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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촌(半村), 도시 탈출을 통해 얻은 것
<이 언니의 귀촌> 유목민의 村스런 체류기(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비가 갠 아침. 햇살이 창을 넘어 들고, 창가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천 자락이 춤을 춘다. 작년 가을에 떠났던 성대 결절 꾀꼬리가 돌아왔는지 목청을 닦는 소리가 들린다. 풍경 소리가 정신을 깨운다. 바람이 살랑이는 마루에 햇볕줄기를 등지고 앉으면 마주 보이는 창가 너머로 잣나무가 일렁인다. 나른하게 번져오는 이 기분. 딱 좋다.
작년 겨울의 혹독함을 단박에 보상해주는 이 눈부신 평온함. 너무도 자극적이어서 지난 겨울 시도 때도 없이 눈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웠던지, 연탄불을 몇 번이나 꺼뜨려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어떻게 겨울이 1년의 절반이상이 될 수 있는지 등 고된 겨울나기의 혹독함 따위는 새 하얗게 잊혀진다.
별일 없는 아침 괜히 복잡한 머릿속에 쉼표를 찍고, 멋대로 굴러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멈추게 만드는 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그래 조금쯤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나쁘지 않으니까.
내가 사는 이곳은 서울에서 전철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가평이다. 가평에 온 지 4년이 되어간다.
▲ 언제든 마음 맞는 이와 사부작 걷을 수 있는 곳. 집에서 옆길로 이어지는 숲. © 펭
#1 도시 탈출: 훌쩍 그러나 준비된 시간
“왜 도시를 떠났나요?”
“네. 자율적이고 자립가능하고 생태적이면서도 소모되지 않는 삶을 찾고, 만들고 싶었습니다.”
뭐 이런 근사한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만, 사실 도시를 떠나게 된 건 어떤 신념의 산물이거나 의지의 집약적 결과가 아니다. 다만 도시의 어지럼증을 버티기 위해 애를 쓰며 힘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4년 전 ‘서울 탈출’을 시도했을 당시는 내가 필리핀과 인도에서 느릿느릿하게 2년 여 간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구들은 가끔 내 걱정을 했다. 애가 좀 멍~ 해졌다고. 그리고 나는 가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혼란을 경험했다.
길 한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나, 그리고 그 옆을 사람들이 앞다퉈 빠르게 흘러 지나가는 장면. 그러다 문득 내가 멈춰 서 있는 게 아니라 뒤고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속도를 ‘중심’에 놓고 그 속도에 실려 있으면, 자기가 앞으로 움직이는 속도는 느끼지 못하고 주변에 멈춰선 것들이 뒤로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치 버스를 타고 있으면 창 밖 풍경들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남들이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든, 내가 뒤로 밀려나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상대적 속도감은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내 걸음걸이로 걸어가기 위해 드는 힘보다 남들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힘을 내야 하는 삶. 그렇게 살고 싶진 않은데…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다세대 주택 세 살이 십여 년. 가끔 머리에 선루프를 달고 활짝 열어 녹슬어 가는 살과 정신을 햇볕과 바람으로 뽀송뽀송 말리고 싶은 목마름이 있었다. 10여년이 넘는 서울살이에서 ‘집’은 일상을 가꾸는 터전이라기보다 집밖의 활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은 ‘견디기’였다. 삶을 바꾸어야 한다.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처럼 나도 ‘도시’가 아닌 곳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며시 꿈꾸어 왔다.
다만 나는 딱히 지킬 것도 없었고, 꼭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풀타임의 안정적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손바닥만 한 집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정리할 것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동거녀’의 셋방에 얹혀 사는 신세로, 가진 것이라고는 인도와 필리핀에서 끌고 다녔던 가방에 들어갈 정도의 짐이 전부였다.
내가 외국에 있던 사이, 함께 살던 동생이 결혼하면서 집을 정리했다. 세간살이는 동생네로 옮겨갔고 나는 딱히 뭐가 필요하지 않은 삶을 몇 년째 살고 있었다. 정착보다는 옮겨 다니기 수월한 ‘유목민’같은 존재였다.
‘내 속도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2 귀촌=농사지으며 산다?
