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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여성 미국인 영어강사의 이주 경험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9) 일종의 ‘소수자’가 된다는 것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여러 인종과 섞여, 구김살 없이 보낸 어린 시절
나는 백인 미국인 여성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다. 학교에 가면 같은 반 친구 중에 라틴계나 흑인, 인디언 친구들이 늘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백인이었다. 라틴계나 인디언 친구들은 끼리끼리 노는 경향이 있긴 했어도 학생들 모두가 다 친구였고, 마을에서도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래 그룹에는 늘 여러 인종이 섞여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와 인종이 다른 친구들이 나랑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든가, 인종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었다든가 하는 기억은 전혀 없다.
관용이나 다문화에 대해서 특별히 교육받은 기억 또한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인종에 대한 관용이나 다름에 대한 감수성은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냥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반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조상이었던 여러 민족의 특성을 비교하는 과제를 재미있게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다양한 (특히 노르웨이인처럼 특이한) 민족이 핏줄에 섞여 있다는 건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멋진 일이었다.
▲ 내가 자란 작은 동네의 ‘번화가’ © 라라
사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상에서 인종차별주의를 겪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내가 백인이기 때문에, 게다가 많은 백인 미국인들과는 달리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친척 어른들이 다행히 없었기 때문에 누린 특권일 것이다.) 고등학교 진학 후, 남자 선배들이 인종비하적인 농담을 하는 걸 처음으로 듣고 혼란에 빠졌다. 인종차별주의란 노예제가 있었던, 혹은 적어도 시민권이란 게 없었던 저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동성애 혐오는 지금이나 그때나 늘 주변에 있는 일이었다.)
한 번은 내 앞에서 어떤 남학생이 인종비하적인 농담을 하길래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대꾸했다. 그런데 나중에 또 다른 남자애가 자기 앞에 있는 친구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걸 목격했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지금 돌아봐도 내가 그 때 제대로 쏘아붙였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그 남자애는 입이 거친 친구였고, ‘사회적 정의’는 그 당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 번은 부모님과 TV로 NBA 농구 경기를 보다가, 실수를 저지른 (흑인) 선수를 가리켜 “바보 원숭이”라고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그 단어는 친구들과 내가 귀엽다는 의미를 담아 종종 쓰던 말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정색을 하며 “원숭이”라는 단어는 인종비하적인 말이고, 흑인을 가리킬 때 앞으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만 부모님의 엄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가타부타할 것 없이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인종차별은 과거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
부유한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그래서 잘 어울리기 어려웠던) 문과대학에 입학한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진행된 ‘인종주의에 대한 인식 재고’ 행사 중 하나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 행사가 두 가지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다양한 인종의 선배들이 패널로 나와 벌인 토론이고, 또 하나는 신입생 간의 소그룹 토론이었다. 토론 과정에서 백인학생들은 자신이 누렸던 특권에 대해 떠올려보라는 요청을 받았고, 유색인종 학생들은 자신이 겪은 차별 경험을 공유하도록 요청 받았다. 이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보탤 말이 없는 걸 보면, 주최 측의 노력과는 별개로 그 행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을 못 받았던 것 같다.
민족 간의 언어 사용 차이에 대한 내용이 수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사회언어학 수업 두 개가 좀 더 기억에 남는다. 굉장히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일례로, 흑인들이 쓰는 영어는 나름의 문법적인 규칙을 따르는, 교육을 전제로 하는 방언이라는 것이었다. 흑인영어가 단지 ‘표준’ 미국 영어와 다를 뿐이지 ‘못 배워서’ 속어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이 수업에서 처음 배운 내용이었다.
인종에 대해 정말로 깊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졸업을 한두 해 앞두고서였다. 한국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인종과 국적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에 대해 배우고 소수인종으로 산다는 것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여성주의자로 정체화하게 된 것도, 인종과 젠더, 성적 지향과 같은 다양한 탄압의 요소들이 서로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각각 별개로 고려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인터섹셔널리즘(inter-sectionalism)을 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흑인들의 사연이 몇 년 전부터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요사이 미국이 분명 전반적으로 인종에 대해 전보다 훨씬 큰 관심을 쏟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추세가 비극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인종차별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을 가장 큰 모욕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유형의 백인들이 유색인종에게 갖는 분노와 공감의 부족을 보면, 게다가 이제는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유색인종을 향한 인종차별주의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과거에나 있던 것이지 다행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국인들의 믿음에 대해 대학원에서 배웠는데,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교육이 이 수준에서 실제로 멈춰있는 듯하다.
