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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를 발견한 아들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7. 월경 이야기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생리대가 뭔데?
“엄마, 대체 화장실에 있는 그거 뭐야?”
화장실 선반에 올려놓은 가끔씩 보이지만 이내 며칠 만에 없어지곤 하는, 도통 사용처를 모르겠는 물건을 보고는 아들이 물어왔다.
“생리대야, 엄마꺼.”
“생리대가 뭔데?”
그렇지, 월경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생리대라 말한들 그 쓰임을 알 수 없지.
“여자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월경이라는 걸 시작하게 돼. 대개 한 달에 한 번, 짧게는 3일 정도에서 길게는 일주일도 넘게 몸에서 피가 흐르거든. 그럴 때 속옷에 그 생리대를 착용하면 흐르는 피가 옷에 묻거나 하는 것을 방지하고, 생활하는데 편리한 점이 있지. 네가 본 생리대는 일회용품이고, 천으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도 있고, 여자들 몸에 직접 넣어서 피를 흡수시키는 종류 등 다른 것들도 많아. 여러 종류가 있지.”
“헉. 피나는데도 안 죽어?”
“나 지금 죽을 거 같니?”
“아니.”
“안 죽어. 월경은 위험한 것은 아니야. 인간의 몸은 여러 생리현상을 하잖아.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돼. 물론 사람에 따라서 불편감을 느끼기도 하지. 엄마 같은 경우는 허리가 많이 아파. 두통도 심하고. 그런데 모든 여성이 월경을 한다고 다 아프진 않아. 아프다고 월경이 병인 것도 아니고. 각자의 몸은 각자의 인생만큼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니까.”
“아하, 그래서 오늘 계속 신경질이 났군.”
녀석에게 은근히 잔소리를 쏟아 부었던 하루였나 보다. 허리는 아파오지, 할 일은 널부러졌지, 머리는 깨져올 것 같았으니, 꼬맹이 둘째에게는 어쩌질 못하고 첫째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네. 엄마가 월경 중이라 몸이 피곤해서 그랬나봐. 그러니 좀 봐줘.”
여성의 월경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와 오해
▲ 100명의 초경 이야기를 담은 책, 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 엮음 <마이 리틀 레드북>(부키)
오래 전에 월경 경험에 대해 개인적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여러 충격을 받았지만, 월경에 대해 무지한 남성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도 인상에 남는 기억 중의 하나다. 하물며 ‘한 달에 한번 피를 흘린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소변을 보듯이 피를 ‘딱 한번’ 흘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는 일반적 사례는 아니지만 말이다.
대부분 월경이 이루어지는 과학적 기제 정도는 중고등학교에서 생물을 배운 이상 알고는 있다. 다만 생물학적 설명과는 무관한, 여성들이 월경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어떻게 겪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거나 완전히 오해하고 있거나 혹은 무관심하다. 그러니 월경 중의 여성들을 향한 많은 말과 행동들이 무례하거나, 놀림이거나, 심하게는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더불어 여성들이 월경 중에 어떤 배려를 요구한다면 속사정을 알려하기도 전에 무조건적으로 투정이나 생떼라고 여기기도 한다.
아들은 그 다음날부터 며칠을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아직도 생리해?’ ‘오늘도 생리해? 내일도 할 거야?’ ‘계속 아파?’ ‘언제 안 아파?’ 물어댄다. 아, 그만하라고! 녀석의 목적은 어떻게 오락 한판을 얻어 낼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반복된 질문과 질문을 하며 취하는, 녀석의 눈치 보는 모습은 오히려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마치 직장에서 여자동료에게 “자기 오늘 그날인가 봐? 예민한 게…”하는 것 같잖아. 잠깐, 정말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 그래서 퍼뜩 “너, 엄마 놀리지 마” 했다.
“난 놀린 게 아닌데. 엄마 생리하면 불편하다며. 그러니까 내가 신경써주는 거지. 근데 나 오락 언제해도 돼?”하고 묻는다. “이것 봐, 진짜 엄마를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 너! 오락하고 싶어서 눈치나 보는 거지. 정말 엄마의 심신이 편하길 원하면 너 먹은 접시라도 좀 치워놓고, 저기 널부러진 만화책이나 책장에 꽂아놓으시지.” 아들은 만화책을 발로 대충 옆으로 밀면서 “그런가? 그럼 엄만 편히 있어. 나 오늘은 오락 안 할게”한다. 으이구. 거참 인심 크게 쓰셨네. 이토록 자기중심적이라니.
열 살짜리 아이라면 여자아이건 남자아이건 월경 중의 사람이 어떤 신체와 심정인지 추측하지 못할 테다. 그리고 그 나이 아이라면 누구라도 제 하고 싶은 욕구를 채우는 게 우선일 수 있다. 그러니 너, 앞으로 계속 좀 배우고 깨쳐야겠구나. 적어도 생리적 불편함을 겪는 이를 배려하는 일과 자기 욕구가 지연될까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의 차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배려하려면 너 언제 좋아지냐고, 너는 왜 불편하냐고 닦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에게 필요한 일을 스스로 찾아하는 거라고, 이 녀석아.
