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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까페 히즈라네 고양이의 주인 원사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 www.ildaro.com
 
직시의 거울 속으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니?
백설공주의 계모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거울을 가졌다. 적당히 "네가 최고야"라고 말하지 않고 "너는 두 번째야"라고 말해주는 거울. 페미니즘은 그런 거울이다.
 

▲ "또 딸!" 소리를 듣고 태어난 아기.  ©원사  
 
한 계집아이가 있었다. 위로 언니가 두 명,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던 그 아이는 더위가 막 시작되기 전인 6월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내리 딸을 낳아 불안했던 엄마에게 그 아기는 지긋지긋한 또 다른 핏덩어리, 과제에 불과했다. 안아보기도 싫고 짜증이 났단다. 그녀는 이제 겨우 25살에 딸 셋을 키워야 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그 계집아이는 유난히 눈물이 많았다. 이유 없이 한밤중에 일어나 머리맡에서 울더란다. 어린 아이가 우는 데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엄마는 이렇게 말하며 "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계집아이는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는 아이의 발가락을 툭 치며 "이거 봐! 네 발가락 때문에 아빠도 일찍 돌아가실 거다" 라고 핀잔을 주었다. 아이는 그때부터 아빠가 자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실 것이 두려웠다. 자기의 존재가 집안의 불행이 될까 봐 늘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둘째 발가락이 많이 길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다는 설이 있단다.)
 
4명의 아이들과 씨름 중이어서 모든 게 화가 났던 엄마는 제일 만만한 그녀에게 쓴 말을 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계집아이가 5살 때 즈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식구가 아빠의 고향으로 아주 멀리 이사를 했다. 아이는 외할머니 집에 혼자 맡겨져 지냈다. 아마도 학교 입학하기 전 아이가 가족과 합쳐진 것 같다. 아이는 그때의 기억을 버려졌던 아픔으로 가슴에 새겨 넣었다.   

▲ 5살 무렵, 그녀를 할머니 집에 혼자 맡겨둔 채 모든 식구가 멀리 이사를 갔다.     © 원사 
 
돌아온 그녀를 큰 언니가 안으며 "얘가 우리 동생이래." 라고 하던 그 장면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아이는 낯설고 부끄러웠다. 돌아온 아이는 온 집에 낙서를 하고 엄마에게 많이 혼났다. 아이는 그렇게 표시하여 자기의 집임을 알리고 싶었다.
 
계집아이는 겉으로 활달한 척했지만 충분히 사랑 받지 못한 아이답게 누군가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또한 줄 줄도 몰랐다. 그나마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항상 끊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잘 것 없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하고 떠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눈으로’… 삶의 대전환을 맞이하다  

▲ 그녀가 '자기'를 되찾게 되기까지... ©원사  
 
20대 초반까지 그녀는 세상에 대한 환상만 가득 채우고 좋은 것만 보려고 애썼다. 부모님의 사랑도 실재보다 과장해서 받아들였고, 세상사에 대해서도 선한 것만을 보려고 애썼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만큼 환상의 그림들은 화려해졌고 가짜 세상은 그녀의 현실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겁이 많았던 그녀는 환상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어른이 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창으로 세상을 여과하여 보려 했던 그녀가 날것을 보게 된 것은 ‘여성학 대중강좌’에서 “퍽”하고 머리를 맞고 나서다.
 
여성의 눈으로, 삶의 경험으로 세상을 다시 보기. 그녀는 이것이 페미니즘이라 생각한다. 당시 막연한 기대를 갖고 가까운 친구의 소개로 그 자리에 갔던 그녀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분명 가까이 있었고 어제는 경험했던 그 많은 것들. 아무렇지 않게 미화시켰던 모든 것들이 그날 그녀의 머리를 힘차게 내리쳤다.
 
“아니잖아. 너는 사람이 아니라, 여성이잖아. 네가 겪었던 것은 A가 아니라 B였잖아. 네가 맛본 것은 쓴맛, 짠맛이 많았어. 꿀맛만이 아니었어.”
 
