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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열네 번째 이야기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달린다. 집과 집을 잇는 좁은 골목길과, 학교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그리고 저마다 작은 가슴에 소원 하나씩 품고 간 낯선 도시의 알 수 없는 길들을.

 
그러고 보니 타고나길 내성적이고 소심하던 나조차도 저맘때는 그랬던 것 같다. 궁둥이로 독한 냄새와 함께 희뿌연 연기를 쿨렁쿨렁 쏟아내는 소독차가 동네 어귀에 나타나면, 그를 쫓아 몰려가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섞여 죽어라 달리지 않았던가. 더운 여름 밤, 물때가 끼어 미끄덩거리는 돌들이 자박자박 밟히는 개천가에서 동무들과 유령놀이를 하다가도 툭하면 겁먹은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집을 향해 도망쳤고 말이다.
 
그녀의 수상한 뒷모습에 대한 기억
 
며칠 전, 서울에 올라간 김에 참으로 오랜만에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았다. 도시에 살 때는 평일 아침 조조영화를 보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는데. 잘해야 여남은 명, 적을 땐 두어 명이 전부인 상영관에 앉아 있으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적막감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고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한 장면

  
극장이 드문 시골에 내려오면서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힘들어진 나는,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기면 아직 소극장의 향취를 간직하고 있는 몇몇 영화관의 상영작 목록과 시간을 미리 검색하곤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영화를 보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번엔 정말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대견한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달리며 성장해 가는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이하 '기적')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영화는 기적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기적이란 물 위를 걷고 산을 옮기는 따위의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인 이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흩어진 가족이 함께 모여 살길 바라고 공부 대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하는, 혹은 딸과 손자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돈벌이를 생각해내려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얹힌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 이면엔, 애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각자가 지고 가는 삶의 고단함이 스며 있다.
 
기적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 또한, 생활이 지닌 일상성과 고단함에서 한 발자국도 비껴 있지 않다. 영화 속 아이들처럼 이 길 저 길을 마구 내달리던, 그러나 그들보다 한층 어렸던 시절.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엄마는 미닫이로 된 마루문을 열고 댓돌 위에 놓인 신발을 꿰차고는 대문 밖을 나서곤 했다.
 
그 늦은 시각에 엄마가 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삐걱거리는 대문 너머, 웅숭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엄마의 등이 유난히 좁고 굽어 보였다는 것만 기억할 뿐. 어린 아이의 눈에도 그 뒷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당시 나는 혼몽한 잠 속으로 떨어지면서도 엄마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엄마의 수상한 등짝과, 그것이 어린 내게 안겨준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이해하게 된 건, 훗날 내가 다른 가족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희미하게 조각나 있는 인상들을 짜 맞출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다. 복원된 기억 속에서 나는 네댓 살의 꼬마고, 아버지는 30대 후반이다. 한창 일해야 할 젊은 나이지만 아버지는 웬일인지 집에만 누워 있다. 원인 모를 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급기야 휴직을 하고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엄마는 병 치료에 용하다는 어느 종교단체의 회당을 밤마다 찾아가 아버지의 치유를 비는 의식을 치른다.
 
물려받은 유산도 없는 가장이 집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딸린 자녀는 일곱이나 된다면, 엄마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게다가 그녀가 겨우 한글이나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의 학력에 집안 살림 말고는 해본 일이 없다면? 지푸라기에라도 의지해 기적을 바라게 되지 않겠는가? 
 