여성성을 둘러싼 어두운 장막, 금기와 억압
여성성을 둘러싼 어두운 장막의 상당 부분은 ‘월경’과 ‘월경하는 여성’에 대한 금기와 억압에서 기인한다. 그러니 월경하는 여성들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담론은 흔치 않다. 되려 월경 자체가 여성다움의 둘레를 견고히 하는데 활용되곤 한다. 그래서도 월경은 ‘단순히’ 생리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월경만큼 그 기능이 강조되는 생리 현상은 흔치 않다. 월경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적 기능에 과하게 부착되어서만 유통된다. 일상적으로 월경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의 사회생활, 필요한 물품과 요구되는 배려 등은 매우 사소하고 부차적인 취급을 받는다. 월경하는 여성을 배려하기 위한 세심한 관찰 따위는 없다. 그러니 월경 경험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려질 필요도 없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몸 경험들을 배려해 줄 수 있으려면 아마 다양한 몸들과 그 몸들의 변화무쌍함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상상력은 스스로의 몸 경험 속에서 깨치기도 하고, 주변 가까운 이들의 경험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터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경에 대해서는 이런 것들이 쉬이 발현되지 않는다. 월경은 늘 다른 취급을 당한다. 임신과 출산, 신성한 여성성의 지표, 미스터리한 여성성의 세계, 히스테리함의 전형,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월경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예제들을 극도로 적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남성들은 굉장히 손쉬운 방법으로 여성들의 월경 경험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일반화’해버린다. 하물며 여성들 스스로도 월경 경험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 월경은 금기시되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단순히 생리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다
할머니의 월경 경험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각자의 경험은 그렇다 치더라도 월경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그 사회적인 측면, 역사적인 측면도 생각해 보자.
여성들의 월경 경험은 역사 속에서 어떤 변화들을 겪었을까? 예를 들어 할머니와 나의 월경경험 중 유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는 월경통이 없었다는데, 나는 월경통 때문에 매달 고생한다는 점? 차이는 모두 이런 개인적 속성이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다. 생리적 현상만큼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것은 흔치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세대가 바뀔수록 월경통이 많아지는 이유로 흔히 환경 문제를 들고는 한다. 이렇게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원인이 어느 한 개인의 몸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런 구조적 원인이 어디 환경 문제 뿐일까. 월경 경험에 있어 세대 간 차이 중 가장 극명한 것은 월경 횟수일지도 모른다. 당연하지 않은가? 할머니들 세대는 죄다 6남매, 7남매 자녀를 두었다. 분유도 없던 시절 논에서 밭에서, 부엌 옆 쪽방에서 아이를 낳으신 할머니들은 대체 몇 년 동안이나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을 것인가. 얼추 계산해도 10년? 15년?
임신, 수유 중에는 월경이 없다. 그러니 할머니들은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는 동안 월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막내 낳고 몇 년 후에 바로 완경이 왔을지도 모른다. 과학적 상식에 기반한 상상만으로도 출산 경험의 유무에 따른 월경 횟수는 제각각이다.
내 지인 중에는 출산 경험뿐만 아니라 계획이 없는 이들이 많다. 그녀들은 할머니보다 적어도 세 배, 네 배 이상의 많은 월경 경험을 한다. 반대로 할머니들은 우리들보다 네 배, 다섯 배의 임신, 출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시기 여성들에게는 월경통이 생의 관심사인 반면 다른 여성들은 출산이 생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월경통이 심하면 누워서 허튼 상상들을 하고는 했다. 이렇게 아픈데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이 거사를 처리할까 하면서 말이다. 전쟁 시기를 지나온 여성들의 증언집을 읽을 때마다 이런 내용은 없는지 촉각을 세우곤 했다.
나치 치하 유대인수용소에 있던 여성들 대부분이 월경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상식적인 일이다. 극단적인 영양부실과 스트레스는 모든 생리현상에 치명적이다. 월경이라고 왜 아닐까. 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중에 너무 힘들어서 월경도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왕왕 있다. 소싯적에 나는 내 아픈 것에만 몰두하느라, 극한 상황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셈이다.
아들과 몸에 대해 수다 떨기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근데 생리는 왜 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월경의 기능을 늘 먼저 배웠기 때문일까, 혹은 지나치게 그 기능에 대한 강박적 말들에 익숙해서일까, 나는 월경 기능을 설명하는 일이 너무 지겹다. 하마터면 묻지도 않았는데, 월경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 어쩌고저쩌고 말할 뻔했다. 녀석이 어려서일까, 몸이 치르는 생리적 현상의 ‘기능’을 굳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생리적 현상이라는 게 뭐 그렇지, 하면 하는 거지. 그게 몸이지 하는 분위기다. 아이는 쉽게 이해한다. 오호라. 괜찮네.
여하간 임신 출산 경험을 연결시키지 않아도 아이에게 월경에 대해 설명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이 치르는 다양한 일을 각자의 경험에서 담담히 이야기하는 것이 쉽고 편하며 가장 구체적이다.
몸이 치르는 일, 치를 일을 설명하는데 너무 겁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 오히려 그런 강압은 무언가 ‘정밀’한 정보를 주려는 것과 결부되는데. 흔히 몸의 성적인 현상들은 유독 그러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정자, 난자부터 들이미는 일들. 물론 이런 구체적 이해들이 꼭 필요하지만 그것 이외의 다른 몸 경험들이 같이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아들에게 사춘기 남자아이 몸의 변화에 대해 미리 알려주기 위해 슬쩍 책을 건넸던 적이 있었다. 내 딴에는 꽤 우수한 책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아들의 감상평은 한마디.
“난 정자 만들기 싫은데.”
“왜?”
“아니, 내 몸 속에 올챙이들을 키우라고? 미쳤어, 엄마?”
푸핫. 이 첫인상을 어찌할꼬. 핵심은 올챙이가 아니라 너의 몸이 이제 곧 격변의 시기를 맞을 것이라는 사실인데, 격변의 원인이자 결과처럼 지목된 그놈의 올챙이가 문제구나. 여하간 앞으로는 아들과 몸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수다를 떨어야겠다. ▣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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