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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명의 ‘수국혁명’은 일본을 바꿀까?
매주 총리관저 앞을 가득 메우는 탈핵 금요집회
[매주 금요일 밤 6시,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는 핵발전으로부터 미래를 지키는 일본 시민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일본 전역에서 커다란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탈핵 금요집회가 그것이다. 중동의 민주화혁명인 ‘재스민 혁명’에 빗대어 시민들 사이에서는 ‘수국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작은 꽃들이 한데 모여 큰 꽃을 이루고 있는 수국을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집회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집회를 찾아보기 어려운 최근 일본사회에서 최다인원 20만 명이 참여하는 ‘수국혁명’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주목받고 있다. ‘탈핵’을 요구하는 일본 시민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페민>의 가시와라 토키코씨가 전한다.]
‘핵발전소 필요 없다! 미래를 지켜라!’
▲ 매주 금요일 저녁 6시, 일본 총리관저 앞에는 10만여 명의 일본 시민들이 '탈핵'을 요구하며 자발적으로 모여든다. © 페민
8월 24일 금요일 저녁 7시, 총리관저 앞에서는 벌써 탈핵 집회가 시작되었을 시간이다. 나는 일을 마치고 곧장 총리관저로 이어지는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역에는 이미 많은 경찰이 총리관저 앞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의 계단을 봉쇄하고 있어 집회장으로 향하던 많은 사람들의 발이 묶여 있다. 계단 위쪽에서는 “재가동 반대! 핵발전소 필요 없다!”라는 구호가 들린다. 왜 지나갈 수 없는지를 묻자 경찰이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지상이 혼잡해서 인원수를 제한해 차례대로 가시게 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횡포를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하는 할아버님이 계시기도 했지만, 그곳에 발이 묶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온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듯한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어린이도 있었다. “덥지?”하고 물으니 빙긋 웃는다.
그렇게 10분을 기다린 후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다. 도로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있어 총리 관저가 아닌 국회 정문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 역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린이를 보호하라! 미래를 지켜라!” 구호에 맞춰 드럼 등의 악기가 울린다. 그림과 글씨를 예쁘게 적은 플래카드와 수국을 가만히 들고 있는 여성도 있다. 음반회사로부터 반핵 노래가 담긴 앨범의 발매를 금지 당했다는 록 뮤지션인 고(故) 이마와노 키요시로의 노래를 틀어놓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집회장 외곽을 빙빙 돌며 달려간다. 또한 집회장 내 몇 곳에 자유발언대가 설치되어 집회 참가자들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후쿠시마 현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 왔다.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피폭시키고 말았다. 후쿠시마에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왜 총리는 핵발전소 재가동을 결정했나. 용서할 수 없다.” 자유발언대에 오른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다.
또 다른 한 남성의 호소가 이어진다. “도쿄도 방사능에 오염되어버렸다. 핵발전소에 찬성하는 사람에게든 반대하는 사람에게든 똑같이 방사능이 쏟아지는 것이 핵발전소 사고다.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다”
어린이와 함께 온 참가자를 우선시 하는 구역이 있는 것도 이 집회의 특징이다. 한 살부터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야식을 먹으며 집회에 참가한다. 한 어린이는 “핵발전소를 멈춰주세요. 살아있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주세요”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참가자 하나하나의 생각을 제각각 표현할 수 있는 집회는 밤 8시면 정확하게 끝나고, 참가자들은 다음 금요일 집회를 약속하면서 평화롭게 귀갓길에 오른다.
백 명의 작은 항의가 20만 명의 참여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그 직후의 대형 쓰나미, 그리고 미증유의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 이로 인해 16만 명이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일본 국내의 ‘난민’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방사능 물질은 멀리 300킬로 떨어진 도쿄나 시즈오카에까지 도달, 그 양이 많건 적건 일본 전역이 방사능 물질로 오염되었다. 식탁이나 학교 급식에 오르는 채소와 고기, 유제품, 과일에서도 방사능 물질이 검출된다. 여전히 해양오염의 실태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바다 바닥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고기에서 방사능 오염이 확인되면서 생물 농축에 의해 언젠가 큰 물고기까지도 오염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나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닷새 후에 아이를 낳았다. 출산 전에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나는 태어날 아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아이를 가진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뱃속 아이를 향해 얼른 나오라던 말이 멈춰졌다. 그리고 나에게 되물었다. 입으로는 ‘탈핵’을 말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죽을힘을 다해 핵발전소를 멈추려고 했던가?
동시에 <페민>에서 오랜 시간 탈핵 운동을 해 오신 선배들에게 머리가 숙여졌다. 전문가들이 재차 삼차 지적했던 핵발전소 사고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 입으로만 ‘탈핵’을 외치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사고현장에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사고수습선언’(2011년 12월 16일)을 한 정부에 대한 분노로 말문이 막혔다.
‘사고를 수습했다’는 일본정부는 2012년에 들어서면서 간사이전력 오이핵발전소의 재가동을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고 나섰다.
2012년 2월 8일, 오이핵발전소 3·4호기의 1차 평가를 둘러싼 ‘스트레스 테스트 의견 공청회’가 열렸다. 스트레스 테스트란 유럽연합(EU)에서 열렸던 안전성 확인 테스트를 이르는 말로 이번 경우 핵발전소 재가동을 전제로 이뤄졌다. 하지만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의 원인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안전성 확인 테스트 같은 것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애초에 지진대국 일본과 EU의 테스트가 같을 수가 없지 않겠나.
