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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몸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내 몸의 역사①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우리의 어릴 적 진실은 우리 몸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 아이들만큼이나 몸은 타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 몸은 우리가 진실을 외면하기를 멈출 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고문할 것이다.” -앨리스 밀러(아동 심리학자)

 

1. 매 맞는 몸

 

내 몸에는 돌봄을 받지 못한 기억이 뚜렷한 상흔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왼쪽 발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돌쟁이 몸의 기억.

 

“글쎄, 얼마나 순해빠졌는지 울지도 않고 그저 끙, 끙 앓는 소리만 내고 있더라고. 천덕꾸러기라 그랬는지…. 하긴 태어나자마자 ‘지지배다’ 하면서 지 할미가 군용 담요에 둘둘 말아 방구석으로 밀어놨으니까. 내가 젖몸살이 심해서 젖도 안 나오고, 그냥 죽으라고 사흘 동안 놔뒀는데, 죽었나하고 들춰봤더니 ‘낑’하고 살아있더라고. 천덕꾸러기는 목숨도 질긴지.”

 

중학교 때 이모가 내 발목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마치 발찌처럼 보이는 둥그렇게 살이 돋아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엄마에게 물었을 때, 심드렁하게 엄마가 한 말이었다. 양말을 신기고 고무줄을 동여 매어놨는데, 그걸 얼마나 심하게 졸라맸는지 고무줄이 살을 파고 들어가 뼈가 허옇게 드러났더라는 이야기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울지도 않고 하루 종일 끙끙 신음소리만 냈다고.

 

천덕꾸러기는 목숨도 질기다는, 엄마 뒤에서 나는 소리 없이 울었던가…. 한창 예민한 나이에 그 말은 비수(匕首)였다. 내 안에 있던 연약한 유리막이 산산조각 나 온 몸에 유리조각이 박히는 것 같았다.

 

다섯 살 때의 몸이 생각난다. 작은 팔뚝과 다리에 피멍이 여기저기 맺혀 있다. 무언가에 쓸린 듯한 흔적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무엇으로 긁힌 것 같기도 하다. 빗자루 자국이다.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갔다 돌아온 엄마가 보이는 대로 잡고 때린 흔적이다. 내 몸은 매 맞는 몸이다. ‘첫날 밤에 들어선 웬수'의 몸이고 ‘천하에 쓰잘 데 없는 지지배’의 몸이다.

 

2. 따돌림 당하는 몸

 

▶ 내 몸 속의 몸들.   ⓒ 김혜련


“이거 누구 거니? 임자 없지?”

 

내 눈앞에서 교과서와 공책이 찢기고 연필이 분질러진다. 머리카락을 뽑히고, 팔목을 꼬집힌다.

 

“난 쟤 눈만 보면 무섭다, 칠판이 뚫어질 것 같아. 너희들도 좀 그래봐라!”

 

말 안 듣고 떠드는 초등 사학년 아이들을 다루기 힘들었던 담임의 말이었다. 광산촌 아이들에게는 계급 서열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과계장인 아이들과 일반 광부의 아이들. 사는 장소도 나뉘어 있다. 관리직의 아이들은 귀족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모르는 초임 교사의 말실수가 따돌림의 시초였다. 소수 귀족과 그들의 충실한 근위병들의 괴롭힘을 심하게 받았다. 키가 작아 늘 일번을 하던 나는 속수무책 당했다. 변소에 다녀오면 내 물건들은 죄다 찢기거나 부러져 교실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지나가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팔목을 비틀고 꼬집었다.

 

집에 가면 엄마가 사라진 학용품에 대해 추궁했다. 그건 엄마가 친정에서 받은 버스비를 아껴 사준 것이었다. 아직 이른 봄, 버스 대신 트럭 뒤에 얻어 타고, 찬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아낀 돈이었다. 차마 말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도, 그 물건이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도. 그냥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게 어떻게 사준 건데…” 울화통이 터진 엄마의 매질을 받는다. 초등 사학년 때의 지독한 따돌림의 고통은 내 몸에 새겨져 있다.

 

3. 누추한 몸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고, 못돼먹은 년은 젖퉁이만 크단다!”

 

열네 살, 사춘기의 징후가 일어나는 내 가슴이 볼록해지자 엄마가 한 말이다.

 

“지지배가 어린 게 멋만 들어서….” 가슴을 감추려고 하는 내게 엄마는 옷을 빼앗는다. 그냥 얇은 넌닝 한 장을 입고 동생을 업고 다닌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내 가슴만 쳐다보는 것 같다. “젖퉁이만 큰 년, 젖퉁이만 큰 년~”

 

동생을 업고 아버지 마중을 간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저잣거리. 버스에서 아버지가 내린다. 베레모를 쓰고 잿빛 바바리의 깃을 올린 멋쟁이 아버지와 잘 차려 입은 몇몇의 초등생들이 “선생님, 선생님”하며 아버지 앞뒤를 따른다. 전봇대 뒤로 숨는다. 내 몰골은 스스로 부끄럽다. 아버지가 곁을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반가워 나선다. 아버지와 내 눈이 딱 마주친다. 순간, 아버지는 날 외면한다. 화려한 아이들에 둘러싸인 멋진 아버지는 사라진다. 한 뼘 앞에서 아버지는 내 존재를 뭉개버린다.