누구나 어두운 밤을 통과한다 
 

 

▲ 이 지구별에서는 누구나 고통의 어두운 밤을 통과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자유의 기회를 얻는다.  © 자야 
 
당시 엄마가 기도하러 다닌 곳이 절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시쳇말로 이단에 왜색종교라 불리는 곳임을 안 나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미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는 엄마를 놀려댔다. 그렇게 농담거리로 삼아 웃어넘기지 않고서는, 너무 이른 나이에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너무 일찍 생활의 무게에 짓눌린 그녀의 청춘이 아깝다 못해 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나 역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할 만한 시간을 건너왔다.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누군가는, 또한 지금 이 순간 그런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이 지구별을 방문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를 한 번쯤은 거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지구별은 육체와 감각과 생각이 자기인 줄 알고 살아가는 에고(ego)들의 별이고, 더군다나 나와 타인, 생사, 빈부, 선악과 미추와 옳고 그름 등의 분리된 이원성에 의해 움직이기에 안팎으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깨달은 이들은 하나같이 강조해 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을수록 돈에서, 명예와 권력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서, 심지어는 생사의 문제에서 조금은 초연해지는 것을 본다. 나라고 여겨왔던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어떤 대상에 대해 내 것이라 생각해 온 집착이 느슨해진 결과다. 이런 사람은 타인 혹은 세계에 대한 감응력은 더 넓고 깊어지는 반면, 정작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더 많이 여유롭고 느긋해진다.
 
그러나 누구나 에고 의식에서 비롯된 고통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를 통해 에고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고통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는 허상과 내 것이라는 집착의 벽을 더 단단하게 쌓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흔히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주가 결코 그(혹은 그의 성장)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하면 말이 되려나.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일들은 고통도 아니고 고통이 아닌 것도 아닌, 그저 '그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성장할 것인가이다. 그에 따라 어쩌면 나는 고통의 늪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수도 있고, 반쯤 몸을 드러낸 채 허우적대거나 혹은 조금은 즐기듯 헤엄을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는 그 위로 솟구쳐 사뿐히 건너가게 될지.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에 눈뜨기 

▲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게 빛이 되고 사랑이 됨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기적이 아닐까.    © 자야 

 
영화 <기적>에서 아이들은 어른만큼 아프다.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면서 불안과 그리움에 애가 타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노름에 빠진 아버지로 인해 속이 상하는 아이도 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친구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가족처럼 아껴온 강아지의 죽음도 그들 세계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고통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느 하나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겪는 고통이 저 사람 때문이라며 비난하지도 않는다. 쉽게 대안을 내세우거나 결론을 제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각자가 어떻게 자기 앞에 놓인 생을, 나아가 그 생에 깃든 고단함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을 이해하는 시선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제멋대로 화산이 폭발하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길 희망하던 아이는 가족 대신 더 넓은 세계를 선택하고, 이는 결국 자신의 꿈을 좇는 아버지의 길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강아지가 다시 살아나길 빌던 아이는 점점 몸이 차가워지는 그 강아지를 제 집 마당에 묻어주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되고, 이미 아역배우로 유명해진 친구 곁에서 늘 의기소침해 있던 아이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의지와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들이 애초에 바랐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뭔가 달라져서 돌아온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 뼘 더 깊어졌다고 할까.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더없이 아름다운 기적으로 보였다고 할까.
 
아이들이 언젠가 달리는 것을 멈출 때, 사춘기를 지나고 머리가 굵어졌을 때, 어쩌면 그들은 더 큰 시련과 좌절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가족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누군가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또한 유명한 배우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영영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게 인생임을 알게 된다면, 나아가 인생에는 그보다 더 배우고 사랑해야 할 것이 많음을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지나간 일들이 있어 내가 이만큼이나마 클 수 있었다고, 그러니 감사하다고. 앞으로 닥칠 일들은 또 그 일대로 나를 키울 것이니 그 또한 감사하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게 일어나는 일들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리라. 약속에 늦는 친구, 마감시간에 맞춰 고장 나는 컴퓨터, 발을 밟고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 가뭄에 말라가는 양파 줄기와 추위에 얼어 터지는 수도계량기. 그리고 마당 한가득 내리쬐는 볕과, 그 아래 잘 말라가는 장작과, 무말랭이장아찌를 담가 건네시는 옆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은 것들.
 
이 모든 게 기적임을 잊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도 조금씩이나마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내 생애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기적임을, 언젠가는 알게 될 수 있을까. 언감생심일지언정, 감히 욕심을 부려보고도 싶다. 이게 다 그 영화 때문이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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