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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 ‘코레일이 승무원들의 실질 사용자’ 판결
KTX에서 일하며, 파견노동자의 신분을 거부하고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다 2006년 대량해고 됐던 승무원들이 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 KTX승무원들이 파견노동자 신분이 부당하다며 철도공사 측에 '직접고용'해줄 것을 요구하며 투쟁에 들어간 지 5년이 지났다. ©일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 최승욱)는 26일 KTX승무원 34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청구소송에서, 이들이 철도공사에 “직접고용”된 근로자임을 인정했다. 철도공사가 승무 업무를 외주화한 것은 ‘위법’하다는 결정이다. 이어 재판부는 코레일 측에 승무원들에게 미지급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 내렸다.
본안 판결이 나기 2년 전인 2008년 12월, 서울지방법원도 승무원들이 철도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 소송’에서 같은 결정을 내렸다. 철도공사가 KTX승무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 자회사의 파견노동자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위장도급’임을 법적으로 명확히 한 것이다. 이 재판 외에도 119명의 승무원들이 같은 내용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4년 전인 2006년 5월 19일 무려 28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대량해고 되기 이전부터, KTX승무원들의 직접고용 정규직 노동자로서의 ‘권리 찾기’ 투쟁은 시작되었다. 20대중후반이었던 그들은 이제 30대가 되었다. 승소 판결 이후 승무원들은 지난 5년이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었다고 비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은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오미선 지부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먼저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KTX승무원들의 투쟁은 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오랜 분쟁의 발단이 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
“승무원들의 고용이 기형적인 ‘파견’ 형태였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채용하고 2년 후에 정규직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함께 호흡 맞춰 일하는 정규직(철도공사 소속) 팀장과 우리 승무원 간에 급여, 복지 등에서 차별이 심했다. 우리는 철도공사 측에 파견노동자 신분이 아닌 직접고용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판결의 의미도 승무업무를 외주화한 것은 ‘불법’임을 인정한 것이다.”
-승무원들의 목소리가 여론을 타자, 철도공사 측에서는 자회사의 정규직으로 받아주겠다는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승무원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우리는 승무업무가 외주화해선 안 되는 상시 업무라고 주장했지만, 철도공사는 외주화 입장을 고수했다. 우리는 직접고용된 팀장과 유기적인 관계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는데도, 공사 측은 (팀장과 승무원의 일이) 별개라고 일축했다. 공사 측이 코레일투어서비스라는 자회사의 ‘정규직’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그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철도공사가 자회사와 계약을 끊어버리면 고용이 불안정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재판결과를 반기면서, 승무원들의 용기와 노고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긴 투쟁의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다고 보는지.
“굉장히 오래 싸웠다. (해고된) 2006년 전부터 싸웠다. 5년 넘게 싸우며, 잘 될 수 있는 기미가 보이는 듯 한 적도 있지만, 사회에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집단농성을 3년간 하고,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태에서 힘들어 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무 것도 남지 않고 그만둘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억울함과 분노가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다. 마지막 고공농성 이후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상황까지 갔는데, 결국 법적 투쟁을 시작하는데 동의했다.”
-그간의 과정을 돌아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나 사건이 있었다면?
“고공농성을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처음에 400명이 시작한 투쟁이 34명 남았다.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점거하고 단식하고 농성도 했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교섭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투쟁은 점점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개됐다. 마지막 남은 게 고공농성이었다. 당시엔 조건이 무척 안 좋았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노동자 측을 압박했다. 철도공사 측은 전보다 더 안 좋은 형태의 고용조건을 이야기하고 나와 우릴 지치게 만들었다. 그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 KTX승무원들은 2006년 고공농성 투쟁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는다.
-공기업의 자회사를 통한 불법파견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준 KTX승무원들의 저항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권리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맘 고생이 많았던 승무원들 34명이 같이 믿고 도닥여 준 것이 가장 큰 힘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승무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준 철도노조에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을 만큼 고맙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노조활동을 하며 투쟁을 하는 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연대 단위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26일 선고 나고서 그 분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의 전화를 드렸다. 또 하나 덧붙인다면 언론에서 많이 취재를 해준 것도 도움이 되었다. 매 순간마다 언론보도가 없었으면 기운 빠지고, 외부의 응원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언론의 힘도 큰 것 같다.”
-이제 막 사회초년생으로 배울 게 많은 시기에 투쟁의 장으로 내몰렸던 것이 안타깝다. 각자가 안게 된 상처가 클 텐데, 승무원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법적 투쟁으로 들어서면서 거의 매달 재판이 열렸다. 변호사 만나 자료를 만들고 서면을 제출해야 했다. 조합원들은 한 달에 한번 만나 내용을 공유했다. 또 우린 철도 조합원이므로, 승무원 사안이 아니더라도 철도 집회 때 참여하고 노조 선거에도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생계 위한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고 있나? 2년 전 가처분신청 결과, 180만원씩 지급하라던 법원의 명령은 지켜졌는지.
