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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괜찮을 거라는 예감 혹은 믿음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13.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스님이 우려내 주신 발효차를 한 모금 마신다. 찻잔 속에서 찰랑이던 안온함이, 차 한 모금과 함께 내 안으로 쑥 들어온다. 뜨끈한 방바닥 위에 엉덩이를 붙였어도 쉬이 가시지 않던 한기가 그제야 한 발자국 물러서는 듯하다. 몸이 노곤해진다. 스님만 허락하신다면 방 한쪽에 놓인, 날렵한 턱 선을 자랑하는 작은 부처님 상 앞에 누워 한숨 자고도 싶다. 아니, 찬바람 스며드는 문 옆에 앉아 가만히 벽에 등을 기댈 수만 있다면. 그러면 잠보다 더 달고 깊은, 사락사락 눈 쌓이는 소리에 취할 수 있을 텐데.
 
금대암에다 가려다 안국사에 머물다
 


▲ 새 해 첫날, 금대암 가는 길 위에서.     ©자야 

새 해 첫날 아침, 나와 K는 군고구마와 두유와 초콜릿을 챙긴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남들처럼 해돋이를 보겠다고 일찍부터 서두른 건 아니다. 굳이 떠오르는 해를 보기로 작정했다면 가까운 백암산에 오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해를 맞는 장엄한 의식이라기보다, 그저 타박타박 걸으며 제 속을 조용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쌀가루처럼 화르르 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군내버스터미널로 가서 마천행 버스에 오른 것이 열시쯤. 오늘 우리의 행선지는 금대암이다. 금대산에 위치한 금대암은 천왕봉을 비롯해 지리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풍광이 무척 수려하여 함양군에서는 '금대지리'라는 명칭을 붙여 함양 8경 중 하나로 소개하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산사태로 문을 닫은 마천 중학교로 들어섰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이 학교 뒤편에 금대암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는데. 그러나 포클레인으로 험하게 파헤쳐진 운동장 곳곳을 둘러봐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어, 우리는 산길을 포기하고 대신 차가 다닐 수 있게 포장된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체국과 경찰서와 크고 작은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마천면의 번화가를 지나 남원시 산내면 쪽으로 난 차도를 따라 몇 십 분간 걸으니, 금대암으로 접어드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경사가 급하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금세 허리는 휘고 등줄기에선 촉촉이 땀이 배어 나온다.
 
운동 부족인 내게는 이 정도 길도 벅차다. 애초의 목적은 타박타박 걸으며 제 속을 음미하는 것이었는데, 음미해야 할 마음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고는 오직 내 가쁜 숨소리와 둔중한 발의 움직임뿐. 하여 나는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숨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알아차리기로 한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다시 흩날리기 시작한 싸락눈으로 눈앞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걸은 것일까. 또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것일까. 뭐라도 눈에 띄었으면 하는 순간, 마침 길이 두 갈래로 나뉘고 그 사이에 표지석이 서 있는 게 보인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바위에 안국사 입구라 쓰여 있다. 왼편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 절이 하나 있다는 얘기. 그러면 금대암은? 바위 위편으로 놓인 이정표가 금대암까지 1.3킬로미터 남았음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제 겨우 반밖에 못 올라왔다는 허탈함과, 무엇보다 극심한 피로와 배고픔에 지친 나는 지체 없이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만약 K가 내 등에 대고 "금대암에서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기르자더니?" 같은 말로 놀리기라도 하면 최대한 큰소리로 "호연지기도 식후경"이라고 당당히 응대할 참이었는데. 다행히 그는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그게 내심 고마웠다.
 
무얼 먹고사냐건, 웃지요
 
절에 들어선 우리는 문이 굳게 닫힌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요사채처럼 보이는 건물 툇마루에 앉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미지근해진 두유로 목을 축여가며 먹는 고구마가 절밥 못지않게 맛있었다. 그런데 스님 눈에는 한데서 그러고 있는 중생 둘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방으로 들 것을 권했고, 덕분에 우리는 따뜻한 방에서 투명한 유리문 밖으로 내리는 눈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안국사는 관광객이 들지 않는 조용한 곳이라 했다. 등산 좋아하는 이들은 폐교된 마천중학교 뒤로 해서 금대암에 오르고, 관광버스 타고 온 이들은 금대암까지 곧장 올라갔다 내려간다는 것. 그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인지, 스님은 이 한겨울, 그것도 차 없이 예까지 걸어온 남녀를 궁금해 하셨다. 더욱이 우리가 함양에 산다고 하자 스님은 더 큰 호기심을 내보이며 젊은이들이 시골엔 왜 내려왔는지, 무얼 해서 먹고사는지, 형편이 어렵진 않은지 등등을 물으셨다.
 
대충 사정을 듣고 난 스님은 어쩐지 우리가 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골은 씀씀이가 적어서 각자 조금씩 벌어도 된다고, 텃밭에서 나는 걸 주로 먹으니 식비로는 큰돈이 안 든다고 말씀드려도, 지금은 둘 다 젊고 애가 없으니 가능하지만 몸이 쇠하고 혹 아이까지 생기면 그땐 어떡하느냐고 반문하셨다. 이에 우리가 속없이 웃기만 하자 '허허. 두 분은 배낭여행 다니는 듯이 사시는구먼. 그것도 좋지.' 하셨다.
 
