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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미(美)가 아닌 ‘의미를 만드는 것’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참여한 페미니즘 미술가 수잔 레이시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9월 4일 토요일 오전, 안양 시의회 로비가 수많은 여성들로 북적거렸다. 까만 머리의 여성들 사이에서 분주한 노란 머리의 한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새 동네, 열린 도시 안에서(A New Community in the Open City)`가 주제인 제3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의 참여 작가로 한국에 온 페미니즘 미술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다.
‘평등’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계급과 폭력 등 압박받는 사람들의 문제에 접근해 온 수잔 레이시는 다양한 문화권의 여성들과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번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는 ‘우리들의 방-안양 여성들의 수다 (Room of our own - Anyang Women's conversation)’라는 작업을 통해 안양 여성들의 의견이 정책적 제안이 되는 과정을 작업에 담아냈다.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 수잔 레이시는 공공미술이 단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작업이 아님을 강조했다.
수잔 레이시는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 미술가로서 다른 작가와의 협업과 참여를 중시하는 퍼포먼스 작업을 해 왔다. 로스앤젤리스 시청 앞에서 레슬리 라보위츠(Leslie Labowitz)와 협업으로 진행한 퍼포먼스 ‘애도와 분노 속에서’에는 수많은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함께했다.
LA에서 발생한 일련의 여성 강간 살인 사건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 이 작업은 신중하게 기획된 매체 이벤트이기 때문에 국영방송의 시선을 모았다. ‘애도와 분노 속에서’는 미국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높은 범죄율을 상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극들을 단지 흥미 본위의 충격기사로만 다루는 매스컴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꾸준히 지역사회 조직의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며 정책과 공공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에서 발생하는 형평성의 가치문제를 드러내는 작업을 진행하던 수잔 레이시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이전에 "공공미술 public art" 이라는 용어로 지칭해왔던 공공장소에 놓인 설치나 조각들과 형태와 의도 양 측면 모두에서 구별하기 위해 붙인 용어다. 이는 ‘참여에 기초하며,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관하여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수잔 레이시는 자신의 작업에서 ‘사회분석과 미술가의 역할, 지속성, 관객과의 관계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 등을 강조한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작업이 있는데,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Oakland, California)에 거주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10년간 지속하였던 <오클랜트 프로젝트> (The Oakland Projects, 1991-2000)가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보다 더 조직화된 정치적 행동주의를 설치와 퍼포먼스 등 다양한 유형으로 구체화해낸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잔 레이시는 TEAM—청소년(Teens) + 교육자(Educators) + 작가(Artists) + 매체제작자(Media Makers)—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청소년 및 성인 협업자들과 함께 워크샵, 강연, 미디어작업, 제도 및 정책 개발을 포함하는 장기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사회 지향적 퍼포먼스와 멀티미디어 설치를 도구로 하여 도시 내 청소년들이 공공정책과 제도에 관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 일련의 프로그램은 지역 대중매체에 비춰진 청소년들의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청소년들이 사회 변화에 예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터득하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에서 나아가 장기간에 걸쳐 이들이 공유하였던 경험들은 오클랜드 청소년 정책 개발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 캘리포니아주의 오클랜드에서 10년 동안 지속된 <오클랜트 프로젝트> (The Oakland Projects, 1991-2000) . 청소년들이 공공미술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서고, 이를 통해 청소년 정책개발에 실질적인 영향을 이끌어 내었다.
