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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떨어진 아들, 야무진 딸?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2. 성별에 따른 이열종대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아이가 어린이집 다닐 때만 해도 크게 몰랐는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니 아들녀석의 생활방식이 여간 눈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정말이지 ‘사내’들의 놀이와 친구관계, 행동거지 등등 사사건건 맘에 들지 않아 나는 잔소리가 늘어가는 여자엄마가 되었다.
1학년 내내 아들과 나의 엇갈린 생각과 행동들, 욕구들 때문에 이런 것들은 ‘생물학적 성차’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하고 다녔고, 그걸 개그로 승화시키며 수다도 떨었다. 당시 육아의 고충을 성차에 기대어 합리화했다. 그래,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였던 거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동시에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는 반발이 생겼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오랜 문구처럼 남성도 그러할 진데 말이다. 나는 여지껏 생물학에 정체성을 가두지 말라고 배웠고, 이 사회가 그런 주장들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행동과 가치관을 틀에 가두는지 고민하며 또 거부하려고 해왔다. 사실 내가 읽어왔던 글들은 ‘여성’만을 위한 이론이라기보다 모든 인간을 젠더나 섹스의 틀에 가두는 것이 가져온 곤란함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놈의 수컷들’, ‘이런 사내녀석들’, ‘역시 남자는 달라’ 라는 말들에는 내 부모 세대와는 달리 남성의 우월함이 아닌 비난과 멸시의 어감을 살짝 실었다. 반면 남의 딸들을 어찌나 부러운 시선으로 훔쳐보았던지…. 야무지고, 똑똑하고, 청결하며, 언어를 사용하는 저 우아함. ‘아, 나도 곧 저런 인간(둘째는 딸이다)을 키울 날이 멀지 않았어’ 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서 가차 없이 사내를 인간이 아닌 수컷 취급했었다. 미안해 아들!
주위엔 온통 ‘못난 남자’에 대한 말들
어떤 면에서 시대는 변했다. 남아선호사상을 등에 업고, 날 때부터 축복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아들이란 더는 없다. 요새 내 친구들 사이에서 ‘아들’이란 안 그래도 험난한 육아에 고난과 역경을 더해줄 상징처럼 되었다. 아들 둘 이상 키우는 엄마는 전생에 지은 죄가 많다거나, 현세의 고생으로 인해 그나마 죽어서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돈다. 그러나 딸 키우는 엄마는 현세에 세계여행을 하고도 남아 죽어서 극락도 간다며, 그나마 죽어 천국이라도 가려는 아들엄마들의 기를 죽이는 말들은 더 많다.
그래서일까, 요새 초등학교에서 아들엄마들은 항시 겸양의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선생님에게도 다른 엄마들 앞에서도. 아들이 일으킬 지도 모르는 다양하고도 다채로운 사건사고에 대비하려는 본능적 몸가짐이다. 무엇보다 덜떨어진 아들의 알림장 내용이나마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말이다.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엄마들이 처음 하는 일은 서로서로 전화번호를 따는 일이더라. 아들 녀석은 제대로 적어오지 못한 알림장 때문에 숙제를 잘못해 가거나, 준비물을 안 가져간 적이 많았다. 아들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저 원래부터 없다고 생각했던 가정통신문 때문에 1학년 여름방학 숙제는 개학 나흘 전에야 알았다. 그래서인지 매년 봄이 되면 초등학교 운동장은 클럽도 아닐 진데, 그보다 더한 열정과 노력들로 엄마들이 서로서로의 핸드폰을 탐하는 장면이 연출되나 보다.
그 중 유독 똑똑한 딸 둔 엄마의 전화번호 값어치는 최고다. 그 엄마가 사교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성격이면 그 반 아들엄마들은 ‘올해는 부처를 만났다’고 말하더라. 반면 조금 새침한 성격이라면 아들엄마들은 서로서로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모두들 생존을 위한 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아들 열 명의 알림장이나 그들의 말을 조합해 봤자 똑똑한 딸 하나의 알림장과 소식통을 이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못난 아들, 덜떨어진 아들, 손이 많이 가는 아들과 알아서 잘하는, 야무진, 독립적인 딸들이 대비되었다.