“철도공사 측으로부터는 매달 180만원 지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안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20대 중반에 대학 졸업하고 승무원이 되어 이제 30대가 되었다.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있다. 이제 재취업을 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력서에 공백기간을 채울 말이 없다. 파업을 했다고 해도 마이너스고, 아무 것도 안 했다고 해도 마이너스다. 지금도 생계 유지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계약직이거나 아르바이트 직이다. 우리는 철도공사에 직접고용된 정규직 KTX승무원으로 복귀할 날을 꿈꾼다.”
▲ KTX승무원들의 서울역 농성 장면 © 일다
-철도공사 측은 1심 결과에 불복하고 항소하려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의견은?
“정말 답답하다. 법대로 하자고 한 건 공사 측이다. 승무원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법적으로 하자면서, 법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 1심 판결이 나오면 따르겠다고 한 것도 공사 측이다. 사실 노동자들은 재판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지금 철도는 노사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법원 판단에 따르기로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또다시 항소를 한다면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기업도 아니고 공기업인데, 큰 로펌에 세금을 물 쓰듯 하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아직 공식입장을 공개한 것은 아닌 걸로 아는데, 제발 공기업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외주화 등 ‘간접고용’ 문제는 KTX승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주요한 노동현안이다. 다른 곳에서도 승무원들과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투쟁하라고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그러나 분명히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즐겼으면 한다. 왜 우리만 이럴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승무원들의 투쟁과정이 조금 달랐던 점을 생각해보면, 우린 투쟁의 과정에서도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문화제를 해도 당시 보편화된 집회와는 양상이 달랐다. 편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거리감 느껴지는 ‘철의 노동자’ 같은 노래는 어두운 느낌을 주고 거부감 느끼는 시민들도 있으니까. 우린 밝은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그리고 승무원들 각자 본인만의 탈출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용산에서 오래 농성을 하는 동안,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든지, 영화를 보거나 동호회모임도 참여하면서 자기만의 탈출구를 가졌다. 하루하루를 투쟁만 한다고 생각하면 못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가 정당하다’는 신념만 버리지 않으면, 100%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KTX승무원들의 권리 찾기를 지지하며 지켜봐 온 시민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관심 가져준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선고 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2006년에 우리는 외딴 섬 같았다. 결국 우리들만의 투쟁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고용이 불안해지고 우리와 같은 세대, 그리고 더 어린 세대들에겐 KTX승무원들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조금씩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 더 어려운 사업장들도 많다. 기륭전자 노동자들, 서비스직 노동자들 정말 힘들 것이다.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 현대자동차 결과(올해 7월 사내도급은 ‘불법파견’ 대법원 인정)를 보고 우리도 희망을 가졌다.” (조이여울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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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에서 일하며, 파견노동자의 신분을 거부하고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다 2006년 대량해고 됐던 승무원들이 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 KTX승무원들이 파견노동자 신분이 부당하다며 철도공사 측에 '직접고용'해줄 것을 요구하며 투쟁에 들어간 지 5년이 지났다. ©일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 최승욱)는 26일 KTX승무원 34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청구소송에서, 이들이 철도공사에 “직접고용”된 근로자임을 인정했다. 철도공사가 승무 업무를 외주화한 것은 ‘위법’하다는 결정이다. 이어 재판부는 코레일 측에 승무원들에게 미지급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 내렸다.
본안 판결이 나기 2년 전인 2008년 12월, 서울지방법원도 승무원들이 철도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 소송’에서 같은 결정을 내렸다. 철도공사가 KTX승무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 자회사의 파견노동자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위장도급’임을 법적으로 명확히 한 것이다. 이 재판 외에도 119명의 승무원들이 같은 내용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4년 전인 2006년 5월 19일 무려 28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대량해고 되기 이전부터, KTX승무원들의 직접고용 정규직 노동자로서의 ‘권리 찾기’ 투쟁은 시작되었다. 20대중후반이었던 그들은 이제 30대가 되었다. 승소 판결 이후 승무원들은 지난 5년이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었다고 비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은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오미선 지부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먼저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KTX승무원들의 투쟁은 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오랜 분쟁의 발단이 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
“승무원들의 고용이 기형적인 ‘파견’ 형태였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채용하고 2년 후에 정규직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함께 호흡 맞춰 일하는 정규직(철도공사 소속) 팀장과 우리 승무원 간에 급여, 복지 등에서 차별이 심했다. 우리는 철도공사 측에 파견노동자 신분이 아닌 직접고용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판결의 의미도 승무업무를 외주화한 것은 ‘불법’임을 인정한 것이다.”
-승무원들의 목소리가 여론을 타자, 철도공사 측에서는 자회사의 정규직으로 받아주겠다는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승무원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우리는 승무업무가 외주화해선 안 되는 상시 업무라고 주장했지만, 철도공사는 외주화 입장을 고수했다. 우리는 직접고용된 팀장과 유기적인 관계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는데도, 공사 측은 (팀장과 승무원의 일이) 별개라고 일축했다. 공사 측이 코레일투어서비스라는 자회사의 ‘정규직’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그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철도공사가 자회사와 계약을 끊어버리면 고용이 불안정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재판결과를 반기면서, 승무원들의 용기와 노고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긴 투쟁의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다고 보는지.
