탓도 있다. 당시 깐깐하게 구셨던 데는 얕보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걸 머리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분고분한 손녀가 되길 거부했다. 순종하는 손녀에게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명령하고, 조종하실 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던 탓이기도 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부탁하거나 청소를 시킬 때 단순히 행위를 부탁하는 게 아니라 세밀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냉장고의 몇째 칸에 있는 뭐를 꺼내고, 가스렌지 위에 있는 국에 물을 넣고 다시 끓이고, 쌀을 씻은 후 쌀뜨물을 받아놓고 냉동실에 있는 콩을 넣어서 질게 지어라, 같은 식의. 손녀가 리모콘이 되어서 하나하나 그 동작을 수행하기를 원하시고, 뒤에서 그걸 지켜보신다. 나는 이런 식의 명령이 몹시 거슬렸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행동하거나, 방문을 굳게 잠근 채 거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말들에 왜 그토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나도 이런 내 태도가 몹시 졸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식사를 차려드리고,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했다. 어차피 하는 일인데 왜 할머니의 지시가 싫은 걸까.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내게 ‘당연한 의무’라고 말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할머니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를 낳기만 하고 키운 분이 아니셔서? 그런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내가 가족의 기본 단위를 부모와 자식으로만 파악하지, 조부모를 염두에 두지 못하는 탓이다. 수많은 고부 갈등도 가족 단위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며느리가 인지하는 가족의 단위와 시어머니가 인지하는 가족의 단위가 달라서 나오게 되는 마찰. 나는 그것을 조손 갈등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70년의 시간을 살아온 여성’으로 바라보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너무 속상했다. 어머니는 원래 자유분방하신 분이셨고, 아버지와 결혼을 결심하셨던 이유도 ‘고아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일탈과 자유와 인습에 대한 거부를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할머니가 생겼고,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생겼다. 그 사실이 감정적으로 싫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적응이 빨랐던 것은 어머니였다. 고부갈등은 겉으로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암암리에 존재했을 거라고 믿지만 최소한 나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유연했고, 할머니를 보다 쉽게 받아들였다. 애당초 합가를 결정했을 때부터 마음 먹었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친어머니와 오래도록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를 배려하는 마음, 집안에 어른을 모시면 보다 예의 바르게 자식들이 클 거라는 기대, 오갈 데 없는 노인에 대한 연민 등등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홀로 가시를 세우며 삐죽삐죽 거리던 것은 나였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일단 “그게 아니에요”라고 반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의견이 맞든 틀리든 우선 부정부터 하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꽤 충격적이었다.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할머니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나는 감정적으로, 자동반응으로 ‘거부’를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에 대한 내 감정을 곰곰이 돌이켜봤다. 할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고(잘 안되니까), 그저 일흔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여성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써 보았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살다가, 큰 변이 나서 남편을 잃었다. 겨우 젖을 뗀 자식을 두고, 재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살다가 재혼한 남편이 죽고 나서야 첫 아들에게 같이 살자고 말했을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한 번도 품에 안아본 적이 없는 아들과, 손주여서 여전히 안을 수가 없는 관계….. 그리 생각해 보니 참 고단하고, 슬프고,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다. 부양의 의무를 혈연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나이든 한 명의 여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념만큼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악착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손녀와 잘 지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이 정도의 짧은 깨달음으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 이후로 조금 더 상냥한 손녀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방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손녀였다. 그래도 억압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느끼던 반발은, 나 역시 마찬가지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반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산지 15년이 흐르면 가족이 된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함께 산지 15년이 흐르면 가족이 된다. 할머니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손녀의 성격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는 할머니의 세심하고 꼼꼼한 참견을 한 귀로 듣고 흘려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서럽고, 아프고, 힘겨운 일인가를 곁에서 보면서 손을 내밀어 드리는 게 당연하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올 정도의 관계는 맺어진 것 같다.
할머니도 손녀가 대체 왜 하루 종일 방에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출근을 하지 않으면서 일한다고 바쁜 척을 하는지, 대체 결혼을 언제 할 것인지 등등에 대해서도 초월하셨다. 당신의 생각과 고정관념으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텐데 그 부분에 대해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나와 할머니 사이의 암묵적인 협의이며, 평화이다.
그리고 나는 과거보다 조금 더 많이 가족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이해한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 것인지를 납득한다. 아이들은 저 혼자 홀로 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단히 많은 양육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서야 나의 아버지를 낳아주신 할머니의 수고와 사랑과 상처를 이해한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겉돌던 시간들이 쌓여서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고, 가족의 테두리가 된다. 과거에는 페미니즘을 떠올리면 남녀차별과 결혼제도의 모순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했는데 이제는 대안가족이나 노인들에 대해서도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가족은 억압의 테두리이지만 잘만 기능하면 보호와 양육의 울타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내 세계는 조금 더 넓어진 것이다. 고작 한 뼘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모든 게 해피엔딩?!
글쎄. 모르겠다. 내가 결혼을 해서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는 상황이 되면, 나는 다시 한번 할머니와 그랬듯이 세대 차이가 나는 여성과 갈등 구조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번 경험해 봤으니 다음 번에는 더 수월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할머니도 남동생이 결혼을 해서 손자며느리가 생기게 된다면, 부디 그녀와 적당히 무심하면서도 원만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미정)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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