‘재가동을 전제로 한’ 정부의 기만적인 공청회에 대해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항의를 표했다. 이들은 3월 29일, 240명이 총리관저 앞에 모여 ‘재가동 반대’를 외쳤고 이것이 총리 관저 앞 탈핵 금요집회의 시작이 되었다. 수도권에서 집회 등을 주관하고 있는 단체와 개인이 모여 2011년 9월 설립한 ‘수도권 반핵연합’ 등에 의해 성사되었다.
정부의 핵발전소 재가동 움직임이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4월 6일에는 집회 참가자수가 단박에 천 명 이상으로 늘었다. 그 후에도 점차 참가자수가 늘어 6월 14일 오이핵발전소 소재지인 후쿠이 현 오오이초의 동장이 재가동에 대한 동의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자 그 다음날인 6월 15일 집회에는 마침내 1만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결했다. 6월 22일에는 참가자수가 4만5천명을 넘기고 이윽고 6월 29일, 주최 측 추산 20만 명에 달하게 된다. 총리 관저 앞 4차선 도로 전체가 사람으로 메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재가동 반대’ 물결을 거스르듯, 7월 1일 21시 급기야 오이핵발전소 3호기가 재가동을 시작하고 말았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시민들
▲ 금요 반핵집회의 특징은 시민들이 SNS를 통해 정보를 나누고 자발적으로 모인다는 점이다. 유명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를 비롯해 연예인들의 다양한 참여도 눈에 띈다. 집회는 매번 평화적인 해산으로 마무리 된다. © 페민
오이핵발전소가 재가동 되어도 총리관저 앞의 집회는 멈출 줄을 모른다. 7월 6일 재가동 후 첫 항의집회에는 15만 명, 7월 13일 15만 명, 7월 20일에는 9만 명이었지만, 7월 29일에 열린 국회를 에워싸는 국회포위집회에는 또다시 전국에서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지금도 매주 금요일 밤이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총리 관저 앞에 모이고 있다. 또한 일본 전역에서도 금요일 밤 탈핵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일본에서 이런 규모의 집회는 경이적이다. 1960년대 일-미 안보조약 투쟁에 많은 젊은이가 집회에 참가했지만, 그 투쟁이 정부에 의해 완벽하게 저지당하면서 집회나 사회운동에 대한 일반시민의 기피감이나 혐오감이 심화된 바 있다. 최근에 그러한 흐름을 끊고 가장 시민이 많이 모인 집회는 2003년 이라크전쟁 반대 시위였지만, 이때조차 4만 명이 전부였다.
‘일본의 새로운 운동의 형태’라고도 평가되고 있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거대한 물결에는 많은 연예인도 참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음악가인 사카모토 류이치(영화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유명 작곡가) 씨도 있다. 그는 “관저 앞에 이만큼 시민이 모인 것은 (일미안보투쟁 이후) 40년 만의 일”이라며 “재가동이 된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고 싸웁시다”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운동방식 역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의 평화운동 같은 것처럼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참가자를 동원하는 형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이, 더구나 지금까지 집회에 참가했던 적이 없어 보이는 시민 층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퇴근길의 남녀,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 등 참가자는 다양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7월 6일 총리 관저 앞 집회에 모인 참가자 중 52.3%가 항의집회에 처음 참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8개월 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한 여성은 “핵발전소사고가 있은 후, 핵발전은 필요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이도 있고 해서 집회에 별로 가지 않았지만, 총리 관저 앞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들어 꼭 함께 하고 싶었다. 나처럼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 세 명에게도 얘기해 같이 나왔다”고 말했다.
또한, 퇴근길에 혼자서 참가했다는 여성은 “직장에서는 좀처럼 핵발전소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있다. 집회에서 친구도 생겼다”고 참여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총리 관저 앞 집회에 대해 노다 총리는 처음에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8월 22일, 관저 앞 집회를 이끌고 있는 ‘수도권 반핵연합’ 멤버들이 총리와 직접 만나 요구와 권고를 전달하는 데 이르렀다. 당일 노다 총리와의 반핵연합의 만남은 온라인상으로 실시간 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다.
논의는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이룬 채 끝났다. 수도권 반핵연합은 “지금 같은 폭염에도 전력은 충분하다. 전력이 부족해 원전을 가동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원전 재가동을 즉시 중단하기 바란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노다 총리의 “국민생활을 생각해 재가동했다”라는 주장으로 답했다.
탈핵 물결을 현실정치 무대로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탈핵을 외치고 있는데 정부의 핵발전소 재가동 방침은 흔들리지 않는다. 정부는 2030년의 핵발전소 의존도(0%, 15%, 20-25%)에 대한 공개의견접수를 받았는데, 접수된 8만 8280건의 의견 중 87%에 해당하는 7만 6800건이 핵발전소 ‘제로’를 지지했다. 또한, 핵발전의 대체 수단이 될 재생가능 에너지, 에너지절약 대책에 대해 전기요금 상승이 불가피하더라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39%에 이르렀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탈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정치권이 탈핵요구에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민들은 조만간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선거에서 탈핵을 지향하는 의원을 과반수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도 많은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때마침 센가쿠열도, 독도문제를 거론하며 관심을 일본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치 세력도 있다. 일본사회의 시민들은 이러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탈핵의 물결이 한 단계 더 나아가 현실정치로 이어지도록 하기 운동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번역: 고주영]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독립미디어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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