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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독자위원 칼럼] 강용석 의원의 성희롱 사건을 바라보며
“대박 아니니? 강용석?”
“응? 누구요?”
“강용석, 지금 난리 났잖아. 순간 검색어 1위.”
“걔가 누군데요?”
“한나라당 국회의원인데...(강용석 망언 리스트 좌르륵 열거)”
“푸하하하, 정말 국회의원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에이 설마...빨리 가서 검색해봐야겠다.”
강용석 의원의 고삐 풀린 입이 진가를 발휘한 날, 우리 회사 여자 화장실에서 오간 대화다. 정치부 기자, 한나라당 당원, 대한민국 정당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시민, 혹은 여의도에 상주하고 계신 의원님들 정도나 알 법했던 그 이름을 하루아침에 온 국민이 알게 됐으니 이만하면 노이즈마케팅의 최고 모범 사례다.
화장실에서 사건을 처음 전해 들었던 동료도 그랬지만, 나 역시 처음 기사를 봤을 땐 내 눈을 의심했고, 그 다음엔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준이 뭐......’라는 냉소의 성격이 짙었지만,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서도 웃었다.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분리수거해야 하는데 도저히 재활용할 만한 물건이 안 보여 암담한 상황 같았다고 할까? 남성우월주의, 외모차별주의, 학벌주의, 편법주의부터 특정 직업 비하까지 오색찬란한 편견의 짬뽕 같은 발언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건이 연일 언론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한나라당에서 전례 없이 빠른 결단을 내리는 걸 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변 남성들의 반응을 보며 찾을 수 있었다.
남자끼리는 농담 삼아 할 수 있는 얘기?
이번 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여자화장실과 남녀가 모두 모인 술자리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 차이가 있었다. 강 의원의 발언이 술상 안주로 오르자 대부분 남자 동료들의 첫 번째 반응은 다행히도 “잘못된 발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 중론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남자끼리는 농담 삼아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여자가 있는 앞에서 그걸 입 밖으로 꺼낸 게 경솔한 처사”라는 것. 또, “가장 큰 피해자는 MB와 나경원"이라는 농담도 큰 박수 세례를 받았다.
즉, 많은 남성들은 이번 사건을 ‘주둥이를 제대로 봉합하지 못해’ 벌어진 참극으로 보고 있었다. “남자는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는 강 의원의 발언이나, 여성 정치인에 대한 평가 기준을 외모로 한정짓는 강 의원의 시각에 ‘솔까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걸 여성이 있는 앞에서 입 밖으로 내는 건 범법 행위이므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난 우리나라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있음을 느꼈다. 여성을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로만 분류하는 시각에 대한 성찰은 없다. 그저 여성이 있는 자리만 아니라면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고 대상화시키는 작업을 남성들끼리는 계속 공유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많은 남성들이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더 나아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교육이 개개인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려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언행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알리는 데 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희롱 사건에 대한 성찰은 없고 패러디물과 화제만 넘쳐나
그렇다면 왜 일부 발언으로는 많은 남성들의 ‘솔직한 생각’을 대변했을 뿐인 강 의원이 이렇게까지 매장당하는 걸까? 그건 이 사건을 처음 대서특필한 언론사가 갑자기 정의감에 불타올라서도, 발 빠르게 강 의원을 ‘아웃’시킨 한나라당이나 우리 사회의 인권감수성이 그새 일취월장해서도 아니다.
강 의원의 발언이 주류 언론이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인 ‘행위 주체와 대상’을 여러 층위에서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또, 여러 권력층으로부터 ‘괘씸죄’를 샀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아나운서’ 집단을 비하했고, 거기에 ‘대통령’도 여대생 전화번호나 따는 찌질이로 격하시켰으며, 평소 얼짱으로 추앙받던 같은 당의 ‘여성 국회의원’의 외모 프라이드를 뭉개놓았을 뿐 아니라, 당내 최고 실권자인 또 다른 ‘여성 국회의원’에 대해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낸 과거 전력까지 되새김질됐다는 게 이번 사건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위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주체는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급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나운서 역시 매체마다 근무 환경에 차이는 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대중에게 확성기 역할을 할 수 있는 미디어 종사자라는 측면에서 그 영향력이 크다. 만약 강용석이 국회의원이 아닌 평범한 회사원이었거나, 발언 대상에 MB나 박근혜, 나경원, 아나운서 집단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사건은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 의원은 한 방에 그 모두를 가격하며 같은 편까지 적으로 만들었고, 거론된 인물의 중요도만큼 뉴스의 파급력도 컸다.
그래선지 이번 사건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재생산되는 양태만 봐도 역시나 가장 중요한 맥락은 빠져 있단 생각이 든다. 술자리에서 남자 동료들이 “입 밖에 낸 게 잘못”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왜 강 의원처럼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게 잘못됐는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고, MB나 박근혜, 나경원 등을 주어로 한 패러디물, 화제만 넘쳐난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건은 여러모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성희롱 사건에 대한 공분이 빠르게 확산됐지만, 거기엔 그 만한 특수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또, 여전히 남성들의 의식 수준은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평범한 누구, 혹은 힘없는 누군가가 다른 평범한 누군가에게 당한 성희롱도 큰 뉴스감이 되고, 가해자의 언행을 넘어선 시각 자체에 모두가 분노하는 사회는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참, 현재 행방불명되셨다는 강 의원에게는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지 작은 축하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정치인의 인지도란 모름지기 선거철마다 유권자들에게 무던히 아첨하고 돈 쏟아 부어야 올라가는 것인데, 강 의원은 ‘듣보잡’의 설움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며 인지도를 굳히셨으니 말이다. 다만 인지도와 지지도가 꼭 비례하지는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유원/ 일다 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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