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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 몸 이야기⑪ 사랑하기 아사카 유호 인터뷰 (2) 
 
지난 4월초 한국에서 첫 인터뷰를 하고 2개월여 만에 아사카 유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그녀가 살고 있는 일본 도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장애여성 리더양성 프로그램 차원에서 일본연수에 참가한 장애여성 12명과 함께였다. 유호는 자립생활센터 활동, 동료상담, 국제활동, 대학에서의 장애학 강의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우리 일행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그녀로서도 장애인단체 대표에서부터 자립생활센터 활동가까지 하는 일도 다양할 뿐더러 소아마비, 골형성부전증, 척수, 근위축증, 뇌성마비, 작은키, 절단장애, 지적장애 등 다양한 유형의 한국의 장애여성들을 만나는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을 듯하다.

 
다함께 이야기해도 괜찮겠냐며 그녀가 먼저 제안했고, 우리 일행 모두 흔쾌히 응했다. 이번 연수는 숙박에서부터 현지 일정까지 세심하게 챙겨준 유호 덕분에 알차게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정보와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늘 우리에게 물어가면서 스케줄을 조정해나갈 뿐 한 번도 자기 의견대로 밀고나간 적이 없었다.
 
매번 프로그램에 앞서 스케줄과 방식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은 다소 지루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곤 했다. 보통 예정되어 있는 시간의 1/4 정도는 합의과정에 소비하곤 했는데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첫날 유호의 안내로 한 장애인스포츠센터에 여장을 풀자마자 우리는 모두 유호를 중심으로 해서 둘러앉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지난 4월에 미처 못 다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았다. 지난 4월 이후 몸살이 나도록 궁금했던 연애와 결혼 이야기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첫번째 연애
 
"미국에서 돌아온 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차피 인생은 한번뿐이니 결혼도 하고 싶어졌구요. 마침 6개월쯤 되었을 무렵 오토바이를 탄 멋진 남자가 결혼하자고 해 함께 도망쳤지요. 가족들의 반대와 차별이 극심해서 호적에 절대 올릴 수 없다고 했어요. 심지어 남자의 가족으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들었어요. 실제 뺑소니 사고를 당해 3개월 정도 입원까지 했었죠. 물론 남자의 가족이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남자의 형님이 계속 제게 협박을 하는 것도 모자라 제 부모에게까지 협박을 했어요. 결국 반년 만에 헤어졌죠."
 
헤어진 뒤 너무 힘들어 술로 지탱해야 했다. 평생 먹을 술을 아마 그때 다 먹은 것 같아 이제는 술을 먹지 않는다며 유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에 현재 결혼식은 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호 부부는 별성(別姓, 일본은 결혼하면 부부가 같은 성을 쓰도록 민법에 규정되어 있다. 대부분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른다. 이에 따라  ‘부부별성’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편집자 주)을 쓰고 있다.
 
일본에서 여성운동가들은 보통 별성을 쓰고 있는데, 미국에 갔을 때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편이 딸의 유괴범으로 오인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유호가 일본에도 사실혼이 있다며 항의하자 직원이 그런 사고방식은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나 가능하지 일본에는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딸 우미에게 아빠 성을 따르게 하고 싶어도 재판을 거쳐야 하며, 비용이 만만치 않아 그냥 엄마 성을 쓰고 있다. 물론 성장한 뒤 본인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 생각이다. 딸 우미는 유호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 열네 살이라고 한다. 유호 자신은 기대치 없는 수술로 청춘이 망가지는 게 싫어 수술을 안했지만 딸에게는 권한 적이 있단다. 하지만 우미는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엄마가 보기에 다리가 많이 휘어 있어 수술을 권했던 것인데, 딸은 휠체어로도 족하다고 대답했다.
 
반대든 지지든 내편을 만드는 게 중요해
 
다시 연애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토바이 남자와 헤어진 뒤 10살 연하를 만나 부모에게 비밀로 하고 4년 동안 살았다. 그런데 그가 연하의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기에 주변의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어 힘들었다. 그때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장애여성이 연애할 경우 공개를 해서 반대든 지지든 내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무 살부터 서른일곱 살 때까지 애인이 없었던 적이 없었는데 서른일곱부터 서른아홉까지 2년 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다. 이때 동료의 소중함을 느꼈다. 좋아하면 물불 안 가리고 나가는 편이며 이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다음 순번을 정해놓고 헤어지곤 했는데, 마지막 애인은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대책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17년 동안 연애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장애여성에게 애인이 없는 건 당연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깨고 싶었던 것이다. 불쌍해 보이기는 싫었다. 하지만 2년의 솔로생활도 괜찮았다. 비장애여성도 애인이 없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현재 남편은 17살 연하인데, 연하남이 귀찮다거나 남자가 의존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연하남과 연애를 할 때는 항상 상대가 기대며 시작했던 것 같다는 답이다. 누나 역할을 맡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럴 경우 힘들어도 말을 하지 못해 갈등이 깊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지금 남편과는 처음부터 '나 못 한다'고 하고 시작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결혼 전에는 보살님이었는데 지금은 발바닥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힘들어도 힘든 점이 서로 같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생 때 남편이 1살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와요. 일본에도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가 한참 연하의 필리핀 여자와 사는 경우가 있지요. 25살 이상은 범죄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17살 차이이니 범죄는 아니죠?"
 