“굉장히 오래 싸웠다. (해고된) 2006년 전부터 싸웠다. 5년 넘게 싸우며, 잘 될 수 있는 기미가 보이는 듯 한 적도 있지만, 사회에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대 후반의 여성들이 집단농성을 3년간 하고,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태에서 힘들어 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무 것도 남지 않고 그만둘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억울함과 분노가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다. 마지막 고공농성 이후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상황까지 갔는데, 결국 법적 투쟁을 시작하는데 동의했다.”
-그간의 과정을 돌아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나 사건이 있었다면?
“고공농성을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처음에 400명이 시작한 투쟁이 34명 남았다.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점거하고 단식하고 농성도 했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교섭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투쟁은 점점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개됐다. 마지막 남은 게 고공농성이었다. 당시엔 조건이 무척 안 좋았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노동자 측을 압박했다. 철도공사 측은 전보다 더 안 좋은 형태의 고용조건을 이야기하고 나와 우릴 지치게 만들었다. 그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 KTX승무원들은 2006년 고공농성 투쟁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는다.
-공기업의 자회사를 통한 불법파견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준 KTX승무원들의 저항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권리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맘 고생이 많았던 승무원들 34명이 같이 믿고 도닥여 준 것이 가장 큰 힘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승무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준 철도노조에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을 만큼 고맙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노조활동을 하며 투쟁을 하는 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연대 단위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26일 선고 나고서 그 분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의 전화를 드렸다. 또 하나 덧붙인다면 언론에서 많이 취재를 해준 것도 도움이 되었다. 매 순간마다 언론보도가 없었으면 기운 빠지고, 외부의 응원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언론의 힘도 큰 것 같다.”
-이제 막 사회초년생으로 배울 게 많은 시기에 투쟁의 장으로 내몰렸던 것이 안타깝다. 각자가 안게 된 상처가 클 텐데, 승무원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법적 투쟁으로 들어서면서 거의 매달 재판이 열렸다. 변호사 만나 자료를 만들고 서면을 제출해야 했다. 조합원들은 한 달에 한번 만나 내용을 공유했다. 또 우린 철도 조합원이므로, 승무원 사안이 아니더라도 철도 집회 때 참여하고 노조 선거에도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생계 위한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고 있나? 2년 전 가처분신청 결과, 180만원씩 지급하라던 법원의 명령은 지켜졌는지.
“철도공사 측으로부터는 매달 180만원 지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안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20대 중반에 대학 졸업하고 승무원이 되어 이제 30대가 되었다.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있다. 이제 재취업을 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력서에 공백기간을 채울 말이 없다. 파업을 했다고 해도 마이너스고, 아무 것도 안 했다고 해도 마이너스다. 지금도 생계 유지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계약직이거나 아르바이트 직이다. 우리는 철도공사에 직접고용된 정규직 KTX승무원으로 복귀할 날을 꿈꾼다.”
▲ KTX승무원들의 서울역 농성 장면 © 일다
-철도공사 측은 1심 결과에 불복하고 항소하려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의견은?
“정말 답답하다. 법대로 하자고 한 건 공사 측이다. 승무원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법적으로 하자면서, 법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 1심 판결이 나오면 따르겠다고 한 것도 공사 측이다. 사실 노동자들은 재판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지금 철도는 노사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법원 판단에 따르기로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또다시 항소를 한다면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기업도 아니고 공기업인데, 큰 로펌에 세금을 물 쓰듯 하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아직 공식입장을 공개한 것은 아닌 걸로 아는데, 제발 공기업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외주화 등 ‘간접고용’ 문제는 KTX승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주요한 노동현안이다. 다른 곳에서도 승무원들과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투쟁하라고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그러나 분명히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즐겼으면 한다. 왜 우리만 이럴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승무원들의 투쟁과정이 조금 달랐던 점을 생각해보면, 우린 투쟁의 과정에서도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문화제를 해도 당시 보편화된 집회와는 양상이 달랐다. 편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거리감 느껴지는 ‘철의 노동자’ 같은 노래는 어두운 느낌을 주고 거부감 느끼는 시민들도 있으니까. 우린 밝은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그리고 승무원들 각자 본인만의 탈출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용산에서 오래 농성을 하는 동안,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든지, 영화를 보거나 동호회모임도 참여하면서 자기만의 탈출구를 가졌다. 하루하루를 투쟁만 한다고 생각하면 못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가 정당하다’는 신념만 버리지 않으면, 100%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KTX승무원들의 권리 찾기를 지지하며 지켜봐 온 시민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관심 가져준 분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선고 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2006년에 우리는 외딴 섬 같았다. 결국 우리들만의 투쟁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고용이 불안해지고 우리와 같은 세대, 그리고 더 어린 세대들에겐 KTX승무원들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조금씩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 더 어려운 사업장들도 많다. 기륭전자 노동자들, 서비스직 노동자들 정말 힘들 것이다.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 현대자동차 결과(올해 7월 사내도급은 ‘불법파견’ 대법원 인정)를 보고 우리도 희망을 가졌다.” (조이여울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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