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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보내는 편지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7)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에서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한국여성처럼 ‘조신하지 않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

 

미국인인 내가 한국에 온 이유를 묻는다면 ‘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어를 배워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 커뮤니티에서 조직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좀더 친해지고 연세가 많은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일 년 정도 여행을 하며 미국 밖의 세계를 탐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전부 진심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진정으로 속한 공간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면서는 그곳이 나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 한국의 한 술집에서. 가운데가 필자.(상)   첫번째 제주여행.(1996년) 다른 교환학생들과 함께. (하)   © 지은경 

 

1994년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을 때에는 한국에 외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교환학생인 우리에게 한국이란 곳이 낯설었던 만큼 한국인들에게도 외국학생이라는 우리의 존재는 낯선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교환학생 중에서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경험은 판이하게 달랐다.

 

(함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대다수가 백인이거나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이 글에서 내가 ‘외국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가리킨다. 흑인학생들도 몇몇 있었지만 이들의 경험은 내가 겪은 것과 굉장히 달랐기 때문에 이 글에서 풀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드러나는 캐주얼한 옷을 입는 한국계 미국인 여자 교환학생들과는 달리, 한국인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마른 몸에 완벽하게 세팅이 된 머리 스타일과 화장을 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학교에 왔다. 근처 이화여대 학생들이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등교하는 것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던 기억도 있다. 지금 막 침대에서 자다 나온 것 같은 잠옷 차림으로 학교에 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미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대다수의 한국인 여학생들과 달리, 나는 몸집이 좀 있었고 ‘제대로’ 화장하는 법을 몰랐으며 단정한 편에도 들지 못했다. 한국여성의 신체적 기준은 나를 포함한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들에게 커다란 사회적 압박으로 다가왔다. 우린 한국에 적응하고 어울리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꼈다. 매일 학교에 정장을 하고 화장을 마치고 올 능력도, 시간도,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마른 몸을 가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조신한’ 여성들이 아니었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우리는 미국 사회에서 행동과 신체에 그렇게 많은 제약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친구는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행인에게 뺨을 맞기도 했고, 또 다른 친구는 머리를 염색했다고 길거리에서 호통을 당하기도 했다. 몸이 드러나거나 ‘구멍 뚫린’ 반바지 같은 너저분한 옷을 입었다며 비난을 받은 친구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우리는 목소리도 너무 컸고 웃음소리도 너무 컸다.

 

우리의 겉모습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인 손가락질 때문에 여자 교환학생들은 대부분 위축이 되어 있었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은 한국여성과 항상 비교를 당했다. 여자다운 옷차림이나 웃음소리 같은 이런 식의 검열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에게만 해당되었고, 다른 외국인 여성들에게는 다른 기준이 주어졌다.

 

한국여성들의 환심을 산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

 

하지만 같은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에게는 옷차림이나 외형에 대한 제약이 덜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자르라던지 반바지를 입지 말라던지 하는 간섭을 받을 때도 있긴 했지만, 여성에 비해 그 정도가 훨씬 덜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생활할 때 늘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했기 때문에 보통 한국남성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근육질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주의 운동이 아직 주류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던 한국에서, 젠더 평등에 대해 기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던 그들의 태도는 많은 한국여성들의 환심을 샀다.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 주위에는 아름다운 한국여성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건 술을 마시건 (혼전 성관계를 갖건) 윤리 의식이 엄격하지 않건 간에 상관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하던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나 행동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그런 행동은 미국에서는 지탄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신체나 행동에 대한 검열이 없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실제로 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한국에서처럼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은 대부분 한국인 여자친구를 쉽게 사귀었다. 동시에 한 명 이상 사귀기도 했다. 이들의 여자친구는 다들 아름다웠다. 자기 여자친구가 비행기 승무원이라고 자랑한 친구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여성들은 미국여성들은 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성들을 추켜세워주었다. 어떤 한국계 미국인 남성은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를 왕처럼 대해줘. 여기 진짜 좋아”라고 말할 정도였다. 내가 이런 부류의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영어가 모국어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리다
 

