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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9) ‘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일다> www.ildaro.com
레즈비언 독립잡지 「니아까」를 만들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니아까」라는 이름의 레즈비언 잡지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줄로 압니다. 「니아까」는 1997년 6월에 준비호를 발간하고, 같은 해 7월 창간호를 발간하였지요. 빛창, 단식광대, 리우 그리고 깨트펑. 네 분이 이 잡지를 기획하고 발간하는 일을 시작했지요. 인터뷰 칼럼의 아홉번째 손님은 '레즈비언 오락잡지' 혹은 '레즈비언 독립잡지' 「니아까」의 편집장이었던 깨트펑님입니다.
깨트펑님은 오랜 시간동안 저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분입니다. 제가 운영하던 레즈비언권리연구소와 ‘사이버 레즈비언 NPO자료관’ 홈페이지 제작과 관리를 담당해주셨습니다. 배너 제작에서 청탁까지 저는 언제나 부탁을 하는 사람이었고, 깨트펑님은 묵묵히 저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었지요. 감사의 인사는 그저 수개월에 한 번 만나 식사 대접하는 것이 전부였고요. 그런데도 저를 계속 만나주고 있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번 역시 인터뷰 칼럼의 손님이 되어 달라 청했고, 깨트펑님은 흔쾌히 제 청을 들어주었답니다.
지난 3월 말, 우리는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공식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레즈비언이에요?"
“모르겠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지금도 그냥 나는 레즈비언인데. 왜 레즈비언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모르겠는데요'일 뿐이에요.”
답변이 간명해서 좋았습니다. 이런 경우 저의 ‘공식 질문’이라는 것은 ‘우문’이 되어 버리지요. 그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깨트펑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1학년 때까지 “별 생각 없이”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언제나 여자친구들을 좋아했고 여자친구와 연애라는 것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왜 레즈비언인지’ 생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깨트펑님은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뭔가 이상하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가 ‘우리 좀 이상한 것 같아’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부모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싶지 않다’며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살더랍니다.
그리 되고 나니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보는 시선이 이상하기는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래요. 자연스럽게 살아오다가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사회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온 것이구나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레즈비언 잡지와 커뮤니티의 실험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그 해에 깨트펑님은 PC통신을 통해 동성애자 모임도 찾아 가입하고, 한국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에도 가입했다고 합니다. 각종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고 큰 활동들을 시작했다고 해요. 그 활동 중 하나가 바로 「니아까」 발간입니다.
“PC통신 모임에서 활동을 하다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잡지를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했어요. 나는 항상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어떤 형태이든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었고요. 네 명의 레즈비언들이 모여서 「니아까」를 만들었어요. 함께 기획도 하고, 취재도 하고, 글도 쓰고, 인권 단체나 레즈비언 업소를 통해서 판매도 했죠. 한 권에 2,000원, 3,000원을 받고 판매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창피해요. ‘어떻게 그런 수준의 잡지를 만들어 돈까지 받으며 팔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호부터 구해서 봐왔던 독자로서 말씀드리자면, 깨트펑님의 자평은 지나치게 겸손한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니아까」는 ‘레즈비언 오락잡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레즈비언 독립잡지’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해주었거든요.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매우 유익한 정보들이 귀엽게 가득 차 있던 잡지였습니다.
「니아까」는 3년 간 총 12호까지 발간했다고 합니다. 정기구독자도 적지 않았고, 인지도도 높아졌고, 「니아까」를 이끌었던 많은 객원기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에 실패를 하여서 발간을 중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관리 체계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비즈니스 감각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어요. 재정마련에 있어서 현실적인 한계도 있었고요. 게이에 초점을 맞춘 잡지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보릿자루」였죠. 그 잡지는 정말 잘 되는 거예요. 수익성이 높더란 말이죠. 그래서 알아봤더니, 그 잡지는 서울은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게이 업소들로부터 광고비를 받더라고요. 레즈비언 업소는 손가락에 꼽아야 하는 상황인데 반해 게이 쪽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우리는 업소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 잡지를 포함해서 많은 단체들이 업소들로부터 광고를 빌미로 후원을 부탁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나 몇 개 되지도 않는 업소들을 레즈비언들이 모를 리 없고, 그러니 업소 입장에서 특별히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광고비로 수익을 올린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죠.”
