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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온 여성들의 반란, ‘그 xx’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이제 퉁 치지 말자①
※ ‘문화기획달’에서 한국여성재단의 후원으로 2016 농촌 페미니즘 캠페인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이제 퉁 치지 말자”>를 진행 중입니다. 이 캠페인의 배경과 진행 과정, 그 안에서 제기된 쟁점과 대안에 대해 예민하게 짚어보는 연재 기사를 싣습니다. -편집자 주
소박하고 대안적인 삶을 찾아간 농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리산 자락, 그 너른 품에 자리 잡은 농촌 산간마을 ‘살래’(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산내면을 주민들이 발음 나는 대로 일컫는 지명). 뱀사골 계곡물에서 흘러나온 만수천을 옆에 끼고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에 이르는 둑방길을 걸어가노라면 싱그러운 초록이 흙내음을 타고 펼쳐지고 유유자적 흐르는 구름이 저만치서 산등성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귀촌을 결심하고 혈혈단신 살래로 내려왔을 때, 지리산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림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정겨운 사람냄새가 그리웠던 사람들이 단순 소박한 삶을 꿈꾸며 도시에서 살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떠난 살래에 다시 도시 청년들이 들어온 것이다. 1998년 실상사 귀농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된 귀농귀촌의 행렬이 꾸준하게 이어졌고 살래는 어느덧 전라도 면단위에서 귀농귀촌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되었다.
▶지리산 품안에 자리 잡은 농촌산간마을 ‘살래’ (남원시 산내면) ⓒ문화기획달
귀농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지향점과 가치관, 태도가 모두 변하지 않으면 도시와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는 농촌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귀농학교에서는 농사 기술 이외에 농(農)적인 삶에 대한 철학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의 대전환을 거쳐 마주한 농촌은 대안적인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성지처럼 보였다.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어른들의 삶의 질서에 융화되고 공동체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의 풍습을 따르기 위해 늘 몸을 낮추었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몸의 감각을 지니고 근검절약하는 농촌 주민들의 바지런한 삶에는 배우고 따라야 할 것들이 많았다.
농촌에서 새롭게 부여받은 ‘여성’이라는 올가미
물질만능주의, 자연 파괴적인 기술문명, 빠르고 경쟁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벗어나 새롭게 마주한 농촌의 가치는 기필코 복원해야만 하는 높고 거룩한 이상처럼 느껴졌다. 오는 사람 정답게 맞이하고 가는 사람 손 붙잡으면서 ‘한 술 뜨고 가’라고 말해주는 이웃들, 그들과 둘러앉은 밥상에서 오랜만에 사람 냄새를 맡았다.
남의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손을 모아 농사일이며 집안과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하고, 이어지는 풍성한 술상에서 회포를 풀고 나면 사람 사는 데 뭐가 더 필요할까 싶었다. 마을행사에만 가면 상다리가 부러질 새라 푸짐한 먹을거리가 올라오고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기분 좋게 술 몇 잔 걸치고 도시에서는 눈치 보여서 못하던 농지거리라도 질펀하게 늘어놓고 나면 속이 다 후련했다. 남자들은.
남자들은 그랬다. 도시에서 온 남자들이 농촌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차려주는 밥상에 앉는 거다. 가만히 앉아서 물 달라, 반찬 달라, 하면 허리가 구부러질 정도의 할머니도 물도 갖다 주고 반찬도 갖다 준다. 반면 도시에서 온 여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고 투입되는 분야는 부엌일이다. 마을회관, 집들이, 각종 마을행사와 축제에 거대한 밥상을 차리기 위해 부녀자들이 동원된다. 명목은 이렇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이것이 농촌의 성역할 규범이고 모두가 따르고 존중해야 할 농촌의 문화였다.
▶농촌의 주요 노동인력인 부녀자들. 농촌에선 여성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문화기획달
그런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 농촌에서는 여성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직장생활 또는 농사일, 살림과 육아, 마을행사 음식을 준비하는 것 모두 여성의 일이다. 농촌에서 남자가 맡는 바깥일은 일 년에 몇 차례 하는 노동집약적인 일에 한정된다. 그리고 이 일이 여성이 차려준 밥상을 1년 365일 받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제스처로 둔갑한다.
도시에서 한 가닥 하던 센 언니들도,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페미니즘 운동을 하던 왕년의 활동가들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일했던 커리어우먼들도, 농촌에 와서는 젠더 감수성을 내려놓고 가부장적 농촌 문화에 스며들었다. 생존을 위한 전략적 포기이기도 하고 좋은 이웃, 좋은 관계에 발목 잡혀 퉁 치고 지나가는 무력한 자기기만이기도 했다.
