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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런던으로의 시간 여행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나의 첫 기타선생님 

 

‘길 위의 음악가’가 되어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내의 기록. 

 

 

▲  나의 첫 기타선생님 B(우측)와 함께.    © 이내 
 

“야, 니가 여기 왜 있노?”

 

부산에서 익숙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쳤다. 런던에서 함께 살던 B다. 연말이면 한국에 잠시 들어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는 둘 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며칠 전 그녀를 떠올렸더랬다.

 

사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이 난다.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2007년의 크리스마스.

 

유럽의 연말은 한국의 구정과 비슷할까.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가, 일년의 피로를 풀러 여행을 떠나버려서 도시가 텅 빈다. 심지어 런던의 크리스마스 하루 동안에는 모든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는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따라서 나 같은 유학생들은 밖에도 못나가고 좀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게 될 수도 있다.

 

당시 학교 앞 카페에서 일하던 한 한국인 친구가 나에게, 자신은 못 가지만 자기 친구 B의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대중교통이 없으므로, 그 말은 하루 전날 잘 모르는 친구의 집에 가서 이틀을 자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외로움이 용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인지, 나는 이틀 분의 짐을 챙겨 알려준 주소로 B를 찾아갔다. 단정하고 세련되게 정리되어 좋은 향기가 나던 그녀의 넓은 거실방도 인상적이었지만, 부엌에 준비된 3일동안 먹을 음식의 재료들에 감탄했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여성스런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의 압권은 테이블 위에 높이 쌓여있는 DVD들이었다. (대부분 고전예술영화이거나 듣도 보도 못한 동유럽 영화들이었다.) B는 그것들을 일러 ‘숙제’라고 말했다. 전공은 음악이었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숙제라고 부르는 그녀의 유머 코드가 맘에 들었다.
 

▲ B와 걸었던 런던의 한 공원에서.     © 이내 
 

여행을 떠났다가 예정보다 빨리 돌아온 그녀의 친구 D가 합류했다. 처음 만난 그녀들과 음식을 지어먹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 것도 안 하기도 하고, 또 숙제들을 함께 보았다. 그렇게 나는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그녀들은 이후 런던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이후에도 B의 거실 방으로 자주 여행을 갔다. 그곳은 찰스 부코우스키와 주앙 질베르토와 스킵 제임스와 안나 카리나와 파스빈더가 있는 세상이었다.

 

몇 달 후, 나는 B의 옆방으로 이사했다. 노란색 벽의 작은 방이었다. 그 집에 살면서 나는 카페와 일식집, 초콜릿 가게들에서 일하다가 돈이 좀 모이면 여행을 떠나고, 돌아와서 다시 일을 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어딘가 좀 지쳤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좀 무서웠던 그 무렵, B와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그녀는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타를 팔겠다고 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뜬금없이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한 기타였다. B는 그러니까 나의 첫 기타 선생님이었는데 기타 프렛에 왼손을 익숙하게 하는 연습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그게 다였다. 그 이상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유튜브(youtube.com)에서 노래를 찾아 일단 많이 듣고서 곡이 익숙해지면 손가락 모양을 따라 연습했다. 한 곡을 완벽하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하고, 녹음을 하고, B에게 보여주고, 블로그에 올렸다. 그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너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답글을 달았다. 별로 잘 지내지 못하던 나는 다음 곡을 또 연습하고, 녹음하고, B에게 보여주고, 블로그에 포스팅 했다.

 

그렇게 한 열 곡쯤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5년쯤 시간이 흘렀고, 지금 나는 ‘길 위의 음악가’라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부르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  런던에서 B와 함께 걸었던 거리.   © 노래 짓고 부르는 이내 

 

B가 런던으로 돌아가기 몇 일 전,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는 나의 첫 기타 선생님이라며 깍듯하게 대했다. 몇 시간 같이 있다 보니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불현듯 런던에서 함께 걸었던 거리들도 지나가고, 이곳 저곳에서 나누었던 별것 아닌 대화들도 생각났다. 무엇보다 우린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들을 많이 함께했던 것 같다.

 

현재 런던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고, 다시 음악을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언니와 함께 아무 것도 안 하던 시간들이 생각해보면 가장 재밌었다’고, 말수가 적은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있어야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나의 첫 기타 선생님으로부터 이번에는 들어야 할 음악 리스트를 잔뜩 받아서 돌아왔다. ‘예전에 네가 전해준 음악을 꽤 성실히 듣는 학생이었다’ 라고 생색을 냈다.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나면 성실히 ‘숙제’했다고 자랑할 거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는 그녀의 새 음악도 꼭 듣고 싶다. ▣ 이내 (싱어송라이터)  
 
* 이내의 2집 앨범 선(先)주문하는 방법 http://blog.naver.com/bombbaram/22017645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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