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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통증을 무시해온 ‘마음’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몸을 인식하다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그 날>에서

 

울화, 화병…내 몸을 설명하는 말들

 

▶ 자화상. 2002년 예술치료에서 그린 몸의 이미지.  내 몸이 다 죽어가는데, 아르테미스 원형의 여전사의 몸을 그렸다.  ⓒ김혜련


“참… 둔치에요, 둔치! 몸이 이 정도까지 되려면 아파도 아주 많이 아팠을 텐데, 그걸 못 느끼다니…”

 

몸이 아프면 주변에서 많은 것을 권한다. 자신들이 효과를 봤거나 용하다는 곳을 소개한다. 한의원이나 자연치료나 통합치료 등등… 내가 찾아간 암 치료에 탁월하다는 한의사는 아픈 곳을 다 열거하게 했다. 일종의 문진(問診)이었다.

 

‘오른쪽 다리 무릎 근처 뼈 속에 양성인지 악성인지 모를 혹이 있음. 자궁 근종이 세 개( 제일 큰 것부터 각각 6, 4, 3센티) 늘 온 몸이 시리고 아픔. 쉬이 피로함. 소화가 잘 안되고 위가 자주 아픔. 변비. 잦은 배뇨. 잠을 잘 들지 못함… 왼쪽 무릎 연골 파열, 목 디스크…’

 

그는 내가 몸의 통증에 너무 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온 몸이 울화(鬱火)로 꽉 차서 기혈이 다 막혀있어 몸이 아프고 근종 같은 혹들이 생겼다고 했다. 만성 피로도 그렇다고 했다. 사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지리산 수행처를 찾아갔을 때 스승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수 십 년간 자연의학을 공부해온 그는 날 보자마자 이 몸 가지고는 수행이고 뭐고 안 된다고 단언했다. 몸이 다 망가져서 제 기능을 못하는데 무슨 수행이냐고. 그는 여러 가지 요법으로 내 몸을 돌봐주었다. 단식을 하고 뜸을 뜨고 ‘경옥고’나 ‘공진단’ 같이 몸을 보하는 약을 만들어 먹게 했다.

 

수련원에는 기(氣)치료사나 지압하는 사람, 자연의학 연구자, 한의사, 돌팔이 의사… 등등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나를 본 그들은 하나 같이 몸이 이 지경이 되면 많이 아플 텐데 본인이 자각을 못한다고 의아해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내 몸의 증상들이 ‘울화’에서 온 것 같다고 진단했다. 소위 화병이라는 거다. 몸에 울혈이 차서 순환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내 몸이 갈 때까지 갔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전과 같이 몇 년 더 살았다면 아마도 불치병을 얻었을 거라는 막연한 직감 같은 것. 그러나 그건 그저 생각일 뿐, 난 몸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몸 따위야 어찌되든 알 바 아닌 게 나였다. 그들의 말을 과장이라고 폄하해 버리거나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나는 마음을 닦는 데 관심이 있었지 몸을 돌보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스트레스 많이 받는 일 있어요?”

 

한의사가 울화가 꽉 찼다며 묻는 말에 글쎄 싶었다. 그건 과거의 이야기다. 오랜 동안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현재의 몸이 되었겠지.

 

‘울화’라는 말은 가슴에 와 닿았다. 여자들에게 많다는 화병의 증상을 처음 느낀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독재자 폭군 같은, 힘 센 엄마에게 대항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면서 난 가끔씩 명치끝에 돌덩이 같은 것이 치받혀 오르는 걸 느꼈다. 숨이 가빠지고 열이 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었다. 울화통이 터지는데,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무기력한 느낌은 평생 나를 지배해 온 우울로 내 몸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런 일이 없다. 아니,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런 내 느낌을 믿을 수 있을까?

 

▶ 수행처. 수행하던 시절 여러 수행자들과 함께 한 수련. ⓒ김혜련

 

언제나 몸이 정신보다 더 정직했다

 

지리산 수련원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여러 수행자들이 있었다. 보살처럼 우아한 사람도, 영혼이 아주 해맑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선방(禪房)에서 살인(殺人)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도 되었다.

 

수행처는 자기 결핍, 또는 욕망으로 힘든 사람들이 모여서 24시간 같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니 자기 안의 온갖 유치하고 이상한 면들이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나고, 서로 그것으로 부딪히고 했다. 특히 스승의 사랑이 누구에게 더 가는가에 아주 민감했다.

 

나는 스승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수행자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들이 보내는 유언무언의 질투를 받아야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난 그들의 시기질투를 받아들였다.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몸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위가 아프기 시작했다. 마음은 괜찮은데 몸은 괜찮지 않았다. 몸과 마음의 분리. 오래된 내 습관이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몸이 더 정직했다.

 

“아주 예민한 몸인데 그 몸에 대한 느낌이 왜 이리 둔할까? 명상을 오래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의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사의 짐작은 맞지 않았다. 내 몸에 대해 둔한 건 내가 몸을 무시해 온 오랜 역사 때문이다. 난 몸 같은 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살아왔다. 몸이 뭘 느끼는지, 아픈지, 어쩐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몸과 마음의 분리, 착란

 

▶ 자화상.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일종의 해리 상태인 나. ⓒ김혜련


“대화, 대화… 이 열차의 종착역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모두 내려주십시오.”

 

지하철 안의 방송이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내릴 채비를 한다. 나도 졸다가 깨어서 그 방송을 듣고 있다. 그런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귀는 듣고 있고, 머리는 내려야지 생각한다. 그런데 엉덩이와 다리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그냥 멍청히 있다. “내려~!” 명령을 하면 재깍 일어서던 사지가 죽은 듯이 꼼짝 하지 않는다. 겨우 팔을 움직여 양손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면, 쓰러진 부상자가 일어나듯 천천히 몸이 움직여졌다. 지하철에서 나와 집까지 십 오 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걸을 힘이 없어 역 바깥에 놓여 있는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학교를 그만 두기 몇 년 전부터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엇을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즐겁지가 않았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 하며 신나게 수다를 떨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모처럼 여행을 해도 즐거운데 짜증이 났다. 분명 즐겁고 기쁜 상황인데 ‘짜증’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올라왔다. 그 비정상적인 상황이 뭔지, 왜 그런지 몰랐다. 그게 몸이 질식해가는 증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이 그 지경이어도 ‘나는 건강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건 이상한 마비 상태였다. 일종의 정신착란 같았다. 몸의 모든 정황이 비상사태를 알리고 있어도, 그것에 무심하고 심지어 건강하다고까지 믿고 있었던 착란을 설명할 길이 없다.

 

몸이 하는 말을 전혀 아랑곳 않고 독재자 폭군처럼 제 마음대로 ‘건강하다’고 규정하고 그 몸을 계속 착취하는 이 마비된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몸과 마음이 어떻게 이리 심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그 분리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내 몸의 역사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평생 몸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돌볼 줄 모르는 나의 상태는 내 몸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 십 여년 살아온 내 몸은 숱한 시간 몸의 경험이 중첩된 몸이니 말이다.  (김혜련)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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