▲ 우리 텃밭의 채소 미니어쳐. © 펭
나는 어린 시절과 유년기를 바다가 멀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 보냈다. 부모가 텃밭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논밭을 일구는 일을 겸했기 때문에, 나름 시골 농촌살이가 어떠한지도 알고 있다. 학교에 다녀오면 밭에 나가 일손을 도왔던 기억이 아련하다. 엄마는 꼭 내 몫의 일을 남겨두셨으니까.
타 들어가는 7월의 태양 아래, 감자를 수확하는 모습이 내 뇌리에 박힌 유년 시절 농촌아이의 삶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른바 ‘도시녀’가 아니었고 내 몸 어딘가에는 ‘농촌때’가 묻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농촌살이에 대한 향수가 컸던 것도 아니다. 도시로 떠나면서 ‘귀향의 꿈’ 따위를 다짐한 적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시골생활, 농촌생활에 대한 로망이 자라날 여지도 없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농사일. 그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농촌 지역의 일반적 특성인 ‘폐쇄성’에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두세 사람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다음날 오후쯤엔 온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는 곳. 그곳이 내가 아는 ‘시골’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골은 내게 약간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나는 도시의 많은 부분을 좋아한다. 도시는 여러 종의 자유로움이 더 충만하다. 다양성이 더 존중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름이 덜 주목된다. 익명성과 약간의 무관심이 편안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유사한 지향성, 가치관,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교류와 커뮤니티가 좀더 발달된 곳이기도 하다. 나에게 도시는 정치적, 심리적 ‘안식처’였기에 서울로의 접근성은 ‘도시 탈출’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기 어려웠다.
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역시 시골로 이주에 있어 큰 과제였다. 그간 나는 여성단체 활동가로, 여성노동을 연구하는 일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가끔은 노동력과 숙식 제공을 교환하는 식으로도 먹고 살았다. 자원활동이라고 불리는 류의 일들 말이다.
특히 필리핀에서의 삶은 그러했다. 어디 가서도 ‘굶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잘 살고 싶었다. 아무리 어릴 적 시골살이의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르다. ‘머리’가 많이 컸다. 정치적 성향도, 세상을 보는 관점도, 주변사람들도,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과 자립 정도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보는 세상의 눈도 달라졌다.
걱정이다. 어떻게 먹고 살지?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탐색이 필요하다.
#3 반촌(半村), 햇볕 잘 드는 마당이 있는 집으로
주 거주지와 생활권을 ‘촌’에 두고, 서울을 ‘드나드는’ 방식의 삶을 선택했다. 사실 뭐 정직하게 말해 의식적인 ‘선택’은 아니다. 당시 내 삶의 조건에서 그나마 ‘시도’해 봄직한 ‘도시 탈출’의 출발이었다.
▲ 잡초밭을 못 보겠다는 단기 동거녀는 포크레인을 불러 갈아엎었다. 그 후 돌 고르는 작업 중. 덕분에 텃밭 면적이 몇배 불어 어찌 관리할지 걱정이다. ©펭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시골생활의 가장 불편한 점 중에 하나는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하루에 대여섯 대 다니는 시골버스 시간에 일상생활 패턴을 맞춘다면 살아봄직도 하다. 우리 엄마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전지구적으로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다만, 계획적이긴커녕 게으르기까지 한 내게 그것은 꽤나 실질적인 불편이었다.
그렇다고 면허를 갖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살자는 일종의 약속을 깨고 자가용을 마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와 ‘동거녀’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을 드나들 수 있도록 전철이나 기차가 있고, 그 전철역에서 자전거나 도보로 접근할 수 있는 거리 정도의 ‘촌구석’으로 거주할 터를 골랐다. 그렇게 우리는 춘천 가는 기차가 지나는 곳, 서울에서 멀지 않은 ‘촌구석’ 가평으로 왔다.