운영에 어려움을 느낀 「니아까」 운영진들은 자연스럽게 폐간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니아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니아까」는 그 이후에는 인터넷 사이트로 개설되어서 많은 레즈비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1990년 후반에 게이인 보스님이 최대 규모의 레즈비언 사이트로 성장했던 <티지넷>의 문을 열었는데, <니아까>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네요. 비슷한 시기 문을 연 두 개의 매체. 깨트펑님 표현을 빌자면, 결론적으로 <니아까>는 "망했다"고 합니다.
“<티지넷>은 잘 되는 편이었는데, 우리는 잘 안 되었죠. 그래도 회원 수는 몇 천 명이나 되었어요. 그런데 유지비를 마련하는 데에 또 어려움을 겪게 된 거죠. 당시에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60만원 정도였는데, <니아까> 사이트 유지비로 월 20만 원 이상 들여야 했어요. 힘에 부치더라고요.”
깨트펑님의 표현을 빌자면, 잡지 「니아까」와 사이트 <니아까>가 문을 닫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깨트펑님을 포함한 운영진들의 ‘비즈니스 감각 부족’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광고비를 받아낼 레즈비언 업소가 없었고, 월 60만원이라는 박봉을 받으며 일했던 깨트펑님의 현실에서 20만 원 이상 지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요? 깨트펑님이 월 100만 원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잡지 니아까가 '레즈비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게이와 레즈비언을 아우르는 혹은 성적소수자에 초점을 맞춘 매체였다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무엇보다 깨트펑님을 포함한 운영진들이 조금 더 비즈니스 감각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면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생각해 볼 질문들입니다.
예전부터 깨트펑님께 궁금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니아까」는 왜 레즈비언에 초점을 맞추었는가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역시 답변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그것밖에 모르니까요. 나는 레즈비언이었고, 레즈비언에 관해서만 이해하고, 알 수 있었으니까요. 아주 단순한 이유죠.”
레즈비언 커뮤니티로 탈바꿈했던 <니아까>의 문을 닫고 깨트펑님은 한동안 레즈비언에 관한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활동에 많이 지치기도 했고, 엄마가 아프셔서 활동에 많은 제약이 뒤따르던 상황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하는 여성이반모임 워커'를 만들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어느 날, 깨트펑님은 ‘일하는 여성이반모임 워커’를 만들었습니다. 2003년의 일이었죠. 활동을 접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조용하게 살던 깨트펑님은 왜 또 모임을 만들었을까요?
“외로우니까요. 어머니 간병으로 항상 집에만 있어야 했어요. 외출이 자유롭지 못 하니까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고. 모임의 의미도 의미이지만, 내가 외로워서 '워커'를 만들었죠.”
‘일하는 여성이반 모임 워커’는 의료인, 미용인 등 직종별로 레즈비언을 모아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외부에서 경제 활동을 계획해보고, 필요한 정보를 우리 안에서 찾아 교환해보자는 의미에서 만든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일하는 레즈비언의 네트워크임과 동시에 정보 공유의 장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었죠. 그런데 이 일이 만만치가 않더랍니다.
“회원이 500명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직종이 정말 다양하더란 말이죠. 500명 회원에 직종이 200개가 넘었으니까요. 의료인 모임, 웹 전문가 모임 등으로 세분화해서 모임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직종이 너무 세분화되어 있으니 직종별 모임 구성이 안 되더군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었어요. 직종별로 모이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공개하고 직종별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불편해하더라고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니 모임 구성이 불가능할 수밖에요.”