그렇게 외쳐댔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 아니, 2차원에서 3차원으로의 대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착한 여자에서 ‘날 선 여자’로
 
환상의 여과지를 버리고 다시 현실을 바라보는 과정은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주었다.
 

▲ 페미니즘은 세상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해준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혼란을 준 쓴 약과도 같았다.   ©원사  
 
누구누구의 딸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무장했던 그녀는 가장 중요한 ‘자기’를 찾는 단계들을 밟았다. 자신의 욕구와 희망, 꿈에 대해 처음으로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되었고,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사랑을 시험하며 자기를 떠날 아이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던 어릴 적 버릇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들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고 그녀가 갖게 되는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게 될 때까지 많은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스스로 받았지만, 이제는 제법 그런 짓들을 하지 않으며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고의 폭도 넓어졌다.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차별 받는 다른 입장의 운동들에 대한 관심이 생겨 노동 문제, 인종차별, 어린이와 청소년 인권, 노인권, 성소수자, 환경 등의 이슈에 열린 마음으로 사고하는 성인이 되어 갔다.
 
반면, 그 동안의 여과지를 쥐어준 이가 세상 사람들, 특히 가깝게는 부모님이라는 생각에 그들에 대한 분노는 거세게 일었다. 그녀가 이 사회를 섬찟하게 사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무서운 생각 때문이다. "너는 순결을 잃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해!"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이 말을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자랐던 자기 모습을 돌아보면서 생명보다도 순결을 강조한 사회가 소름 끼쳤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그 아이가 그렇게 사고를 당하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당시 꿈에서 가부장의 상징인 ‘아버지’를 잔인하게 절단하여 죽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녀의 분노는 그렇게 표출되었고, 현실에서는 날 선 여자로 누구를 만나도 싸울 준비를 하였다.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하거나 잘못된 편견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달려가서 따지고 들었다. 모든 기준은 '여성'이어서, 다른 훌륭한 업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여성 문제에 대해 보수적이면 상종하지 않았고 그들의 업적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위선을 비웃으며 싸움을 걸었다.
 
아픔의 시간이 흘러 쌓였던 분노가 동이 나다 

▲ 하루하루 분노 충천하던 시절.    ©원사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정리한 친구도 많았고 한동안 가족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모든 것을 여성의 시각에서 맞지 않음과 맞음으로 구분 지었다. 그러한 날섦과 비례하여 쌓인 세상에 대한 분노가 연민의 감정으로 누그러질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들 모두를 ‘쓰레기’라고 규정한 그녀가 당시 하루하루를 어찌 살아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검은 구름을 잔뜩 머리에 얹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우울함에 죽음의 그림자도 항상 따라다녔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쓰레기로 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때 일을 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그녀를 기억하는 동료들이 아직도 ‘악명 높았던’ 그녀의 언사를 놓고 이야기한다고 하니, 흠. 가끔은 미안한 마음에 그들에게 따로 선물이라도 줘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다.
 
한 소녀에게 “네가 순결을 잃으면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무시무시한 세상에 대한 혐오감을 그녀는 ‘속에 것을 담고 있지 못하는’ 성격대로 그대로 세상 밖으로 뱉어냈다. 부모님을 향해서도 퍼부었다. 엄마는 그런 그녀 때문에 몇 번이나 울어야 했고 급기야는 인연을 끊자고도 했다. 독했던 그녀는 “그러자”며 연락하지 않았고, 약해진 엄마는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 아픔의 시간이 흘렀다. 한편으로는 밑바닥부터 모든 것들을 재배치를 하고 나니 쌓였던 분노가 동이 났다. 그리고 나니 어느 날부턴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이 혐오스럽고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저주를 퍼부어댔지만, 그녀처럼 연약한 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음이 짠해졌다.
 
오가는 이의 마음을 나누는 카페를 열다 

▲ 세상을 두려워하고 혐오했던 소녀는 여여(如如)하나,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삶의 즐거움을 찾는 ‘여자’가 되었다.   ©원사  
 
가능한 어른 되기를 피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그녀는 차츰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렇고 그런 세상 속에서 작은 움직임으로 꿈틀대며 사람들과 직접 말 걸기를 시작한지 벌써 5년을 향해 간다.
 