‘우리들의 방-안양 여성들의 수다’
수잔 레이시가 기획한 ‘우리들의 방-안양 여성들의 수다 (Room of our own - Anyang Women's conversation)’는 사적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의미 없는 말하기로 폄하되고 있는 여성들의 ‘수다’를 공공장소에 이끌어내고, 그 내용을 추출하여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제안하는 작업이다. 작업의 과정과 참여자와의 협업이 중요한 이 프로젝트는 크게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먼저 수잔 레이시는 현지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손경년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초빙교수와 함께 자문진 미팅을 통해 주제를 정했다. 그리고 전문가 워크숍을 통해 주제 추출과 참여할 여성 그룹, 장소 등을 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수다모임에 참여할 15개의 여성 그룹은 안양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세대와 계층을 망라해 일종의 ‘표본 집단’을 구성했다. 이후 총 15개 팀이 15개의 장소에서 일주일간 하루 2개 내지 3개로 모두 수다모임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은 녹음과 사진으로 모두 기록되었다. 작업된 사진 결과물을 보면 학생과 교사로 구성된 그룹은 안양1번가(상업지구)에서, 어머니안전지도자회는 수영장을 배경으로 수다모임을 하는 등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 9월 4일 안양시의회 로비에서 진행된 '안양여성들의 수다'. 공공정책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될 것을 알리는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이에 대해 수잔 레이시는 “상징적으로 여성의 대화들이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의도된 장소를 뽑았다”고 설명했다. “으레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상징적인 연출을 통해 여성의 의제를 만든다면, 여성의 수다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수다’의 최종결과물은 안양시의회 로비에서의 퍼포먼스와 정책 조언리스트를 담은 소책자, 학운공원에 전시된 사진들이다.
9월 4일 안양시의회에서 진행된 퍼포먼스는 여성의원들과 함께 15개 그룹 여성들이 다시 모인 후 다른 그룹과 섞여서 또 다른 의견을 나누었다. 참여자들의 조별 발표가 있은 후, 여성의원들이 이에 대해 4년간의 활동을 통해 반영해 나갈 것을 공개적으로 다짐하면서 퍼포먼스가 마무리되었다.
정책조언리스트를 담은 소책자에는 예를 들어, “인문학 강의, 이런 것 정말 듣고 싶지만 일하는 시간이라 어려워요. 이런 것에 신경 써 주지 않으면 소외계층은 더욱 소외 되는 것 같아요.”라는 희망근로 참여여성의 ‘수다’가 ‘저소득층 여성들이 접근하기 쉬운 시간대와 장소에서의 문화예술 강좌, 인문학 강좌 등 기회 제공 확대’라는 정책언어로 변화되어 정리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리스트들은 안양시 여성의원들에게 전달되었다.
학운공원에는 공공장소에서의 수다모임을 기록한 사진이 잔디밭과 수잔 레이시의 오두막 공간 <우리들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들의 방>은 안양여성들의 소통공간으로 설치되었다.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뿐만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목소리를 나눌 수 있는 ‘우리들의 방’이 필요하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 변화해야 할 때
▲ LA에서 발생한 일련의 여성 강간 살인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이에 대한 매스컴의 선정적 보도를 비판한 수잔 레이시와 레슬리 라보위츠의 퍼포먼스 <애도와 분노 속에서> (In Morning and in Rage, 1977)
이 프로젝트는 전시기간이 지나도 여성 아젠다 발굴과 제안을 통해 정책수립과 안양 여성의 지속적 연대까지를 이끌어내는 것까지 목표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수잔 레이시가 그녀의 저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그리기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Seattle, Bay Press)에서 밝힌 “얼마나 공공연히 의도를 드러내는가는 미술가들마다 모두 다르지만 만일 그들이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 왔다면, 그 경우 지속성이 미술가의 책임감과 작업의 성공 양자 모두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수잔 레이시는 프로젝트를 마친 후 일다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의미에 대해 재확인했다.
“나의 스승인 앨런 캐프로(Allan Kaprow)는 ‘예술(Art)이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beauty making)이 아니고, 의미를 만드는 것(meannig making)’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선생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예술을 만든다(making art by for and women)’고 말씀하셨다. 그 둘을 합치면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의미 만들기’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 여성의 의제가 되고 있다."
도시 디자인과 공공미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시사점을 던지는 말이다. 수잔 레이시의 작업은 아직도 미술을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으로 박제하고, ‘공공미술’을 어쩔 수 없이 배정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거대한 고철 덩어리를 만들어 세워놓는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미술가와 주민이 기획, 제작, 설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공동으로 작업하며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보장하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이러한 개념이 우리에게도 확산, 정착된다면 지역사회 내의 소통이 보다 원활해지고 문화민주주의로 변화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작성 : 이충열 / 통역지원 : 임수경 *일다는 광고 없이 운영됩니다. "일다의 친구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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