시간은 흘러 ‘워커’ 활동도 흐지부지되었다고 합니다. ‘니아까’와 ‘워커’ 활동을 회상하면서 깨트펑님은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꿈을 꾸고, 노력해요. 그간에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내 꿈을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찾아왔던 것 같아요. 내가 레즈비언이니까 레즈비언과 관련한 영역에서, 레즈비언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던 거에요. 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내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깨트펑님은 레즈비언들과 함께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레즈비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만들어 ‘먹고 사는 일’로 연결시켜보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잘 안 되었던 거죠. 레즈비언 잡지는 망했고, 일하는 레즈비언 모임은 커밍아웃의 문제에 걸려 계획처럼 일이 진행될 수 없었던 거에요.
그렇다고 깨트펑님이 과거의 활동을 후회하거나, 스스로 좌절하여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깨트펑님은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랍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깨트펑님은 새로운 일들을 벌이고, 정말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일을 추진해나가고 있답니다. 무려 8개 정도의 일을 하면서 지낸다지요.(깨트펑님은 스스로를 ‘잡문가’라고 생각한답니다.) 게다가 깨트펑님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잘 진행되던 [인터뷰 칼럼].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깨트펑님이 어떤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으며, 그 일들을 하면서 겪은 이중 정체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트펑님이 꽤 알려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전에 <일다> 기자 한 분이 깨트펑님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요. 현재의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려면, 과거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깨트펑님은 완전한 커밍아웃 즉, 대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할 준비를 아직 다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레즈비언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 인터뷰 기록은 기사화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답니다.
이중생활,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지난 인터뷰에서는 현재 이야기를 하자니 연결되는 과거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 하는 문제에 부딪혔고, 지금 인터뷰에서는 과거 이야기를 하자니 연결되는 현재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관해 깨트펑님이 또 한 번 쓸쓸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는 항상 ‘나는 왜 두 개의 세계에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고는 해요. 나는 마치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레즈비언도 아니고, 헤테로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나는 항상 중간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레즈비언들 틈 안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레즈비언들의 특성, 사회문화적인 한계 등에 부딪히게 되고, 이성애자들 틈 안에서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 하는 한계 때문에 성장에 언제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자신이,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저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저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얘기였죠.
레즈비언들이 분리된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리된 정체성 문제에 있어서 익숙해져서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저나 깨트펑님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저의 경우, 2000년부터 현재까지 온 천지에 커밍아웃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커밍아웃 후 겪게 되는 혐오적인 반응․무지한 반응에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매우 당혹스럽고, 때로는 절망스럽기도 하죠. 깨트펑님에게 ‘왜 익숙해지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해 보았습니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아요. 항상 스트레스를 받아요. 어느 정도 선에 올라가면 그 한계를 경험해요. 이성애자 세계에서 가면 쓰고 잘 해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못 하겠어요. 나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는 분명히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게 되더라고요. 그 한계선을 넘게 되면 내가 도망쳐버리죠. 들통날까봐. 내가 도망쳐버리죠.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내 미래가 뻔히 보여요. 무엇이든 새롭게 일을 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거기까지만’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완벽하게 숨기고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연기를 완벽하게 하면 되잖아요. 이성애자인 척 하면서 말이죠. 깨트펑님의 답변은 단호했습니다.
“못해, 못해. 못해.”
깨트펑님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완벽하게 숨기고 연기하면서 사느니,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일 따위 안 하고 말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깨트펑님은 ‘중간지대 사람’으로서 어울리는 일을, 수준을 생각하면서 일을 기획하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인지 설명드릴 수가 없어 글을 쓰는 저도 답답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고, 그러니 깨트펑님이 나름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나는 나를 ‘잡문가’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내가 '잡문가'라면, 미래의 나는 ‘떠돌이 잡문가’였으면 좋겠어요.”
사실, 깨트펑님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제가 반드시 설명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깨트펑님은 역사적인 레즈비언 잡지 「니아까」의 편집장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레즈비언 문화 창출을 위해 힘써왔던 웹 사이트 <니아까>의 운영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각만 했지 그 누구도 실천하지 않았던 ‘일하는 여성이반 모임 워커’를 만든 사람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거든요.
깨트펑님, 앞으로 잡문가로서, ‘떠돌이 잡문가’로서 그리고 ‘언제나 레즈비언’으로서 건강하게 신나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항상 옆에서 응원하겠어요.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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