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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퍼센트 짜리 인간’은 없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희정 
 
 
“커피나 타고 그러던 애들이…….”
 
지나가던 대학 임원이 선전전을 하며 소란(?)을 피우는 조합원들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한 조합원이 맞받아쳤다.
 
“그럼 저희가 쫓겨난 자리에 140개의 커피머신을 들이세요!”
 
명지대학교 행정조교들의 파업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2009년 2월, 명지대 행정조교들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명지대학 측은 8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140여명의 행정조교를 해고했다.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명시한 비정규직보호법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이메일 통지서 하나로 해고당한 ‘명지가족’
 
해고를 당하고서야 행정조교들은 자신들이 단기 계약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계약서가 있었지만 말 그대로 ‘형식적’이었고, 10년 이상 근무를 해온 사람도 꽤 있었다. 
 


▲ 정리해고된 명지대 행정조교들이 총장의 집 앞에서 "우리의 일자리를 돌려주세요"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해고가 있기 전 여름 연수에서, 교원팀장이 직접 “문제없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 달라”고 말했다. 80% 이상이 명지대학교 출신인 행정조교들에게, 학교 측은 ‘명지 가족’ 운운하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이메일로 해고통지서 하나를 보내놓고, 그녀들의 자리에 이름만 ‘행정보조원’으로 바뀐 2년짜리 계약직을 앉혔다.
 
해고된 이들의 나이가 서른 초반에서 마흔 초반까지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수나 선배 교직원의 추천을 통해 행정조교로 들어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월 100만 원 정도의 박봉에도 학교밖에 모르고 일한 탓에 사회가 원하는 취업적령기가 훌쩍 지나버렸다. ‘복직이 되지 않는다면, 무얼 해야 할까? 어디에 다시 취직하기에는 늦은 나이가 아닐까? 네일아트나 미용 같은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파업 기간 내내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교내에 천막을 세우고 농성에 들어갔다. 대학 본관에 항의 방문도 가고, 총장 집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파업을 못 마땅하게 여긴 학교 측 임원이 계약직이 뭘 그리 일을 했겠냐면서, ‘커피 타는 일’을 운운했다. 이 말에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웠기 때문이 아니다, 억울했기 때문이다.
 
‘계약직’이라는 명칭이 가진 이미지는 그녀들이 실제로 해온 일을 가리고, 부차적인 업무를 취급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 박봉이라 생각했지만 모교니 참아왔던 계약직 월급은, 어느새 그녀들의 일을 박봉을 받아도 될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왜곡하는 데 이용됐다. 이것은 명지대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양대 행정조교 정규직 전환? 형식적 재계약만 사라졌을 뿐!
 
2010년 5월, 한양대 행정지원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2003년 비정규직보호법 논의가 한창일 때 학교 측에서 먼저 70여명의 행정조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이때 명칭이 행정조교에서 ‘행정지원직원’으로 바뀌었다. 그냥 직원이 아니라, ‘지원’자가 붙었다. 결국 정규직이 되고서도 그녀들의 노동조건은 기존의 ‘무기 계약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형식적이었던 재계약이 없어졌을 뿐이다.
 
사학연금부터 경조사비까지 어떤 복지 혜택도 없었다. 월급도 기존 정규직 임금의 65%에 불과했다. 학교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이후 발생할 문제들을 대비해 행정조교들을 직원으로 전환했지만, 정규직만큼의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현재 한양대에는 3개의 정규직이 있다. 기존 정규직 ‘갑’, 행정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되어 갑의 월급의 80%를 받는 ‘을’ 그리고 65%의 월급을 받는 행정지원직원 ‘병’이다. 갑, 을, 병 모두 정규직이지만 서열이 달랐다. 행정지원직원들을 이를 현대판 카스트 제도라 불렀다. 정규직 아래로 행정 계약직, 행정조교, 학사조교 등 계약직원들이 줄줄이 있다.
 
학사지원직원들은 노사협의회와 노동조합을 거쳐 학교와 협상을 해, 하나둘 차별을 줄이고 복지를 개선시켜 나갔다. 동일노동에 대한 차별로 국가인권위에 진정까지 넣어서 얻은 복지였다.
 
같은 일을 하고, 경력이 많아도 ‘더 낮은 인간’ 
 

▲ 본관앞에서 아침 집회를 시작하고 있는 한양대지부 조합원들. 이름뿐인 정규직 전환에 저항해, 한양대 행정지원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간지 100일이 넘고 있다.     © 전국대학노동조합 
 
‘병’인 행정지원직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갑’, ‘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한양대 농성천막을 방문한 날, 전국대학노동조합 한양대지부 (이하 한양대지부) 김미옥 지부장이 두툼한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업무 인수인계가 기록된 서류다.
 
갑은 병에게, 병은 을에게, 서로의 업무를 인계하고 있었다. 이는 갑, 을, 병의 업무가 다르지 않음을 말해 준다. 굳이 이런 서류를 앞세우지 않아도 이들은 한 부서에서 10년, 15년을 일해 온 이들이다. 맹수완 부지부장이 옆에서 말을 거든다.
 
“10년 이상을 일한 사람들이 단순 업무를 맡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앞서 명지대에서 만난 전국대학노동조합 명지대지부 서수경 지부장도 자신들의 일이 정규직 직원과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증언했다.
 
