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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비혼 페미니스트 라디오 진행자 잇지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필자 잇지 님은 마포구 비혼 페미니스트 공동체라디오 “야성의 꽃다방” 진행자입니다. - www.ildaro.com
페미니즘, 어디까지 왔나
차별금지법 제정이 또다시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두 차례의 제정 시도가 있었다. 2007년에 발의된 첫 차별금지법이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되었을 때는, ‘그래 처음이라 쉽지는 않겠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10년에는 논의 단계에서 무산되었지만 ‘그래도 다음엔 가능하겠지’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기약했다.
그리고 2013년. 민주통합당 김한길, 최원식 의원이 일부 기독교계의 동성애 혐오에 굴복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발의를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성소수자 혐오를 표출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행동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분노와 회의가 뒤범벅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페미니즘은 무엇을 해왔던 걸까."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질문을 펼쳐들었다.
요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은 ‘누구나 다 아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로 취급되는 것 같다. 대학교에선 교양수업으로, 직장에선 성폭력 예방교육으로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얘기. 50,60대라면 여자에게도 ‘권리’가 있다, 20,30대라면 양성은 평등하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이야기 말이다.
이정도 인식이 ‘상식’이 된 것도 페미니즘의 대단한 성취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페미니즘이 얼마나 살벌하고 고단하게 싸워야 했던가.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칠거지악과 삼종지도가 횡행하던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며 세상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라 말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여전히, 아직도, 지금도 할 말이 많다. 페미니즘에 귀를 닫은 사람들에게는 썩 재미있진 않겠지만, 다소 뻔뻔하게 내 경험을 전하고 싶다.
‘왜 피곤하게 사느냐’라는 질문
싸우다 지친 내게 엄마가 말했다. "그만하고 그냥 잘못했다고 해."
그날도 아빠와 나는 한바탕 싸움을 치른 뒤였다. 아빠와의 싸움이 잦아진 시기는 페미니즘을 알기 시작한 때와 궤를 나란히 한다. 그렇다고 우리 부녀가 그전에 특별히 애틋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가부장적 문화가 공고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 남성과 여성의 명확한 역할 구분, 남성으로서의 권위, 수직적 관계 맺기가 몸에 밴 분이었다. 딸에게 집안일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발상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그런 아빠에게 느꼈던 답답함을 설명할 수 있도록 말과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말과 힘은 아빠에게까지 가닿지는 않았다. 우린 갈등의 원인을 설명하는 언어도, 사고체계도 달랐다. 결국 대화마저 단절되고 부녀의 냉전으로 집안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다른 가족들로부터 내게 그만하라는 압박이 들어오기도 했다.
‘왜 피곤하게 사느냐.’
아마도 페미니즘이 받는 가장 큰 질타이자 페미니스트 스스로 남몰래 갖는 자문(自問)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페미니즘? 그래 좀 피곤하다. 페미니즘과 만날수록 내게 늘어난 것은 지적질과 분노였다.
선배가 던지는 결코 웃을 수 없는 ‘농담’ 한 마디,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언니의 타박, 학내에서 끊이지 않는 성폭력 사건, 소개팅을 다녀와서 더욱 여성다움/남성다움을 체화해가는 친구들, 여성주의에 대해 젠체하는 지식인들.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넘길 수 있는 말들이 일상의 곳곳에서 귀에 가시처럼 박혔다. 한창 귀가 예민했을 때는 TV를 보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피하고 싶었다.