환상으로 채웠던 세상을 분노로 직시하고 난 후, 그녀에게 현재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화려하지도 않고 고통스럽기만 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현재. 그녀가 차근차근 겪어내야 할 현재를 이제야 받아 들이고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뒤뚱뒤뚱 넘어졌다 일어났다 걷고 있는 중이다.
 
40대 중년 여성의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이제야 그녀의 나이는 사회적으로 20대 중반이 되었다.
 
커피와 음료라는 매개물을 놓고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 카페를 차렸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픈 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4년 6개월을 버텨냈다.
 
여성들을 후원하고 각종 이벤트를 열어 직장인들의 마음에 말랑한 감수성을 나누리라 다짐했던 초창기의 거대한 포부는 빠듯한 운영이라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대부분 이뤄내지 못하고 있지만, 꿈틀꿈틀 작은 움직임으로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컵 뚜껑에 응원의 메시지나 귀여운 표정을 끄적거려 넣는다. 바쁜 사람들에게 잠시 짬 내어 흐훗 웃음을 주고 싶어서다. 그녀는 워낙 낙관적이었던 자기의 성품을 찾았다. 이런 놀이는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때까지 한다.
 
카페 한 켠에는 전시를 하라고 독려한 광고지를 붙여 놨다. 전문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자기의 작품을 내걸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두는 것 자체로 사람들 심성에 자극을 주고 싶어서다.
 
우리들 안의 폭력은 자꾸만 무뎌지는 감수성 탓이리라 믿고 있기에, 딱딱해져 가는 감성에 출구를 주고 싶다. 그래야 약한 자에 대한 폭력과 미움들이 사라질 거라 믿고 있다.
 
끄적거렸던 단상들과 그림들을 그려놓고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그녀가 깨달아 얻은 메시지, "별 거 아닌 우리네 인생 현재를 행복하게 삽시다." 이런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하나 둘 채워 넣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등대의 안내를 받으며  

▲ 현재를 살아내는 지금. 피터팬의 옷을 벗고 세상사에 함께하기, 카페 <히즈라네 고양이> 운영 4년 6개월째 살아내기 중.    ©원사  
 
카페를 운영하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를 보기도 하고 너그럽게 사랑을 주는 큰 모습을 보기도 한다. 겁내며 위선을 떨기도 하지만, 의연하게 옮음을 택하는 멋쟁이도 되어 본다. 추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그녀처럼 세상도 그렇다.
 
가끔은 그녀가 아는 지식으로 여성들의 처지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또 남성들의 입장을 들어보기도 한다.
 
성폭력을 이슈로 다뤘던 긴 시간을 뒤로 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카페를 “히즈라네 고양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인도에서 천대받기도 하고 신성시되기도 하는 양성인 ‘히즈라’라는 사람들처럼, 뚜렷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모든 이들이 열린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카페는 그래서 늘 또 다른 여성운동의 장이다.
 
세상사에 익숙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지 않아, 일은 많이 하는데 주머니는 여전히 홀쭉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일이란 게 쉽지 않구나!" 이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일단은 사람들과 엉켜 살게 된 삶에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는 오늘도 페미니즘이란 등대에 불을 켜고 망망대해 넓은 세상 속에서 안내를 받고 살아낸다. 가난한 돛단배로 멀미는 나지만 그녀만의 배가 세상 속에서 꿈틀댄다.
 
기특하다.
"또 딸!"이란 인사를 받고 세상에 고개를 들이민 세 번째야!
여전히 녹록하지 않고 그리 환대해주지만은 않는 세상에서 계속 잘 살아내 주렴~
오늘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할 수 있는 건,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솔직한 거울, 페미니즘의 힘이리라. (원사

▲ 기특하다, 셋째야!    ©원사  

[나의 페미니즘 기획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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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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