그 안에 낮은 신음소리가 있음을,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있음을, 숨죽여 흘려야했던 눈물이 있음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우리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온 외지 것이었고 게다가 여자였다. 도시에서 온 낯선 여자가 어울렁더울렁 사이좋게 살아가는 농촌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토록 원하고 꿈꾸던 농촌에 왔지만 그렇게 버리고자 했던 여성이라는 낙인을 농촌에서 새롭게 부여받았다. 벼랑 끝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항은 농촌 마을이라는 소우주에서의 추방을 의미했다. 술 취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 침입하려는 일이 발생해도 쉬쉬해야 했다. 마을을 떠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경찰에 신고하거나 외부에 발설할 수 없었다.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위태로운 여자’로 보는 시선이 비혼(非婚) 여성들을 따라다녔다.
이 모든 것들이 거북하고 불편하고 여성의 삶을 위협했지만 생태적인 삶, 여유롭고 소박한 삶,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이라는 원대한 귀농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대가라고 여겼다. 이것이 농촌을 지켜온 어르신들의 모습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숨지으면서. 도시에서 억눌렸던 남성성을 회복하는 기회라고 여기며 호기로워하는 남자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면서.
▶ 농촌 여성들은 힘겨운 농사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이 쉬는 동안 밥상을 차려야 한다. ⓒ문화기획달
변화의 물꼬를 만들어낸 수다방이 열리다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봄. 살래에서 ‘문화기획달’이라는 1인 기획사를 차린 달리가 생활밀착형 B급 교양문예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를 발행하기 위해 여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출판으로 창간호가 나오고, 계절마다 꼬박꼬박 발행되어 다수의 정기구독자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가을호(통권 7호)를 통해 농촌 여성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글스>의 대담 코너인 “떴다 수다방”에서 ‘그 xx’라는 주제를 놓고 수다를 떨기 위해 필진 중의 몇 명이 모였다. ‘그 xx'에 대해서 어떤 단서도 정의도 설명도 없이 수다방이 열렸고 여성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억울했던 일, 불편했던 일, 위험했던 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농촌에서 만난 ‘그 xx’는 술자리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여성을 희롱하고 추행하는 것을 남성적인 것으로 여겼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비혼(非婚) 여성에게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구 꼬이려고 저러고 다녀?”라며 단속했다.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나쁜 남성성이 강화되고 그 안에서 여성이 여성을 감시하는 농촌의 현실이 여과 없이 폭로되었다.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놀랄만한 사건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르는 척 지나갔을 뿐이다. 우리가 진짜 놀랐던 것은 이런 일들을 말해도 된다는 거였다.
“퉁 쳐서 넘어갔던 것을 예민해지게 했던 기나긴 수다였다. 속 시원하게 한 바탕 풀어놓고 나자 함께 도모할 일에 대한 상쾌한 흥분이 밀려왔다. 일상에서 내가 소중하게 다루어진 경험이 판타지로만 남을 때 삶은 일탈적인 로맨스에 갇히게 된다. 따뜻한 시선이 머무르는 자리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애정 어린 관계를 맺어가는 것, 사람과 사람이 모멸과 멸시가 아니라 감동을 주고받는 것, 그녀들이 들려준 ‘그 xx’는 이런 갈망을 함축하는 절실한 호소였다. ‘그 새끼’가 아니라 소중한 xx로 남기 위해 우리는 모두 거룩한 존재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어여삐 보듬어주는 세상을 향해 함께 걸어 나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든든함이 느껴졌다.” -<지글스> 2015년 가을호. 떴다 수다방 ‘그 xx’에서 인용
누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한 명의 목소리만 담겨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목소리에 두 명의 목소리가 겹쳐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숨겨왔던 불편함과 억눌렀던 분노를 마주했다. 두려움 속에 키워왔던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우리는 현실 앞에서 아무도 눈을 감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지도 않는다. 어렵게 마주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집 안팎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농촌여성. 마을회관엔 늘 쪼그려 앉아 음식을 준비하는 여성들이 있다. ⓒ문화기획달
우린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농촌에 온 게 아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자들은 변화의 조짐을 감지했다.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생각한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조선 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계승하고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농촌에 온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생명들이 모여 있어야 건강한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다양한 개인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며 다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찾아 농촌에 온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퉁 치고 지나갔던 일상에 제동을 걸려고 한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짓고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하는,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는,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묵인해왔던 관습과 문화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1인 기획사에서 시작한 ‘문화기획달’에 두 명의 활동가가 함께 하게 되면서, 세 명은 농촌 여성들의 자유롭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떴다 수다방”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연대와 지지를 통해 농촌 페미니즘 캠페인을 기획하게 되었다.
2015년 겨울,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이제 퉁 치지 말자’가 한국여성재단의 성평등사회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2016년부터 살래에서 페미니즘 캠페인에 돌입했다. 첫 출발은 살래와 인근 지역 여성주민들과 함께 하는 공개적인 수다방 <여자들의 토크파티-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이다. 본격적인 수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명심.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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