지도자과정 후 한달 만에 영어학원에 취직하다
내게 있어 대학 시절의 하이라이트는 서유럽 국가에서 유학했던 3학년 시기였다. 극단적인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모가 비슷하니 적응해서 사는 건 어렵지 않았고 문화적인 차이도 미미했다. 그럼에도 다른 언어로 소통한다는 도전과 익숙하지 않은 곳을 여행하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았던 빌라에서 내다본 풍경 ©라라
대학 졸업 즈음에 내가 원한 분야에서 직업을 구하지 못하자, 한 달짜리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영어 제2외국어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지도자 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해외 영어강사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자리가 가장 많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학원에 대한 경고성 조언도 많았지만) 특히 한국이 가장 좋은 조건을 걸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취업에 집중했다. 고용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때만 해도 특별히 외국인 영어강사에 대해 배경 조사를 하는 곳이 없어서, 지도자 과정을 마친 지 한 달 만에 유명 프랜차이즈 성인영어학원의 인천 지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한국 이주 경험은 (당시에는 1년만 모험을 해보자고 생각했지 아예 이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수월하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인생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이 많은 이 직업을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원은 믿을만하고 운영도 원활했으며 한국인 관리교사들도 친절했다. 다른 외국인 교사들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세계경제불황 이전에 한국을 찾아온 원어민 영어교사들 중엔 좀 이상한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몇 달 지나지 않아 친구들이 생겼다. 한국인 남자친구도 사귀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기서 배우자를 만나 다시는 안 돌아오는 거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어느 정도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애 중이다. 그는 내가 한국에 계속 머무르는 큰 이유다.
프라이버시를 보장받기 어려운, 낯선 문화
그 당시 내 삶은 어땠던가? 일부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사적인 공간에 대한 한국인들의 다른 생각, 너무나 자주 큰 소리로 침을 뱉는 사람들, 대놓고 계속 쳐다보는 시선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수도인 서울에 살지만) 처음에 자리를 잡았던 곳이 인천이라서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봤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외국인이 흔히 보이던 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요즘도 생각해보곤 한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아주머니가 뒤돌아 쳐다보며 위아래로 훑어보던 불편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제는 아주 어린 아이들만 나를 쳐다본다. 얼마나 다행인지.
한국말을 못하던 그 시기에 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하다. 첫 해에는 은행 일이나 집주인과의 소통 등을 학원에서 도와주었던 것 같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글을 익히긴 했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내가 ‘영어’ 원어민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채로 몇 년을 지내도 별 문제 없이 사는 강사들도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절박한 일은 아니었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언어교환 파트너를 찾기도 쉬웠다. 오랫동안 한국에 있었던 것 치고는 아직도 한국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한국어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미국인들이 보통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들과 얘기해야 할 때 짜증을 내는 반면, 한국 사람들은 한국말을 하는 (백인?) 외국인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라는 사실이 마음 편하지 않다. “감사합니다”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오, 잘 하시네요!”라고 반응했는지 모른다. 물론 한국말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순간에는 이런 사실을 떠올리고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네 옆의 여자가 러시아인이냐?’라는 질문
이쯤 되면 명백하겠지만, 내 피부색과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다른 비(非)한국인들이 접하는 어려움들을 비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일례로 나와 어쩌다 몸이 닿는 것을 대놓고 피한 사람도 없었고, 내 허락 없이 내 신체를 건드린 사람도 없었다. 대중교통에서 술 취한 아저씨들이 접근하는 경우는 왕왕 있긴 하지만. 지금껏 아무도 나와 내 남자친구에게 다른 인종 간의 연애를 비난하며 큰 소리로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지 않았다.
내가 있는 바로 앞에서 나에 대한 질문들을 남자친구에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들은 내가 러시아 사람인지 가끔 묻는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백인여성 원어민 강사들 사이에 ‘러시아인이냐는 질문은 엄청난 모욕’이라는 얘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남자들이 본인을 성매매 여성으로 본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언짢아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여기에 오면서 나는 여성주의자가 되었고, 나와 다른 여성들 간에 선을 긋는 행위는 지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만난 아저씨 학생이 섹스를 목적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는 수업이 끝나고 내가 사는 빌라까지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었고, 집에 같이 들어가도 되는지 물었다. 그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당황한 내가 횡설수설 거절을 했음에도 내 뜻을 알아듣고 다시는 나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첫 해 수업 중에 성형수술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어디를 고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던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질문의 대상은 나였다. 어떤 학생이 “선생님이 뭐 하러 고치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죠”라고 말했다. 독자 여러분, 이건 백프로 사실이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게 생겼다고 할 수는 있지만, 미국 기준에 비춰보자면 결코 예쁜 얼굴은 아니다. 한국 기준에 비춰서도 아니다. 손보면 더 나아질 만한 부분들도 좀 있다. 그 남학생이 한 말은 “이미 쌍꺼풀도 있고 코도 높잖아요”라는 뜻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말만큼 내가 이 나라에서 누리는 특권을 잘 보여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 글: 라라, 번역: 권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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