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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오지 못한 수상자를 생각하며
-이내의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일단, 그냥, 같이”
‘인연’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좋아한다. 소녀 시절 피천득의 수필을 읽고 베껴 써서 친구에게 건네 주던 그때는, 하지만 아직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예상할 수 없는 여행처럼, 예상할 수 없는 인연들이 겹겹이 쌓이다가 어떤 순간들을 맞이하는 벅찬 기분을 자주 경험하고 나서야 ‘인연’의 비밀이 손에 조금씩 잡히는 듯하다.
‘나까’와 ‘문교동 바이올린’과 나, 우리의 합주
▲ 나까와 '문교동 바이올린'과 나,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무대에 선 첫 공연 포스터.
나까(nacca)는 일본에서 온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나는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에 나오는 ‘그래? 아님 말고!’ 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히요’라는 친구와 ‘생각다방 산책극장’을 만들어 사소한 작당들을 시작했다. 그리고 부산에 온 나까를 무작정 만나러 갔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의 히요는 하지메씨가 시작한 재활용품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이 있는 도쿄에 방문했다. 그리고 여러 ‘아마추어의 반란’ 가게들 중 하나인 ‘난또까 바’에서 일하던 뮤지션 나까를 만나게 된다. 몇 년 뒤 나까는 부산에 와서 살게 되었고, 일본에 있던 가게와 비슷한 컨셉의 채식 식당인 ‘나유타 카페’를 열었다.
‘난또까 바’의 컨셉은 일주일에 2, 3일씩 다른 쉐프가 각기 다른 음식을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나까가 부산에서 문을 연 ‘나유타 카페’도 같은 방식을 도입했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의 히요는 ‘나유타 카페’의 월요일 쉐프가 되었다. 그리고 나까는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나는 ‘나유타 카페’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건 지난 4년간 일어난 일이다.
‘문교동 바이올린’은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나와 히요와 함께 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내가 서른이 되어, 고향이지만 오랫동안 떠나있어 낯설었던 부산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고교동창 친구의 소개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음악을 전공했고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진 건 알고 있었지만, 바이올리니스트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몇 년 후 그녀가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함께 지내게 되고, 우리가 월세를 마련하기 위한 “매달 무사히”라는 이벤트를 열면서,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기회들이 생겼다. 사실 그녀는 음악을 거의 끊었다가(?), 전혀 음악과 상관없이 살던 내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무대에 자꾸 서는 모습을 보며 다시 바이올린을 연주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스스로 ‘올 해는 10번의 공연을 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는데, (내가 1집 앨범 <지금 여기의 바람 O Vento Agora Aqui> 11번 트랙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던 그날의 비밀들”이라고 노래했듯이)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무대에 설 기회들이 계속 찾아왔다고 했다. 이 모든 일들은 역시 지난 4년간 일어난 일이다.
▲ 2014년 10월 12일. 나까(오른쪽)와 '문교동 바이올린'과 나의 첫 합주 무대. © 이내
최근에 나는 나까와 ‘문교동 바이올린’ 두 사람과 함께 무대에 섰다. 그것이 나에게는 첫 번째 합주였다. 처음 연습하던 날 떨리던 마음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두 사람은 음악을 공부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음악언어를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두 번, 세 번의 합주 연습을 통해 나는 ‘어라, 이거 재미있잖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섰을 때, 혼자 노래할 때는 알 수 없었던 든든한 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세 사람의 조합으로 공연 의뢰가 몇 번 더 들어왔다. 그래서 ‘나유타 카페’에서 열렸던 이벤트에서 따온 “일단, 그냥, 같이”라는 이름을 팀 이름으로 (쉽게) 정해버리고, 우리 세 사람은 꽤 맘에 들어 했다.
“버티고 견뎌서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두 번째로 불러주어 팀 이름을 짓게 만든 공연은, 11월 4일 부산의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에서 준비한 “비밀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다” 라는 행사였다. ‘성 산업, 성매매 스토리와 함께 하는 토크 콘서트’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공연 전에 나까가 말했다. ‘일본에서 페미니즘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성 산업과 관련되어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사실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없잖아요. 오늘 같은 자리는 참 좋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심지어 한국말도 이렇게 잘하는) 나까와 함께 이 무대에 선다는 게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 2014년 11월 4일 부산의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주최 “비밀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다” 토크 콘서트 포스터.
그러나 공연 전, 꽤 긴 시간 스토리 공모에 입상한 작품과 수상자들(성매매 경험자들), 심사위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은 그 무게를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살아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상상하는’ 내 생각보다 더 아팠다. 그리고 상을 받고도 그 자리에 차마 참석하지 못한 그들의 ‘부재’ 역시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까의 말처럼, 피하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꺼내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자리는 결국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따사로운 장소”(나까의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다)에서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온 맘으로 고마운 기억이 되었다.
또한 놀라웠던 것은 지난 몇 년간 부산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인연들이 이번 행사의 주최자로, 진행자로, 심사위원으로, 관객으로 구석구석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이다. 길고 묵직했던 이야기들 속에서 함께 눈물을 닦아주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의 무게를 지탱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리 수상자를 통해 수상 소감을 전한 한 수상자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 버티고 견뎌서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글을 잘 쓰기보다 많이 쓰며 지내겠습니다.’ 아직 오지 못한 그녀를 생각하며, 세상의 수많은 ‘아직 오지 못한 것들’-그러니까 숨겨진 이야기들, 밝혀지길 기다리는 진실, 약한 것들, 아픈 것들, 죽어가는 것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계시’를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차마 아직 오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나 역시 버티고 견디고 계속해서 써 내려가겠다고, 그것으로 언젠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조금은 격정적인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격정적인 자리 구석구석에 있었던 ‘인연’들을 떠올려보며, 그 기다림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는 작은 믿음이 생겼다. ‘일단, 그냥, 같이’ 경험하고, 그 경험을 나누어 갖는 비밀을 이제는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으니.
그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 두 곡의 가사이다.
[친구에게] 이내 작사 작곡 (유뷰트 링크 http://bit.ly/1tTFnpo)
너를 보여주고 들려주어 고마운 밤을 지나
너는 아침 일찍 씩씩하게 세상으로 길을 나서네
묵묵하게 매일의 무게를 짊어진 너의 시간을 생각해
가끔, 혹은 자주 마음을 움켜쥐는 엄한 목소리가 들려도
다시, 용기를 내어 시작해볼까
그 어느 시간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저마다의 목소리들이 들려와 움츠러들지만
묵묵하게 매일의 무게를 짊어진 너의 시간을 생각해
우리는 진심을 원해, 만나기 원해, 위로하기 원해
환상, 이라고 해도 믿고 싶어
그 어느 시간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다시, 용기를 내어 시작해볼까
순간이란 영원과 같은 시간이니
[untitled] 나까(nacca) 작사 작곡
따사로운 장소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여
행운도 강함도 손에 잡은 기분이 되어
비틀거리며 깨달은
여린 마음을 가진 내게
여린 마음을 가진 내게
시들어버린 꽃잎도
금이 가버린 대지도
지키지 못한 약속도
포근한 빗속에 날개치네
포근한 빗속에 날개치네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면
부서질 것을 알고 있어도
사랑을 믿었다면
포근한 빗속에 날개치네
여린 마음을 가진 나를
따사로운 장소에서
따사로운 장소에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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