첨엔, 서울을 떠나 ‘촌’으로 이주하면 쬐그만 땅 뙤기의 오래된 농가주택이라도 하나 ‘구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부동산 물정 모르는 소리. 한때, 네팔 포카라에 사는 친구 집 옆에 땅을 조금 사고 집을 짓고 살아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곳 땅값을 알고 당장에 좌절했다. 그때 알았던 것을 그새 까먹은 거다. 이제 내가 살아봄 직한 지구상 그 어느 곳에도 내 형편으로 가질 수 있는 땅뙤기 한 자락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전철 개통과 함께 투기 열풍으로 이미 오를 대로 올라버린 가평의 땅 값. 덕분에 집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전철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한 곳은 이미 나름 ‘역세권’이 되어 부르는 땅값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부동산에서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소개해 주는 집들은 전부 볕이 별로 안 들고 마당도 없는 열 평 남짓한 오래된 빌라였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남향이고 마당이 있는 집. 살 집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조건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서 서울살이 부작용으로 눅눅해진 몸과 마음을 뽀송뽀송 소독하고 말리고 싶었다. 결국 ‘소유’를 포기하고 또다시 ‘세들기’를 택했다. 땅값에 비하면 전세 값은 이상하게도 ‘합리적’으로 저렴했다. 햇볕이 쏟아지고, 마당과 텃밭도 있는, 둘이 살기엔 넓은 ‘전원주택’으로 나름 만족스러웠다. 집 안팎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든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4 반촌살이: 서울과 가평을 오가며
가평으로 오면서 주5일 전일제 임금노동은 버리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일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도 주40시간 풀타임 임금노동의 삶과는 결별이다. 조금 벌고 조금 쓰고,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많게. (과연 그것이 잘 되고 있는지는 현재로선 그다지 긍정적이라 않다 하더라도) 그런 삶을 기획해 보고자 했다.
▲ 우리 텃밭의 딸기. 복합비료를 줘서 생장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진심어린' 조언을 수시로 듣지만, '태평농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펭
4년 전 처음 가평으로 이주할 당시, 알고 지내던 여성단체에서 주 이틀 출근을 하고 하루 재택 근무하는 방식의 단시간 노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서울로 일하러 간다.
그리고 둘이 살기에 매우 넓은 셋방을 얻은 참에 짬짬이 민박(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텃밭에서 생산되는 미니어처 채소들도 나름 식생활에 보탬이 되고, 가끔은 자연 채집도 재미와 함께 뱃속을 채워준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생각을 해본 적 없고, 소규모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체득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키워 보는 재미, 호미질을 하는 재미, 기른 것을 수확하는 기쁨을 놓칠 수는 없다. 우리도 약간의 놀이가 필요하다. 일명 텃밭 가꾸기 놀이.
신기하게도 봄이 되면 무언가 심고 가꾸어 볼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몇 년의 경험이 텃밭 농사의 결과가 얼마나 한심한지 지속적으로 일러주지만, 그래도 자연이 보여주는 봄의 찬란한 기운은 어느새 새로운 기대를 부풀린다.
첫해, 이사를 하고 이른 봄 앞마당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제비꽃이었다. 20대 후반쯤에 나는 학생이었다. 그 시절 봄마다 운동장 벤치에 제멋대로 피던 제비꽃은 ‘늦된’ 학생인 내게 큰 휴식처였다. 그런데 운동장을 없애고 세계 일류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희한한’ 건축물 공사가 시작되면서 제비꽃은 사라졌다. 어찌나 아쉬웠던지 제비꽃을 찾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앞마당 지천이 제비꽃이다. 호미질을 하고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찌 이 제비꽃 녀석들을 뽑아버린단 말인가. 이 잡초같은 녀석들의 질긴 생명력을 과소평가한 탓에 나는 집 주인이 예쁘게 만들어 놓은 텃밭을 반년 만에 제비꽃과 달맞이꽃이 무성한 잡초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텃밭에 심은 모든 채소는 미니어처(miniature, 작은 모형). 아랫집이 주먹 두 개만한 고구마를 수확할 때 우리는 손가락 두 개만한 고구마를 얻었다. 마트에서 파는 브로콜리는 분명 내 주먹보다 큰데, 우리 텃밭 브로콜리는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하다. 몇몇 잎채소들은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벌레들이 맛있게 다 먹어 치우셨다.
씨만 뿌리면 자연이 알아서 키워줄 거라 찰떡같이 믿은 ‘태평농법’의 결과, 이제 우리는 쑥대밭의 위용을 익히 잘 알게 되었다.
‘당신이 올해 하나의 쑥 잎을 보고 기뻐하며 내버려둔다면 다음해 당신은 필히 쑥대밭의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 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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