실제 아들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어깨 힘 좀 주고 다니는 엄마는 흔치 않다. 그랬다가는 완전 촌스러운 엄마 취급을 당할 테다. 아들뿐만이 아니다. 아줌마들의 삶을 스스로 위안하고자 하는 시아버지 비판, 남편 비난, 아들 비하의 개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 없는 남편의 행동거지를 한탄하고 있으면 옆에서들 ‘남자는 철들면 안돼. 죽어!’ 했다. 죽을 때 되면 철드는 게 아니라 철들면 아예 죽어버린다니, 요새말로 진심 “웃픈” 말이다. 남편을 큰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시한 수준이 되었다.
이처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못난 남자에 대한 말들만 생각하다 보면 ‘남성우월주의’와 같은 단어는 구석기 시대를 지칭하는 것만 같다. 아니나다를까 요새 더 자주 듣는 말은 ‘역차별’이다.
그러나, 그런데 말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세상은 변했나?
‘아들’과 ‘딸’을 가르는 건 여전해
▲ 아이의 행동을 남자, 여자라는 성별 이열종대로 분류하는 문화는 여전하다. © 그림: 천정연 作 <비 와라>
딸과 아들간의 힘의 우위가 변했다고 하는 말들, 아들의 중요성보다는 딸의 가치 있음이 강조되고는 하지만 사실 딸들의 가치 있음은 ‘딸은 집안재산’이라는 오래된 통념, 사실상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이 더 중요해진, 더 필요해진 사회라는 사실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을 과도하게 착취한다. 덜떨어진 아들, 야무진 딸이라는 판본은 아들과 딸의 지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절대 아니다.
더 솔직히, 좀더 비꼬아볼까. 이런 판본은 아들엄마들의 아들 가진 유세다. 나, 유세 엄청 떤 셈이다. 덜떨어지고 천방지축인 아들 키우는 덕에 육아가 힘들다, 살림은 할 틈도 없다, 꽤나 대놓고 징징댄 꼴이다. 더불어 자식의 부주의함과 잘못에 대해 항상 선제 방어했다고 보면 된다. ‘아들녀석이 하도 정신 없어요’, ‘아들내미라 집중력이 아직 좀 부족해요.’ 이러면서 말이다. 즉, 봐달라는 얘기. 당신도 내 애를 나처럼 좀 이해해달라는 얘기. 좀더 사악하게 덧칠하자면 나와 내 아이는 좀 봐줘도 되잖아요, 아들인데! 세상에나!
물론 나도, 아들 키우는 엄마들 그 누구도!!! 정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아들의 덜떨어짐을 늘어놓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의 경우 아들을 향해 ‘이런, 수컷들!’이라고 내뱉었을 때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감정들이 늘 뒤섞여 있었다. 여하간 타인 앞에서 자식을 자랑하기보다는 다소 부족함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겸손을 떨기 위해, 동시에 정말 남녀 차이라고 느껴지는 사례를 발견하고 호기심과 놀라움에, 마지막으로는 그 동안의 내가 겪은 수많은 성차별에 대한 분노를 실어 다소 복수하는 심정으로 등등.
그러다 딸을 낳고 보니 그 어떤 감정이건, 딸을 통해 내 감정을 세상에 ‘호소’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은 그냥 군말 없이 키우는 거다. 그런 면에서 아들이 덜떨어졌건, 잘났건 엄마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그게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식 키우는 유세고, 아들 가진 자의 큰 소리가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조선시대랑 다를 건 뭔가 하는 회의감마저 몰려온다.