스님은 배낭여행 하듯이 산다고 부드럽게 표현해 주셨지만, 보통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이를 보고 흔히 '무개념 무대책으로 산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시골에 내려오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거기서 무얼 먹고사느냐'다. 이에 내가 이러저러하게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또한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기 일쑤다.
 
이런 질문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나라고 그런 걱정과 불안이 없을 리 없다. 말로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거나 여름이면 양파 캐고 겨울이면 곶감 포장하는 일을 해서라도 먹고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런 일이라고 어디 쉽기만 할까. 기회만 되면 잘난 척하며 머리를 꼿꼿하게 쳐드는 에고 의식과 허약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육체가, 그런 노동을 기꺼이 받아들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골에서 무얼 먹고사느냐, 그렇게 불안정해서야 과연 오래 살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 또한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도시에 사는 당신들은 그러면 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놓지 못하는지. 과거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소비하고 있음에도, 왜 정작 당신들이 느끼는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낮을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게, 과연 당신들의 진심인지를.
 
걸음마 단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K는 이태 전에, 그러니까 지난 해 말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나마 그중 반을 떼어 생활비로 쓰던 터여서 둘 중 한 명은 걱정을 할 법도 한데, 나도 그도 걱정은커녕 기차 타고 눈 구경하며 놀러 다닐 생각에 들떠 있다. 적으나마 내가 벌고 있으니 당장 굶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그가 곧 일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인가.
 
어쨌거나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가뜩이나 나를 철없는 아이 보듯 하는 그들의 눈빛은 한심함을 넘어 안쓰러움으로 바뀌곤 한다. 너 대체 왜 그래, 닦달해서 빨리 일을 구하게 해야지, 하는 충고도 물론 잊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진 몰라도,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나만큼 출퇴근을 적성에 맞지 않아 하는 그가 꼬박 2년을 버틴 점이 고맙고, 일이든 여행이든 툭하면 거리를 만들어 바깥출입을 하는 나와 달리 집과 직장을 오가며 붙박이로 생활해 온 그의 공로를 또한 높이 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리가 시골에서 함께 살기로 한 근본적인 이유와 원칙을 쉽게 무시하고 싶지 않다. 그건 바로 도시에서처럼 먹고사는 것 하나에 온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는 것, 그 대신 지금 이 순간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충분히 느끼고 즐긴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비적이고 분절된 삶이 아닌 창조적이고 서로 연결된 삶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삶이 지속되기를 감히 꿈꾼다고 할까.
 
우리 두 사람이 느끼는 삶의 질, 그리고 행복감은 과거에 비해 확실히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궁극적으로 꿈꿔 온 삶을 현재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건 그저 자연 속에서 슬렁슬렁 산책이나 하고 집 앞 텃밭 조금 가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최소한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해야 함은 물론, 주변 이웃들과 문화적으로나 영적으로 함께 나누며 성장하기 위한 보다 견고한 준비가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겨우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하는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게으른 탓인지 더 힘을 내 똑바로 걸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있다. 한참 부족한 지금 이 상태를, 왠지 모르게 좀 더 즐기고 싶다고 할까. 무엇을 더 구하고 찾고 애쓰기 이전에(그래야 할 때가 분명 오긴 올 것이나), 지금은 그저 이 자리에 있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경이감에 더 깊이 빠져들고 싶다 할까.
 
너도 좋구나, 나도 그런데
 
▲ 예정에 없이 찾아간 절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올 한 해도 이대로 좋으리라는, 근거 없는 예감 혹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 자야 

 
차를 몇 잔 마시고 혼곤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나는 K와 스님이 얘기하는 사이 밖으로 나와 툇마루에 앉았다. 그러자 마루 아래 누워 있던 흰둥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와 내 손등을 쓱쓱 핥아댄다. 눈을 뜨고 그 개의 맑은 눈에 비친 나 자신을 본다. 그도 내 눈에 비친 자기를 보는 듯하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사이에 이런 말이 오고가는 게 느껴진다. "너도 지금이 좋구나. 나도 그런데."
 
그러고 보니 주위의 모든 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 좋음을 알겠다. 벗어놓은 등산화와, 그 속을 파고드는 눈송이와, 안국사 마당을 가로지른 두 개의 자동차 바퀴와, 개의 뜨거운 혓바닥과 그걸 느끼는 나의 차가운 손등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것은 절을 나와 하산하는 우리 두 사람의 배낭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 이유는 스님께서 시주로 들어온 떡과 빵과 과일 등속을 넉넉히 싸서 건네주신 덕분이다. 이 또한 걸음마 단계에 있는 가난한 귀촌 남녀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요, 행운이 아닐는지.
 
그러므로 나는, 우리는, 당분간 이대로 살기로 한다. 가진 것 없고 아직은 변변한 계획조차 없지만, 왠지 올 한 해도 잘 지낼 수 있을 같은 이 예감이 꽤 그럴싸하게 느껴지기에. 그래서 일단은 믿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자야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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