▲  순대타운에서 무엇을 주문할 지 심각하게 토론 중.   © 지은경 
 

한국에서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에는 많은 특권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건 여자건 간에,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영어권 국가에 대해 접근성이 높다는 이유로 부러움을 샀다. 당시 한국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세계화 캠페인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에 입학하려면, 혹은 좋은 직업을 얻거나 승진을 하려면 (영어가 해당 업무에 필요하던 하지 않던 간에)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에는 몰랐다. 그저 세계화의 슬로건이 어디서도 나부끼는 것만 보았다. 불과 몇 년 후 광적인 영어교육 바람이 정점을 찍게 되었다.

 

영어 덕분에 회화 수업을 진행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되었다. 백인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피부가 검은 강사들보다는 수업료가 높았고, 평균 중산층 한국인 노동자보다 많이 버는 것이 확실했다.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비싼 영어수업을 받을 수 있는 한국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갑자기 한국의 엘리트 사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식인들과 연예인들을 만났고, 정기적으로 값비싼 호텔 뷔페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았으며, 솔직히 내 자격 사항에 비해 과분한 각종 직업을 제안 받았다.

 

영어권 국가에 진입하기 쉽다는 점과 그에 따른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부러운 일이고 누군가는 나를 이용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나와 어울리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는 미국인들과 친해지는 게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워낙 널리 퍼져있어서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도 주변으로부터 자주 들었다. 그래서 내 전 한국인 남자친구는 영어와 관련된 질문은 나에게 일절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을 정도였다. 그는 영어 때문에 나를 이용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한국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내가 영어를 쓰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성격이 좋았기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특권이라는 것은 인종이나 국적과 같은 개인의 부여 받은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피부가 검고 (필리핀이나 괌 같은) 가난한 영어권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은 나보다 한국에서 훨씬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글에서 피부가 검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나 백인 외국인들이 누린 과도한 특권에 대해 제대로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출신국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 비해 나는 미국이라는 커다란 권력의 덕을 보았음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나 나나, 피부색이나 출신국가 등과 같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사람들의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  북한산에 올라. (2006년)    © 지은경 
 

영어권력에 대한 선망과 그 이면에 깔린 분노

 

한국계 미국인이 영어를 모국어로 쓴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특권이 그러하듯 부정적인 면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에서의 생활에 전환점이 왔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긴 직후였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고 한국에 대한 자긍심이 넘치는 듯했다. 광장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의 한국에 대한 자긍심을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과 술집을 찾았다. 1+1 행사를 하는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술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술값에 대한 시비가 붙었다. 술집 주인과 직원은 우리가 술병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그 술병이란 일행 중 한 명이 기념품으로 챙긴 것으로, 계산이 완료된 후 가방에 넣은 것이었다. 말다툼이 계속되자 직원들은 우리가 영어를 쓰면서 ‘잘난 척’을 한다고 비난했다. 우리가 가진 특권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 중 몇 명은 한국어를 아예 못한다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우리는 못된 한국인이자 미국인이었고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상황이 폭력적으로 변하자 경찰이 출동했다. 우리가 보기에 술집 주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듯해 보이는 경찰은 술집에서 주장하는 금액뿐 아니라 벌금까지 내지 않으면 감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우리를 협박했다.

 

한 번은 술집에서 내가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과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내게 소리를 질러댄 사람도 있었다. 나는 사실 한국계 미국인이고, 내 친구들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부잣집 자식들이라 유학 다녀와서 영어를 한다는 것을 ‘뻐기는’ 걸로 오해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비슷한 일은 여러 차례 벌어졌고, 몇 년이 지나도 한국인들에게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영어로 인한 불평등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가 쌓여왔음을 보여주는 일들이었다. 한국인들이 본인의 영어 실력에 대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이면에는 영어 권력에 대한 분노가 숨어있었다. [번역: 권이은정]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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