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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민> 한국강제합병 100년 특별 좌담회 
 
<일다>와 교류하고 있는 일본의 여성언론 <페민>에서는 한국강제합병 100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그 중 한국과 일본인, 그리고 제일조선인 2.5세 젊은 여성들이 모여 과거의 역사와 진정한 화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사를 발췌해 싣습니다. -편집자 주
 
<좌담회 참석자 소개>
 
이령경
한국 출생. 릿쿄대학 대학원 재학. 한국대학을 졸업한 후 전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문제, 베트남전쟁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문제 등의 운동/연구를 했으며 현재는 제주도인 가족의 이산사 연구를 하고 있다.
 
림혜영
도쿄 출신.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 졸업 후 모스크바에서 어학연수를 거쳐 서울로 이주, 시민참가형 씽크탱크/희망제작소의 국제팀에서 근무했다. 현재, 도쿄 신주쿠에 있는 NPO법인 문화센터 아리랑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일다 국제통신원이기도 하다.
 
테라니시 스미코
도쿄 출생. 2000년부터 일본국제발런티어센터(JVC)에서 근무. 코리아사업담당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그림을 통한 한반도와 일본 어린이들의 교류활동 등을 담당하고 있다.
 
한반도 식민지 지배와 전후 피해를 청산하지 않은 일본.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세대인 한국인, 재일조선인, 일본인 여성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역사적 부채에 대해, 그리고 미래를 위한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시작한 계기를 들려주십시오.

 
대학 시절에 여성국제전범법정(2000년, VAWW-NET 재팬 주최)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NGO활동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 첫 계기였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특정 정부나 기업에 속하지 않고 NGO나 제3섹터에서 저의 역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테라니시 스미코씨. 일본국제발런티어센터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그림을 통한 한반도와 일본 어린이들의 교류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테라니시 저는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해서, 1998년에 일 년간 교환학생으로 한국유학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지인이 북한을 지원하는 일본 단체분과 서울을 방문해 저도 함께 한국의 NGO를 순방했습니다. 북한이 95년, 대홍수로 인한 큰 피해를 입어, 그것을 계기로 해외에서 지원이 시작됐죠. 저는 그때 처음으로 일본과 한국에 북한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을 포함한 많은 단체가 지원에 나섰는데, 서로 정보교환의 장이 없어서 2000년에 도쿄에서 북한지원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 행사를 도운 것이 일본국제발런티어센터(JVC)에 들어간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가 남북정상회담 직전이어서 앞으로는 남북관계도 좋아지고 지원하기도 쉬워지리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납치문제가 밝혀진 이후 일본 내에서는 (북한을) 지원하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고 경제제제조치로 물자를 보내기도 물리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지원의 전 단계로서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그림전시회를 통한 인적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죠.
 
‘일본어’로 남겨진 식민지의 기억
 
저는 서울이 아니라 남쪽의 대구라는 지방에서 자랐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90년대 한국에서는 다양한 학생운동이나 여성운동이 활발했는데, 저 역시 대학시절에 자연스럽게 운동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졸업 후 대구에 사는 몇몇 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대구정신대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시민의 모임’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와 그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관부재판(전 일본군 위안부나 여자 근로정신대원으로서 강제적으로 일했던 사실에 대해 열 명의 한국여성이 일본정부에게 손해배상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며 제소. 1998년에는 처음으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받았다)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는데, 후쿠야마나 히로시마에서  이 재판을 지원하고 있던 일본 분들이 몇 번이고 모임을 찾아왔지만, 원고였던 할머니는 “일본어는 듣기도 싫다”며 만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분과 함께 할머니 댁에 가서 차도 마시고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계속 침묵하고 있던 할머니 입에서 일본어가 나오는 거예요! 저희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죠. 그러자 이번에는 위안소에서 부르던 군가와 일본 노래를 부르시는 겁니다. 저희는 일본을 상대로 운동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할머니에게는 일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기억이 있으니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국제전범법정에도 할머니와 함께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그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활동하면서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도 했고요.
 
-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그 역사적 부채에 대해 어떻게 알았고 받아들였나요.
 
저는 본명(한국식 이름)으로 일본학교에 다녔으면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피해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 함께 살았던 친할아버지는 우유를 ‘규뉴’가 아니라 ‘큐우뉴우’라고 발음했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물어볼 만한 나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제주도에서 여덟 살 때 건너왔다”고 흘리듯 이야기는 하면서도 좀처럼 자세한 역사를 말해주지 않았죠. 
 
▲ 재일조선인(한국국적) 2.5세 림혜영씨. 현재 조선-한국 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거나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쟤 한국 사람이래”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점점 소극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과 메이지진구에 새해참배를 가려고 했더니 아버지가 “메이지천황이 조선인인 네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며 호통을 치셔서……. 어쨌든 모든 게 조선 탓이니까 점점 더 조선이 더 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고등학교 때는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전 일본군 위안부라고 고백하는 것을 뉴스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만약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일본에 대한 반발도 생겼어요.
 
그런데 입시학원에 다닐 때 한 논술 선생님이 “일본에는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은 무익한,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한반도를 드디어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됐고, 조국을 알고 싶고 말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에 갔습니다.
 
테라니시 저는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서 굉장히 수동적이었습니다.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재일조선인/한국인은 한국이름을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뿐이어서 “일본 학교에는 재일한국인/조선인이 반마다 몇 명씩은 꼭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려주는 사람도 없는, 그게 당연한 것이 일본의 사회인 거죠.
 