머릿속 결단과 상상을 따라준 ‘장한’ 몸
 
유호와의 대화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장소를 옮겨 다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딸 우미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출산 전 이 길로 움직이게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어요. 출산 후 걷는 게 힘들어진 점도 있지만 출산 전과 똑같이 돌아가게 된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저 못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사망한 사례까지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임신 중 제일 즐거웠던 체험은 가슴도 풍성해지고 몸이 커진 것이었다. 출산 후 커졌던 가슴이 이제는 작아져 지금은 딸보다 작다며 아쉬워하는 유호. 엊그제 목욕을 하던 중 딸의 가슴이 자기보다 더 커 열 받았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쉰을 넘긴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자신의 몸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대한 유호의 답은 의외였다. 머릿속 결단과 상상을 따라준 몸이 장하다는 것. 아마도 감정 표현을 잘하기 때문에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나 싶단다. 지금도 일주일에 3~4일은 펑펑 운다면서 잘 웃고 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좀 더 멋지게 표현하자면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어준 몸"이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정신력만큼 체력도 따라준 것에 감사하는 그녀에게서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갈고 닦은 여인의 혜안이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요?"
"임신 중, 배가 커졌을 때요."
 
유호는 임신 중 누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지금 그것을 보는 게 참 재밌다고도 했다. 자신의 몸 여러 군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보면 보기 싫다는 느낌인데 제왕절개 수술 자국을 보고 있으면 기쁘다는 것. 나이 들어가면서 하나둘 늘어간 주름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단다.
 
남편보다 주름이 더 많다며 걱정할 때 남편은 "그 주름까지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이 말이 아마도 결혼생활 중 남편이 했던 말들 중 베스트 5에 들 거란다. 얼마 전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정작 "내가 그런 말을 했나?" 하며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딸의 휜 다리를 걱정하며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다리라도 곧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남편은 그것까지도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작아진 가슴, 주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쉰을 넘긴 그녀에게 나이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그녀 역시 폐경이 왔을 때 나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눈에 백내장도 왔다. 하지만 그녀는 늙은 게 좋다고 한다.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초조함이 없어진 것이 이유였다.
 
마흔 살 때 출산을 하고 나니 장애로 인해 원래 약했던 이빨이 상해 모두 빼고 틀니를 해야 했다. 그래서 틀니를 끼지 않음 완전 할머니 모습일 수밖에. 하지만 딸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아주 어릴 적부터 봐와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남편과 딸은 이빨 없는 모습이 더 귀엽다고도 한다.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쉰을 넘기고 보니 남들에게 틀니에 대해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폐경이 되고 나서 남편이 생리대를 더 이상 빨지 않아도 된 것도 달라진 풍경이다.
 
여자가 아이 낳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게 해주려고 부탁했었는데, 이제는 남편이 유호 대신 딸의 기저귀를 빨아주고 있다. 남편이 원래 본인 상처의 피도 무서워하는 성격인데 기저귀 빨면서 아주 강해졌다니 일석이조인 셈.
 
“스스로의 장점을 발견해서 칭찬해 주길”
 
밤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후배 장애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본인 스스로 장점을 발견해서 스스로를 칭찬해주라고 당부했다. 보통 장애여성들은 많이 힘들 거라는 좋지 않은 시각이 있어 장애여성 스스로 많이 위축되기  쉬운 까닭이다. 남에게 100만 번 칭찬을 들었으면 스스로에게 200만 번 칭찬의 말을 하라는 것.
 
"세계 페미니즘 프로그램에 자기 자궁을 보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자기 것뿐 아니라 주변의 동료들 것도 보는 거죠. 자기 안쪽으로부터 자기를 긍정하고 바깥을 보라는 취지에요. 그러면서 서로 크는 거죠. 자기를 칭찬하기는 어려우니 서로를 칭찬하다 보면 자기를 칭찬하게 되요."
 
‘여자의 몸은 여자의 것’임을 강조하며 굳이 남자 시선에 맞추려 하지 말고 같은 동료로서 당당한 관계를 형성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남편, 애인 사이라도 남자, 여자로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동성을 만나 서로를 칭찬해주라며 자매애를 강조하는 유호.
 
귀국 후 그녀에게 메일을 받았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숙박비를 대신 내주는 것으로 우리 단체에 기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나 유럽의 장애인운동으로부터 많이 배웠지만, 그것을 다시 미국이나 유럽에 갚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되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돈도 사람도 돌고 도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이 아닐까요?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힘이 난다. (일다 / 백발마녀)  이어진 기사-> 일본 장애여성운동가 아사카 유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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