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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하고 있습니다 
 
[일다 독자위원 칼럼이 신설되었습니다. 20,30대 여성들의 일상에서 건져 올린, 소소한 듯 보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결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주제와 색깔의 글로 채워질 것입니다. 독자위원 칼럼은 열흘에 한 번 연재됩니다. -일다 편집자 주]

 
‘언니들이 돌아왔다.’ 지난달에 개봉한 영화<섹스 앤 더 시티2>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명품 옷과 가방, 각종 미용시술 그리고 성과 사랑에 대한 솔직한 입담으로 무장한 이 ‘언니들’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 욕망들을 마음껏 자극한다.
 
사오년 전에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푹 빠져있던 한 친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열을 올리며 드라마 이야기를 했었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이기에 저러나 싶어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첫 번째 시즌을 빌려봤다. 나의 감상소감은 한마디로 ‘내가 왜 저 나이 많은 여자들의 사랑 놀음을 봐야하는가’였다.
 
나이에 따라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30대 중후반의 그녀들이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을 갈구하고, 수많은 데이트를 하고, 소위 말하는 ‘밀당’(밀고 당기기)을 한다는 것이 참 낯설었다. 아니 불편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그런 ‘늙은’ 여자들이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고민을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나이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연애는 20대에게만 허락된 듯하다. 되짚어 보면 낭만적 사랑을 다룬 드라마들의 주인공들은 거의 20대였다. 우리는 사실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그들의 연애과정을 보며 로맨스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해왔던 것이다.
 
물론 중장년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불륜’으로 표현된다.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침드라마를 보면 남편의 배신에 눈물을 흘리거나, 복수를 하거나, 쓸데없이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30,40대의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살아온 나에게 <섹스 앤 더 시티>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 사회는 20대에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 30대에는 아이를 낳아 양육을 하고, 40대에는 내 집을 마련해서 삶을 더욱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개인적, 사회적 영역에서 여러 불편을 겪는다. 일정한 나이가 넘어서도 계속 방황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정신 못 차렸다’고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러한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인가? 기대 수명이 100세라는 현재에도 과연 유효한 삶의 질서인가? 내가 동의한 적도 없고,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삶의 원리가 나를 억압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완벽하게 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법적인 문제라면 소송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재생산 구조와 결탁해있는 낡은 인식과 싸워야 하니 더욱 힘들다.
 
이력서나 통장 잔고에 드러나지 않는 성장의 시간
 
최근에 구직을 위해 면접을 본 적이 있다. 회사의 인사팀 담당자는 ‘결혼은 했느냐’, ‘남자친구가 왜 없느냐’,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느냐’ 등 개념 없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막판에는 무시하는 말투로 “당신은 나이는 많은데 경력이 얼마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직장을 다니다가 대학원에서 2년 간 공부하고, 지난 1년 반 동안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느라, 내 또래에 비해 직장 경력은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학력, 경력, 나이, 기타의 업무적 기술은 회사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면접을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면 처음부터 면접을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인사팀 담당자가 기대하는 ‘나이에 맞는 내용물’을 담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살아왔을 그 사람의 눈에는 결혼도 안하고 경력도 생각보다 짧은 삼십 대의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가 나이에 걸맞은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지식이 성장하면서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오랜 지인들에게 이해심이 많아졌다는 감탄을 듣기도 할 만큼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점점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만약 내가 다시 직장에 들어가거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예전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력서나 통장 잔고나 정부의 문서상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겠지만, 분명 나는 ‘제대로’ 나잇값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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