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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나는 누드모델입니다  
 
그녀는 누드모델이다. 스케치 룸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스케치 연필이나 목탄, 수채화 물감, 파스텔 등을 책상 위에 펼쳐놓는다. 그녀도 천천히 중앙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가운을 벗는다. 전문 모델로서 그녀가 취하는 자세는 다양하다. 그때마다의 약속에 따라 그녀는 단 옆에 서 있거나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단 위에 앉아 있거나 혹은 다리 하나를 앞으로 내밀고 활처럼 등을 구부린 채 엎드려 있다. 두 다리를 길게 옆으로 모으고 2단으로 쌓은 쿠션에 팔 하나를 기댄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계를 맞춰놓고 사람들은 제각각의 표정으로 스케치에 몰두한다. 그들은 집중해서 오랫동안 그녀를 본다. 해부학적 탐색과 미학적 포착의 진지함이 눈에서 손으로, 다시 손에서 눈으로 흐르며 어떤 동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시계의 숫자가 00:00 을 가리킨다. ‘일’이 끝났다. 그녀는 포즈를 풀고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인 가운을 집어 든다.
 
정해진 시간동안 고정된 포즈를 취한 채 예술가들이나 학생들의 ‘뮤즈’가 되어야 하는 그녀의 현재 나이는 75세다. 로리 페쳐스(Lori Petchers) 감독이 만든 6분짜리 다큐 [Life Model](2010)의 주인공이다.
 
이 여자, 75세의 누드모델
 
로리 페쳐스는 다큐 감독 그리고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지속적으로 여성, 나이듦, 트랜스/젠더, 모녀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Life Model]은 다큐영화지만 한 편의 시적 비디오 아트처럼 만들어졌다. 주인공인 75세 누드모델 여성의 내레이션, 사진, 음악, 스케치 룸의 광경 등이 잘 어우러져 맑고 아름다운 한 편의 초상화가 탄생했다.  

 

▲  75세의 누드모델 이야기를 담은 로리 페쳐스의 다큐멘터리  [Life Model] 
 
제작 상의 이러한 특징은 75세라는 나이와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을 가능한 심미적으로, 즉 사람들의 자발적 감흥을 유발시킬 수 있는 형태로 연결시키려는 미학적 고려의 결과일 것이다. 심미적 감흥이야말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상투적인 선입견을 흔들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말없이 질문을 던진다. 자, 이 여성을 보라. 추한가? 외설스러운가? 혐오스러운가? 이 여성이 누드모델인 게 뭐 이상한가? 잘못되었나?
  
드로잉으로, 수채화로, 유화로, 부조로 다시 태어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리고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빚어낸 그녀의 모습은 그녀를 담고 있지만, 더 이상 그녀만은 아니다. 그녀를 만나고 담아낸 그들 자신의 내면, 감성의 결, 손의 터치 또한 생생하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 그러다 그려진 나를 보면 참 달라. 꼭 내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바로 나야.”
 
관람객인 우리 또한 이렇게 새로 태어난 여러 개의 다른 그녀를 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와 표현된 그녀를 번갈아 본다. ‘표현된’ 그녀는 관람객인 나를 한결 편안하게 해준다. 더 오래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차츰 그녀의 벗은 몸이나 ‘표현된’ 몸 둘 다를 처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깃든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재현이라는 단어 대신 표현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표현이야말로 이 ‘아름답다’는 느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된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몸일까. 아니면 그녀를 표현한 사람들의 형상의지일까.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느낌이고 어떤 판단인가. “어떤 그림에선 75살 늙은이는 다 죽어가는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 다 드러나, 그러나 어떤 그림은 정말 아름다워.” - 이 상이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이와 숫자만 따지는 세상에서 75세의 ‘늙은 몸’이 누드모델이라는 사실 자체가 낯선 충격이지만 그러나 이 기록영화가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 자체다. 이 질문은 특히 ‘누드’라는 장르를 경유해 제시되기에 더 흥미롭다.
 