“심한 경우는 조교가 결재 서류를 다 만들어 도장을 찍지 않은 거를 주면, (정규직)직원은 도장만 찍기도 해요. 물론 조교가 142명이 있으면 142명이 다 일을 도맡아 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자리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하지만 학과 조교는 학과에 돌아가는 모든 일을 자잘한 것부터 큰 행사까지 다 하잖아요. 행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건 그 조교 하나니까. 교수들의 잡심부름부터 고난이도의 행정 업무까지 다 하고, 학생들이 질문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서포트 해야 하는 것도 조교고. 나 같이 교학팀이 있으면 행정적으로 요청이 들어오는 걸 학과에 내려주고, 학과 것을 취합해 올려 주고, 중간에 중재하는 역할, 예산 관리, 결제. 그런 것까지 다 했거든요.”
 
서 지부장은 명지대에서만 11년을 근무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그저 평직원일 뿐이다. 일한 기간이 길수록 업무량과 책임은 커지지만 승진은 기존 정규직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그녀들은 단순히 월급과 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사람이 아니라 ‘65%짜리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다음은 한양대지부 김미옥 지부장의 말이다.
 
“같은 일을 하고 우리가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더 낮은 인간들인 거예요. 무슨 공문이 와도 순서대로 나가요. 직원 갑, 을, 병 순서대로. 주소록 하나를 작성해도 그래요. 서열이 정해져 있어요. 아무리 제가 먼저 입사하고 선배라 하더라도, 제가 있으면 갑과 을은 사무실에서 막내들이 하는 일 있잖아요? 그거 안 해요. 암묵적으로 병이 하게 되어 있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에서 
 

▲ 농성 현장에서 투쟁 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한양대지부 김미옥 지부장  ©전국대학노동조합  
 
노동조합은 올해 차등지급해온 임금 개선을 요구했다. 단지 돈 몇 푼을 더 받겠다는 게 아니었다. 정규직원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학교는 교섭을 거부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갔다.
 
“‘직원이니까 이 일도 해야지’라고 일을 시킬 때는 직원처럼 대우해 주다가, 직원 혜택을 받아야 할 때는 편리하게 ‘너희는 기타 교원이니까, 조교니까’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에 선 이들의 고충에 대해 김미옥 지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갑’이 들어왔어요. 학교 후배잖아요. 나중에 그 친구가 승진을 하고 나보다 더 높아지더라도 일단 처음에는 내가 선임자니까 일을 가르쳐요. 밥을 사줘도 내가 사줘요 돈은 적어도 승진을 못해도 나는 선배니까요. 속상하면, 힘들지, 우리 한잔할까? 이렇게 챙기기도 해야 하고. 그게 뭐냐면 중간 관리자 일이에요. 그래서 직급을 주는 거잖아요, 그런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그런 거 없어요. 없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내 돈 써가면서 하는 거예요. 갑, 을, 병으로 나눠 직원들 세분화 시키면 학교는 편한 거예요, 단결 안하고. 그렇지만 저희는 마음이 아픈 거죠.”
 
한양대 행정지원직원들은 교직원으로 일하며 보람도 느꼈다고 말한다. 2000년 파업 이전 80만원 박봉을 받을 때도, 모교이기 때문에 학교가 발전하고 각종 평가에서 좋은 결과 얻는 걸 보면 뿌듯했다고 한다. 대다수의 대학이 그렇듯이 한양대도 행정직원들 중 많은 수가 모교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믿음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학교에서도 우리 생각을 해주겠지.’ 그러나 김미옥 지부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걸 학교가 이용한 거죠. 모교니까 마음이 약해지잖아요. 우리 학교고, 직원들도 다들 알던 선배고요.”
 
“사람은 소모품이 아니다” 
 
▲ 한양대학교 본관 앞에 설치한 농성천막. 9월 2일 파업 100일을 맞아 열린 문화제는, 천막이 태풍 곤파스로 인해 무너져 내려 스티로폼 깔개만 덩그러니 놓고 열려야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했다.  

 
9월 2일, 지역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그리고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함께 한양대 노동조합 파업 100일을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하필 전날 불어 닥친 태풍 곤파스로 인해 대학 본관 앞에 친 농성천막이 무너져 내렸다. 천막이 있던 자리에는 스티로폼 깔개만 덩그러니 놓였다. 그럼에도 많은 학생들이 와서 연대의 뜻을 전한 까닭일까, 문화제는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했다.
 
문화제 막간을 이용해 김미옥 지부장과 따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씁쓸히 말했다.
 
“학교가 귀를 막고 전혀 들어주지 않으니까 의심이 생겨요. 이게 정당한 요구가 아닌가? 우리가 과한 요구를 했나? 스스로 고민하게 되요. 그걸 학교에서 바라는 거겠죠?”

문화제가 끝나고 천막을 빠르게 스쳐가는 학생들 무리에 껴, 대학 안까지 들어온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다 문득 교정을 뒤돌아보았다. 작년, 파업 200일이 넘어가자 지친 모습으로 명지대 노동조합의 서수경 지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상식적으로 산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이구나……. 하지만 최소한 이후로 행정보조원도 함부로 자르지 못할 거고, 사람을 소모품처럼 자르지는 말아야겠다는 그런 교훈을 대학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말, 명지대 노동조합 월례회의가 있었다. 명지대학 행정조교들은 250여일이 넘는 싸움 끝에 10명의 복직을 약속받았다. 약속된 기일인 2011년을 앞두고 명지대 행정조교들은 각자 생계를 꾸려가면서 틈틈이 월례회의와 다양한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9월 9일 교섭을 앞둔 한양대 노동조합 지지방문이 결정됐다.

층층이 구조화된 서열 아래, 교직원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머리에 이고 불평등한 대우 속에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며 일하고 있을 사람들. 비정규직을 생각한다. 그네들의 65%짜리 삶을 떠올린다. (일다/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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