또 여름방학에 한국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많은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본 일본사람이 “어릴 때부터 이런 것을 보여주면서 키우니 화해가 어렵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과거의 책임은 다하지 못하더라도 미래마저 ‘어렵지’하는 상태로 방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는) 반일교육을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본에 와도) 괜찮은가” “부모님이 일본 유학을 반대하지 않았나”하는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 말의 전제는 한국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은) 반일감정을 갖고 있다는 거죠. 일본의 식민지 역사나 항일운동은 분명 교과서에 상당 부분 실려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연대운동이라는 형태로 일본인과 만나면서부터 저에게 ‘반일’이라는 부분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연대운동 안에서 불편한 상황이 있어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일본인을 상대로 일본이 당시 저지른 참혹한 일을 말해야 할 때는 마음이 불편하지요. 하지만 일본인과 일본이라는 나라가 저지른 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한편으로 해방 후 한국사회가 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한국인으로서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일상에 새겨진 식민지 지배의 상흔 
 
▲ 한국인 이령경씨.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전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 활동 등을 했으며 현재 제주도인 가족의 이산사 연구를 하고 있다. 
 

 
엄마는 1943년 일본 출생이에요. 제가 일본에 유학 온 지 5년차일 때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 호적상 엄마 이름이 초코였어”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은숙’이라는 한국 본명이 있는데 식민지시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호적상은 ‘초코’였다는 거죠. 처음 듣는 얘기여서 “왜 지금까지 얘기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결국 부모님은 얘기할 필요성도, 계기도 없었던 거겠죠.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는 우리 엄마처럼 사람들의 일상에 여러 가지 형태로 또렷이 남아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개개인의 역사를 캐내고 싶어요.
 
역시 대화할 용기를 갖는 게 중요하네요. 예를 들어 북한을 ‘저쪽’이라고 말하잖아요. 뭔가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저쪽’ 출신인 사람들은 더 민감하게 느끼고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죠. ‘한글강좌’라는 말도 마찬가지죠. ‘영어강좌’라고 하지 ‘알파벳 강좌’라고는 안 하잖아요? ‘재일코리안’이라는 말도 최대한의 타협안이죠. 원래의 호칭으로 부를 수 없는,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점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상대를 보면 ‘재일’에서 말을 멈추게 되죠.
 
저도 그래요! 재일조선인에게 한국어와 일본어 중 어떤 말로 인사할까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저는 재일조선인의 존재와 역사에 책임을 가진 한국국민으로서 상대를 배려해야할 책임이 있죠.
 
같은 언어를 쓰는 재일조선인/한국인 안에도 대립이나 파벌이 있으니, 남북분단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에서도 저항감이 크고.
 
맞아요. 옛날에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한 기억이 있어서 ‘조센징’이라는 말의 울림에는 굉장히 생생한, 몸으로 느껴지는 저항감이 있어요.
 
테라니시 오랫동안 같은 뜻을 가지고 일해 온 사람에게조차 단어 하나에도 이만큼 신경을 쓰고 시간을 들이는데, 전혀 이 문제를 모르는 사람한테 전부 들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죠. 그 지점을 뛰어넘어서라도 전달할 수 있는 매력적인 말이 없을까 항상 생각합니다. 배타적인 말에 사람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떤 말을 쓰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다
 
- 일본과 한반도의 진정한 ‘화해’에는 재일조선인/한국인에 대한 가해까지 포함한 식민지 지배와 그 결과에 대해 일본이 진상규명과 사죄, 보상을 하는 것이 전제입니다만, 일본 정부 스스로가 진상규명을 할 자세는 아직 없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현실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테라니시 한국인과 일본인, 재일어린이들과 10년 간 워크숍을 해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게임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그 아이들이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때 한국 사람과 재미있게 놀았다” “재일 친구와 이야기했었다”며 기억을 떠올리고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이 역사를 아주 잘 이해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있어준다는 것에 저희는 가능성을 느낍니다.
 
그런 계기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 기억을 씨앗처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르니까요. 다만, 그 씨앗을 꽃 피게 만들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북한 배싱(때리기)’ 안에서 지원은 어려우니까요.
 
테라니시 하지만, ‘무조건 (북한) 체재타도’를 외치는 (일본)사람도, ‘그림교류전’ 같은 것은 지지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교류활동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통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우선은 국가가 진상규명과 사죄를 하고 제대로 책임을 지면 일본인, 한국인, 재일조선인이 각각의 만남 속에서 경험한 싫었던 기억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서 공유해야 할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할머니 같은 당사자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하루빨리 만들고 싶습니다. (전 일본군'위안부' 당사자들에게 '증언'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편집자 주)
 
재일조선인/한국인의 정신질환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재일의 90% 가까이가 일본 이름을 쓰며 문제의식조차도 잃어버려서 서로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저희 문화센터에 와서도 일본이름으로 등록할지 본명으로 등록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니 정신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당연하죠. 제가 갖고 있는 연결점들이 많은 사람에게 확대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매일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재일조선인/한국인이 금기를 깨고 뭐든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침략’이라고 인정하는 올바른 역사관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정리: 우메야마 미치코, 스기하라 토키코, 다케우치 아야 ※ 고주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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