누드와 나체 그리고 헐벗은 몸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의 몸인 ‘벗은 몸’은 세 가지 형태의 의미망과 관련된다. 누드(nude)와 나체(naked), 그리고 태어난 대로의 자연적 단순상태(bare). 누드는 무엇보다 ‘포즈’와 연결된다. 포즈를 취하지 않는 누드란 없다. 그리고 포즈는 ‘~ 앞에서’ 취해진다. 포즈란 말하자면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화적 옷, 혹은 장치 같은 것이다. 예술사에서 모든 누드는 관습이고, 바로 그 관습에서 누드화의 권위가 생겨난다. 누가 누구 앞에서 왜 누드로 포즈를 취하는가, 에 대한 공공연한 혹은 암묵적인 규범의 맥락이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벌거벗은 몸, 즉 나체가 된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옷을 벗을 때 그것은 나체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는 누드촌이 아니라 나체촌이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대로의 자연적 단순상태라는 의미의 벗은 몸은 헐벗은 삶과 연관된다. 헐벗은 삶, 이 삶은 법의 보호 밖에 있는,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한 삶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 헐벗은 삶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드러난 건 파시즘이 세운 강제수용소에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벗은 몸의 이 세 가지 의미망을 염두에 둘 때 노년여성(혹은 노년남성)의 벗은 몸은 누드에서는 멀고 나체나 헐벗은 몸에는 가깝다. 노년에 접어들면 누구나 다 저절로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고 보다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타자/성 앞에 드러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명을 진보와 동일시하고 떠받드는 이 사회가 노년을 진보와 발맞추지 못하는 비문명적인 (잘 봐줘야 덜 문명적인) 존재로 범주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노년의 벗은 몸이나 삶이 헐벗은 몸에 가깝다는 것은, 슬프게도,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자명한 사실이 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년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기본적인 일상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노년들. 쉽사리 학대와 폭력, 분노의 대상이 되는 노년들.
 
그러나 언론이 주로 보도 대상으로 삼는 쪽방 ‘독거노인’만이 헐벗은 삶에 내던져진 것일까. 노년 자체가 점점 더 회피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현재의 문화적 틀 내에서는 모든 노년의 삶이 잠재적으로 헐벗은 삶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독거노인’에 대한 보도들은 노년 1인가구의 삶을 공론화시키는 대신 ‘독거노인’의 낙인을 낳을 뿐이다. ‘고독사’한 사람은 쪽방에서건 80평 아파트에서건 헐벗은 삶으로 인지된다.
 
남성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한 누드화의 관습  


 

▲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7-1538) 
 
다시 누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예술사에서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누드화에서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여성이다. 예술사의 누드화에서 여성은 남성 주체의 관음증적 쾌락을 위해 포즈를 취한다. 여성이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할 때, 그 행위가 대상화의 덫에서 벗어난 상호-응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그토록 오랜 관습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누드화가 얼마나 관습적인 장르인지, 그 역사가 얼마나 긴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다. 고갱의 <저승사자의 응시>(1892), 마네의 <올랭피아>(1863), 그리고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7-1538)와 그리스 신화 속의 비너스가 서로 맺고 있는 연쇄 고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승의 연쇄는 신화 속의 한 여성 이미지를 남성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남성 고객들’을 위해 차용, 전복, 전유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비너스라는 용어를 차용함으로써,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관람자를 ‘향해’ 정면으로 ‘사랑스런’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여자가 ‘여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티치아노가 그린 여자는 당시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였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바로 그 이중 모럴을 비웃으면서 ‘창녀로서의 실존’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정면에 세운다. 뭇 남성(예술가)들의 연인으로, 모델로, 섹스 파트너로 살던/노동하던 허다한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는 이 ‘올랭피아’는 그 시선의 대담함 때문에 많은 남성들의 분노를 샀다.
 
고갱이 <저승사자의 응시>에서 그린 침대 위의 흑인 여자는 당시 유럽에 불고 있던 원시성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다. 백인 남성주체들의 원시성 갈망을 위해 동원된 이 검은 ‘토착여성’은 아예 얼굴을 돌리고 엎드려 있다. 백인남성에게 백인여성이 타자라면 토착여성은 타자 중의 타자일 것이다. 원시성에 대한 향수와 타자성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새겨진 백인 남성의 성적 욕망이 토착여성의 얼굴을 돌리게 하지 않았을까.
 
티치아노와 마네, 그리고 고갱의 그림은 이처럼 누드화의 관습에 기대어 서로에게 해석의 맥락을 제공하며 권위를 부여한다. 도발하든 차용하든 권위는 손상되지 않으며, 누드모델은 여성이고 그리거나 보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성별 분업도 달라지지 않는다. 사진의 기술이 가져온 변화에도 이 공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누드모델이 섹시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전제는 더 강화되었다.  


 

▲  고갱의 <저승사자의 응시>(1892) 
 
그래서 우리는 [Life Model] 같은 미학적 작업과 이 다큐가 그려내는 75세 누드모델 여성의 초상화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녀는 오랜 시간 누드모델을 서 온 전문인이다. 그녀는 포즈를 취할 줄 안다. 나이가 많아서 대가를 적게 받거나 아마추어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고 해도 그녀는 누드화의 오랜 전통 안에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남성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누드모델 일은 모험과 실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누드화의 견고하고 오랜 관습을 흔든다. 그 관습 안에서 관습의 기본 토대나 조건을 바꾸면서 어떤 질문 하나를 솟아오르게 한다. 그 질문은 실존주의적이고 윤리적이다. 그래서 아주 소중하다.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몸을 집중적으로 오래 응시한다면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게’ 될까.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 바로 이것이다.
 