딸 키우는 엄마들만 훌륭하고 아들엄마들은 이기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야무지고 똑똑한 딸이라는 판본에 따르자면 ‘방어’라는 게 실제 불가능하다. 딸은 본래 야무지고 잘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 ‘애들마다 다른 것 같아요’, 내지는 ‘저희 애는 좀 남자애 같은 면도 있어서 아직 야무지지 못해요.’ 류의 말밖에 남는 게 없다. 아들이 사고 치면 그저 예견된 일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반면, 딸이 사고 치면 이미지 회복이 무척 힘든 이유도 여기 있는지 모른다. 사실 아들이건 딸이건 내가 보기에 초딩 애들은 다 부족하다. 애들이니까. 또한 모두다 꽤나 훌륭하다.
덜떨어진 아들, 야무진 딸이라는 말이 남녀의 지위 변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이런 말이 가져오는 효과는 뭘까? 내가 보기에 이 말은 ‘덜떨어진, 야무진’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아들’과 ‘딸’을 강조하고 가른다. 즉, 적어도 기질은 타고난다는 것, 그 기질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무엇보다 성별에 따르고, 더군다나 그 성은 단 둘뿐이라는 생각을 강화하고 확산시킨다는 말이다. 덜떨이진, 야무진과 같은 형용사는 형용사일 뿐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내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결국 “남자(아들)는 원래 이래, 여자(딸)는 원래 이래!”로 이열종대, 그 틀에서만 아이들의 행동거지가 분류되고 이해된다. 대개 이런 생각은 성차별 가치관을 형성해 왔다. 물론 남녀 두 성 중 남성이 우월함을 전제로 하고, 남녀로 구별되지 않는 다양한 성,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 등을 고려할 자리도 남겨두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 아래서 남녀평등은 고사하고 모든 인간은 섹스와 젠더라는 틀이 제공하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줄어든다.
‘덜떨어진 아들보다는 딸이 대세!’라는 시쳇말들은 아들과 딸의 지위 역전을 말하는 착시 효과 위에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성차별 가치관을 새로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성별에 따른 편견 따위 비웃어주고 싶지만…
물론 여전히, 해부학적으로, 염색체상 남자인 아들을 실제 낳고 키우다 보니 뭐가 선후인지 헷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2차 성징은 오지 않았으니 호르몬은 잠시 보류. 성별 정체성은 확실히 남자인 듯하고, 성적 지향에 대한 판단도 다소 이르지만 이성애자로 추측됨.) 무시할 수만은 없는 기질에 의한 경험들에 매일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이 꼭 성에 의한 기질인지는 여전히 확언하기 어렵다. 모든 인간은 다,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오히려 아이들의 또래문화, 아이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 아이들이 접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그들의 기질을 성차 안에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일명 이러한 ‘문화’는 아이가 초딩이 되니 가히 융단폭격처럼 공격해왔다.
안다. 요새 아들엄마들이 아들을 덜떨어졌다고 말하는 건 앞서 말했듯 아들 유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무차별적 폭격의 사회 문화 속에서 그나마 평형을 유지하려는 나름의 고급개그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엄마들은 예전보다도 더 똑똑해졌고, 아들을 ‘원래 그런 아들’로 키우려는 엄마들은 별로 없다. 아들을 요리 잘하고, 애 잘 보고, 배려심 많은 매너남으로 키우려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물며 그게 유행이라고 한다면 거짓말 같을까?
요즘 엄마들은 사회가 이열종대로 서란다고 순순히 가서 냅다 줄 서는 그런 엄마들이 아니다. 성별에 따른 편견 따위야 흔들려면 흔들고 비웃어 주려면 비웃을 수도 있게 된 시대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그런데 성별에 따른 이열종대가 무척이나 견고하게 작동하는 순간이 있다. 가히 요지부동, 송곳 꽂을 자리도 없는 촘촘한 배열,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적 차이인가 싶은 착각까지. 적어도 내가 그렇게 느낀 순간은 성폭력 문제 앞에서 아들과 딸을 대하는 모습들을 봤을 때였다. ▣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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