다들 괜찮다는데 나만 이런 걸까? 혹여 내가 사회 부적응자가 되는 건 아닌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건 아닌지 괜한 걱정마저 들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으로 인한 피곤이 그냥 피곤에 그치지 않았다. 그건 나의 분노가 작지만 다부진 저항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켜준 여성주의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에서 상처받은 자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사상이었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페미니즘의 출발은 나의 필요였다. 나의 불편함을 설명할 언어가, 다독일 위로가, 그리고 불편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바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저 ‘나만의 방’을 구축하고 그곳에 안착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라 생각했다. 적어도 내게 페미니즘은 다른 사람들의 고착된 생각에 금을 내는 적극적인 실천이었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가진 매력 중 하나는 '시야를 확장시켜준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생물학적 여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이 성별, 성적 지향, 성정체성뿐만 아니라 다른 잣대로 권력을 불균등하게 분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잣대는 노동이기도 하고, 빈부이기도 하고, 지역, 국적, 병력, 인종, 자연, 직업, 가족구성의 차이기도 했다. 권력 지향적이고 위계적인 인식은 폭력으로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 '차별'이라고 얘기되는 것들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권력과 차별을 조망하는 망원경이기도 하고, 관찰하는 현미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문제적이며 현재적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접하며 가장 신기했던 건 ‘말’이었다. 옹알이를 하는 아이처럼 나는 옛날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언니들의 언어를 조금씩 배웠다. 페미니즘, 성역할, 가부장제, 섹스, 젠더, 수행성, 제3의 성, 쥬이상스, 성노동.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과 그 언어들을 되새기며 수다를 떨고 우리의 언어를 조곤조곤 만들어갔다.
그런 면에서 여성주의 학내 교지 <석순>에서 편집위원을 했던 시절은 내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시기 중 하나다. 밤늦도록 세미나를 하고 교지로 만들 글을 썼다. 교정을 보면서 서로 생각의 차아를 드러내고 봉합하며 책을 완성해가던 시간. 마치 찐한 국물을 고아내는 듯 우리는 진득했고 치열했다. 그리고 <석순>을 계기로 알게 된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 이들과의 인연과 함께 한 추억은 페미니즘이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정답’에 얽매였던 시간들
페미니즘에 푹 빠져 지낼 무렵, 도외시했던 내 삶의 다른 문제들이 하나둘 수면으로 올라왔다. 소위 ‘장래’니, 사회적 의무와 도리니, 경제적 책임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뭘 하며 살 것인가’라는, 그때만 해도 직업을 가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세대 담론이 한창 유행했다. 88만원세대라는 단어가 큰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청춘을 빙자한 책들이 미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명된 내 삶에는 두 가지 길뿐이었다. 싸우거나 순응하거나.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안 되거나. 둘은 양립하기 힘들어보였다. 어떤 선택이든 내려야 한다고 종용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알 수 없는 생각과 신념이 나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처음으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이 버겁게 느껴졌다.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내가 페미니스트이긴 한 건가.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각의 중심에 '페미니스트는 이러해야 한다'라는 것, 소위 말해 '정치적 올바름'이 있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가끔은 그 올바름이 뭔지 알지 못해서 정답을 찾기 위해 여성학자, 여성단체 활동가들의 책과 논문, 성명서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했던 적도 있었다. 어떤 문제에 능동적으로 생각하려 하기보다 '페미니즘'이 알려주는 정답에 얽매였던 것이다. 그렇게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사고방식은 나를 가로지르는 모순들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티끌 하나 없이 올바른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고민과 숙제를 안고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관련된 활동도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다니며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곳저곳을 구름처럼 떠돌며 재미있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부터 은행지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고 지금은 소일거리로 “시나 끄적거리는” 아저씨까지. 그런 시간을 보내며 두 선택지 사이에 그어져 있던 빗금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페미니즘이 있는 곳과 없는 곳, 두 세계로 구분 지었던 건 내가 아직 페미니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어떤 한 직군에게만, 계층에게만, 집단에게만 유효한 사상/실천이 아니지 않은가. 중심-주변, 지배-억압, 권력-배제가 있는 곳이라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론이자 철학이자 운동이자 실천이 페미니즘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내가 언제 어딜 가더라도 억압과 권력과 부딪히게 된다면 페미니즘의 말과 힘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의 소박한 정의를 내리고 나니 한결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내 삶 속에 페미니즘을 어떻게 녹여갈 것인지 느긋하게 고민할 여유도 생겼다. 사회에서 겪는 불편함이나 갈등을 대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다양한 대처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비로소 내게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다.
이제 나는 내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고민과 숙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의 상황에 따라 품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지금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내 삶의 과정 속에 있다. 내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며 또 다른 고민과 모순을 발견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대면할 힘이 내게 있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가르쳐준 지혜와 안목을 가지고 난 또 어디로 갈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 눈이 반짝거린다. (잇지)
[현재, 우리의 여성주의는 무엇인가] http://ildaro.com/sub_read.html?uid=624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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