Life model
 
“몇 달 전에 신문에서 광고를 하나 봤다. ‘데생 수업에 누드모델 구함. 시간당 15달러.’ 너무 좋은 내용이었다. 이게 진짠가 싶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쳐다본다니.”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에서 주인공 레오 거스키가 하는 말이다. 그는 이민자고 아주 많이 늙었고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바로 위층에 살고 있는 고향 친구 브루노가 유일하게 서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는 친지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그는 지갑에 “내 이름은 레오 거스키이며 가족은 없습니다. 파인론 공동묘지에 연락해 주십시오. 유대인 구역에 제 묘지가 있습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적힌 쪽지를 넣고 다닌다.
 
“데생 수업에 모델로 서기로 된 전날 밤이 되자 마음이 긴장되고 흥분되었다.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속내의도. 팬티도. 양말만 신고 긴 거울 앞에 섰다. 건너편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전구의 줄이 머리 위에 매달려 있었지만 잡아당기지 않고 그냥 어두침침한 가운데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잘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다음날 주소를 들고 데생 장소를 찾아가는 그에게 회의와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렇게 멍청하다니. 내가 셔츠를 벗고 바지를 내리고 그들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어도 그들이 고개를 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맥류가 튀어나온 내 다리와 털이 숭숭 붙어 있는 축 늘어진 불알을 보고, 또, 스케치를 시작한다고? 그런데도,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난간을 부여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욕망과 무관하게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것은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훈련 같은 것이다. 욕망이 일렁일 때 우리는 (예의상) 안 보는 척 하면서 훔쳐보거나, 앞의 누드화 관습에서처럼 (알리바이를 세워놓고) 노골적으로 본다. 욕망이 전혀 일지 않을 때, 그것도 특히 ‘헐벗은 삶’을 마주했을 때, 악의적으로 모욕을 주거나 폭력을 휘두를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를 알고 싶으면 그/녀에게 머무는 시선이 얼마큼인가를 살피면 된다. 오래 집중적으로 보는 것은 가벼운 호기심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비로소 실체를 느낄 수 있기까지 연습하는 거다. 실체란 봄과 보임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실체는 유일무이한 하나지만 그 하나의 진실은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속에서 삶을 살아낸 몸  

 

▲  로리 페쳐스의 다큐멘터리 [Life Model] 한 장면. 
 
[Life Model]을 보면서 품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짐작컨대 그녀는 반복적으로 이 질문들과 맞닥뜨렸을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모델 일을 했는가. 이 나이가 되도록 누드모델을 하고 있는데, 누드모델올 한다는 게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 당신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가. (아마도 이 질문은 ‘당신은 그 나이에 누드모델을 서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 수치스럽거나 부담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의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누드모델이 된다는 건 치유(therapy)같은 거야.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거든. 내가 괜찮다는 걸 알려줘. 예쁘고 젊은 모델들이 있어도 상관없어. 내겐 내 영역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리길 원하고 나는 모델을 서지. 그들도 나에게 주고 나도 그들에게 주는 거야. 나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내 두 다리와 두 팔, 두껍든 어떻든 이건 내 몸이야. 모두 내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게 평등하게(equal) 느껴져. 난 인생을 통해 배웠어. 인생을 통해 배우는 거, 누구나 그럴 수 있어야 해.’
 
이쯤에서 왜 다큐의 제목이 “Life Model”인지 생각하게 된다. 긴 시간 속에서 삶을 살아낸 몸은 이미 누군가를 위한, 누군가를 향한 삶의 모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평등이라는 정의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미학을 지각에 관한 사유로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 무엇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합의고 문화적 관습이다. 이 모든 것에 윤리적 태도가 관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의 아름다움은 ‘나’와, 나를 바라보는 ‘너’의 ‘사이’에 있다. 문제는 발견이고 만남이다. ‘너’는 너를 ‘향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 ‘나’를, 표현되고자 하는 나의 ‘무엇’을 발견하고 만나야 한다. 그것을 발견하고 만나서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나 ‘너’에게 달려 있다. ‘나’에게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너’만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표현되고 드러난 ‘나’라는 존재의 마침표 같은 것이다.
 
표현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나’의 무엇과 그것을 표현하는 ‘너’의 심미적 선택과 결정. 모든 미학적 생산은 이처럼 두 개의 표현 국면을 품고 있다. 이 두 개의 표현 국면이 제대로 만났을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것은 느낌이기에 강요된 강령과 다르다. 느낌이기에 자발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정치가 얼어버렸을 때 미적 시도들이 해방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늙은 몸이 보내는 시선을 외면하고, 늙은 몸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으려 하는 경향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그 외면은 자신의 ‘아직 젊은 몸’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저 늙은 몸에 대한 두려움의 투사다. 자신의 타자적 모습, 마주보고 싶지 않은 그 모습이야말로 그러나 자신의 전 생을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저장소다. 이 기억의 저장소에 두려움이나 분열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학적 시도들, 문화적 연습들이 더 많이 고안되어야 하는데!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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