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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3) 

[연재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목도리밖에 뜰 줄 모른다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목도리만 떠본 건 아니다. 중학교 방학숙제로 벙어리장갑을 뜨기도 했지만, 짝짝이 손가락에 무늬도 서로 맞지 않아 실망한 뒤로 장갑은 다시 뜨지 않았다. 지난주에 뜨던 목도리는 모자를 풀러 뜬 것이어서 길이가 너무 짧아, 이번에도 완성하지 못한 채 다시 밀쳐놓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조끼를 뜬 적도 있다. 아이를 낳은 바로 그 해, 시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뜬 아기의 털조끼! 그해 가을, 시어머니의 생신에 맞춰 시댁을 방문했을 때,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시누이는 내게 실까지 쥐어 줘가며 뜨개질을 권했다. ‘뜨개질은 못한다’고 거절하는 내게, 그녀는 자기가 가르쳐 줄 테니 제발 아기에게 털조끼를 떠주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엄마가 손수 아이의 옷을 떠주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그 말에 솔깃해 기어이 뜨개질을 시작한 걸 후회하며, 겨우겨우 완성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해 한 철, 딸에게 조끼를 입혔을 뿐이다. 아기들은 부쩍부쩍 자라기 때문에 그 조끼는 딱 한 철용이 되고 말았다. 난 그 조끼를 아이의 작아진 다른 옷들과 함께 언니에게 주었다. 당시, 언니는 3년 전에 결혼을 했지만, 출산을 미루고 있던 터였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조카에게 입히라며, 작아진 옷들을 챙겨 언니에게 주고 난 뒤, 난 그 조끼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 딸에게 떠준 조끼.     © 윤하 
 
그러다가 몇 년 전, 이민을 간 언니가 떠나면서 내게 봉지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내가 가지고 있던 건데……. 이제, 너를 줘야겠다. 네가 뜬 조끼야. 나중에 00이를 만나면 주려고 가지고 있었어.”

그 봉지 속에는 내가 딸에게 떠준 바로 그 조끼가 담겨 있었다. 언니는 내 딸을 생각하며, 십 수 년 째 그 조끼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몇 년 전 딸을 만나게 됐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해졌을 때, 막내동생은 딸의 아기 때 모습이 그려진 스케치를 내보이며 반가워했다. 그것은 동생이 직접 그린 것이었는데, 나중에 내 딸을 만나게 되면 주려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자매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내 딸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내 상처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가족 모두의 가슴속에 내 딸과 관련한 상처와 그리움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물론, 나는 딸에 대한 감정을 그녀들에게 말한 적이 없다. 다른 자매들 역시 내 앞에서 딸에 대해 화제 삼지 않기에, 난 그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카를 만나면 줄 거라고, 오랜 세월 뭔가를 간직하고 있는 그 행위 속에서, 또 그 물건들 속에서 난 우리의 상처를 읽는다. 나만의 상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상처는 가족 모두의 상처였다는 걸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나는 옷장 깊숙이 넣어놓았던 아이의 털조끼를 꺼내 보았다. 이 조끼는 내가 떴지만, 내 마음의 물건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건 바로 언니의 조카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언니의 물건임에 틀림없다. 늘 나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벌써 오래 전부터 자매들과 함께 딸을 만나러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니, 더 씩씩하게 딸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정말 딸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잘 뜨는 털목도리를 떠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배시시 웃었다.   윤하 / 미디어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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