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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취득 후에도 이민자는 차등 대우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6) 한국시민이 된 베트남여성②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다

 

▲  가족들과 함께 찍은 우리 부부의 결혼 사진.    © 웬티현 
 

근로 계약 만료로 불법체류자가 되어 외롭게 살던 나는, 우연히 한국사람과 결혼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남편은 날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을 해주었고, 만날수록 그의 믿음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난 남편과 결혼하면 체류 문제 걱정 없이 한국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정하였다.

 

현재 결혼 7년 차이며, 딸 아이가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나의 결혼생활은 결혼 전에 상상한 것처럼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언제나 열정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왔다. 서울에서의 초기 생활은 남편의 권유로 남편과 함께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그 공장에서 일할 때는 연장 근무하면 급여를 2백만원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아침부터 출근해서 저녁 퇴근할 때까지 말을 몇 마디만 하고, 하는 일도 매일 같고, 한 동작만 하루 종일 하니 ‘내가 너무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친구들 중에서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통번역 일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시험에 응시했는데, 바로 4급 합격하였다. 그 후 서울의 한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베트남 통번역지원사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다행히도 경쟁자가 없어서 컴퓨터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내가 합격할 수 있었다.

 

결혼이민자 통번역지원사로 일한 3년

 

▲  커피숍에서 즐거운 휴식 시간.    © 웬티현 
 

기쁜 마음으로 베트남 결혼이민자를 위한 통번역지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통번역사들의 업무는 주로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초기 입국자들에게 가족 생활(남편과 시댁식구들과의 의사소통) 통역, 사회 생활(병원, 은행, 법원, 경찰 등을 동행하여 통역) 지원을 해준다. 그 외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소식지, 홍보지, 요구도 조사지 등을 모국어로 번역해서 결혼이민자가 센터의 프로그램을 쉽게 이해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3년 동안 통번역지원사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민자 통번역지원사로 일한 경험은 나에게 업무, 보수 교육을 통해서 부족한 실력을 채우며, 직장 경력도 쌓고, 인맥도 그만큼 만들어서 좀더 나은 직장으로 진출하는 데 발판 역할을 해주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공장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업무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었데, 통번역 일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조직 문화를 배우게 되고, 사무직에 필요한 지식, 행정 업무, 기초적인 컴퓨터 사용법 등 소위 ‘화이트 칼라’로 업무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통번역사로 근무한지 3년차 되었을 때는 통번역 업무가 어느 정도 능숙해져서 공문 수신이나 소식지 편집 등 센터 행정 업무도 맡게 되었다. 새로운 업무를 배우느라 야근도 자주해야 했다. 업무량은 늘어났는데 급여는 똑같았다. 월급날에 센터 직원 월급표에 서명을 할 때마다 한국직원들과 차이가 많이 나서 속상했다. 내가 결혼이민자라서 한국 정부로부터 무시당하고, 차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문화센터의 통번역사들은 한국어 교육을 비롯해 다문화 이해 교육 등 모든 프로그램을 홍보부터 인원 모집, 만족도 조사 등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큰 역할을 담당한다. 다문화센터에서는 통번역지원사가 없으면 모든 프로그램이 마비될 정도로 통번역사가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의 업무 능력에 비하면 문서작성 능력이 떨어질 수 있겠으나 센터의 업무 성과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을 인정해줘야 공평한데, 통번역사들이 받는 임금이 한국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최저임금이다. 회사도 아닌 공공조직에서 이렇게 또 임금 격차의 억울함을 참아야 했다.

 

차별 대우를 받느니 그만 두고 다른 직장에 가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서 그만 두면 원하는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능력 가지고 과연 다른 직장에 가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직장을 옮길 생각을 접었다.

 

‘상명하복’ 중시하는 한국의 조직 문화

 

2014년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사이버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통번역사로 일하고, 졸업하면 다른 직장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뜻밖에도 계약이 만료되어 더 이상 재계약이 안 된다는 통보를 계약 만료 3주 정도 전에 센터장님으로부터 받았다. ‘상명하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재계약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한국의 조직 문화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상사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부당함에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했다. 진보적인 한국 사회의 조직 생활에서도 상하 관계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상사는 자신의 권력을 내세워 아래 직원의 충성을 요구하며 복종시키려고 하고, 아래 직원은 따지지 말고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것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고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인간인데,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고 배려하면 일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고, 일할 때도 즐겁게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겠는가? 왜 굳이 상사가 그렇게 권력을 행사해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내가 더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좋은 경험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점을 반성해야 하는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몸으로 느꼈기에 나의 앞길에 어떤 사람을 만나든 좀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히 되도록 더욱 노력할 것 같다.

 

한국은 나의 운명

 

다문화센터에서 퇴사 당하고 얼마 후,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에서 베트남 상담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미비한 자격이지만 용기를 내서 지원했다.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정말 기뻤다. 한편으로는 내가 상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도 가득했다. 다행히도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에는 친절하고 성격이 좋은 분들이 활동하고 있어서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있다.

 

▲  한국에서 살아가는 베트남 결혼이주여성들과의 즐거운 수다. (중앙이 필자)   © 웬티현 
  

무엇이든 물어보면 아낌없이 대답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급여도 전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일 감시와 통제를 받고 일했던 다문화센터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한국의 조직 문화에 대한 나의 안 좋은 인식도 바뀌게 되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고,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도 서울시 예산으로 운영되는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고 월급도 다른지 한국 사회가 고민해 봐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예산을 세울 때부터 이주여성들에 대한 인건비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낮게 책정하지 못하도록, 운영 법인인 이주여성인권센터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나 이주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며,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이주여성인권센터 같은 곳들이 많아져야 다양한 이주민들과 함께 사는 한국 사회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싶다.

 

난 이제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고, 내가 한국사람이 된 것은 한국이 나의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인 내 남편, 그리고 내 아이와 함께 한국 사회 속에서 평생 살고 싶다. 보다 성숙해져 갈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나도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며, 늘 노력하고, 열정 가득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웬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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