 

(※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도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거나 광산에서 광부로 일을 했다. 죽어도 안하겠다던 ‘선생질’을 시작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이 되었을 때다. 자유당 말기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건지,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의 좌절인지, 그 이유는 성장해서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다만 아버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렸고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된 교직에서 주로 미술교사 역할을 했다.)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한다. 수치와 굴욕, 혐오로 온 몸이 굳는다. 몸을 없애버리고 싶다. 몸이 없는 세계를 꿈꾼다. 문학의 세계로 달아난다. ‘누추한’ 몸과 ‘빛나는’ 정신. 빛나는 정신의 세계가 없다면 이 추악한 몸을 어떻게 견딜까. 나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문학의 세계에 탐닉한다.

 

4.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몸

 

“남의 식구 될 지지배가 공부는 무슨 공부!”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위로 양은 밥상이 내리쳐진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온 내게 화가 난 엄마는 밥상이든 연탄집게든 보이는 대로 집어 던지거나 내리친다. 한 겨울 고무장갑도 없이, 찬 물에 빨래를 하는 내 손등은 벌겋게 터져 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대학을 가겠다고 학교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 돌아온 첫날, 집의 문은 잠겨 있다. 식구들 중 누구도 그 시간까지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문을 잠그고 다들 자고 있다. 겨울 새벽 집 밖에서 온 몸이 꽁꽁 언다.

 

한참 애를 쓰니 허술한 창문 걸쇠가 삐걱거리며 열린다. 방에 들어 가, 자고 있는 사람들 한쪽 구석에 쓰러져 눕는다. 눈물이 방바닥을 적신다. 아무도 나를 걱정하는 사람 없는 집에서 내 몸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는다.

 

몸은 기억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익숙한 나는 내 기억 속 심리의 과정들은 거의 다 꿰고 있다. 나의 자존감 낮음, 자기혐오나 우울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오래 바라보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몸은 아니다. 많은 경우 몸의 기억은 마음과 얽혀 있다. (심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수지 오바크는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몸에서 읽어낸 것을 몸의 언어로 개념화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지적 능력은 겨우 걸음마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몸 자체의 기억들은 낯설다. 그것은 마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물리적이다. 숨 쉬기가 불편해지고 가슴이 답답하다. 그만 두고 싶다.

 

지금 와서 이 고통스런 기억들을 불러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그건 젊은 시절 할 만큼 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에는 거대한 나무뿌리처럼 얽히고설킨 세상사를 너무도 많이 알아버린 나이가 되었다.

 

내 경험은 단지 ‘누구 탓’이 아니다. 그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그 여성이 맺는 관계와 오랜 가족사의 문제다. 나아가 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 이래 전쟁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이 가족 내의 아동학대와 방치, 여아에 대한 성추행인 것이다. ‘전쟁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한 명이라면 그 열 배의 아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위태롭게 생활한다.’(베셀 반 데어 콜크<몸은 기억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여자(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몸의 경험을 불러냄으로써 정확한 자기인식에 도달하고 싶은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몸’을 통한 자기 발견. 몸의 영역은 미지의 세계와도 같다. 난 뭘 무시했는가? 왜 무시했는가?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어쩌면 그 발견이야말로 마음보다 정직한 자기발견일지 모른다.

 

▶ 점점이 피가 배인 지하실처럼 뭉뚱그려진 어둡고 습한 배경  ⓒ 김혜련

 

지하실처럼 어둡고 습한 삶의 배경

 

그런데, 몸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일까? 즐겁고 기쁜 몸은 없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기쁜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 벌판에서 땔감을 줍던 기억. 흰 눈이 가득한 벌판에 서서 무언지 모를 환희로 몸이 떨렸던 기억이 있다.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고 산딸기를 따러 다니던, 활기 넘치는 몸의 기억도 있다. 학교만 갔다 오면 나물을 캐러 갔다. 주로 나물죽으로 연명하던 어린 시절 그건 일용할 양식이었다. 나물들은 대부분 손으로 뜯지만 더러는 칼로 뿌리 부분을 끊어야 하는 것도 있고 뿌리째 캐내야 하는 것도 있다. 부드러운 나물순의 감촉, 작은 손칼이 푹신한 땅으로 쑤욱 들어갈 때 느껴지던 손의 감촉, 달래 같은 것의 뿌리를 다치지 않고 캐기 위해 호미로 땅을 파헤칠 때의 촉감… 그런 몸의 기억은 지금 이 나이의 몸에도 남아있다. 손끝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손이 든든해지기도 하는 기쁜 기억…. 또 있다. 쓰레기 하차장에서 놀던 기억. 온갖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놀던 몸, 그 몸은 즐거웠다.

 

몸의 기억 중 즐거운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건 주로 자연이었다. 광산촌이지만 산골에서 자란 내 몸은 자연과의 접촉에서 기쁨을 느꼈다. 사실 대부분의 유년기는 무엇을 해도 기쁜 몸이 아니던가. 가난하든, 전쟁 속에 있든 그 몸은 기쁜 몸이다.

 

언젠가 한 지인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세상을 믿고, 모험을 하며 살아가는 동력이 있다고. 자기 안엔 언제나 “둥게둥게” 하는 기쁜 몸의 소리가 있다고. 어릴 때 엄마가 목 가마를 태우고 “에구 우리 예쁜 막내딸, 둥게~ 둥게~”하며 저물녘의 골목길을 거닐었던 기억. 몸이 올랐다 내렸다 할 때의 즐거움, 엄마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든든한 느낌. 그 기억이 자기가 세상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의 든든한 배경이라고.

 

박완서 선생의 글도 떠오른다.

 

“이 나이에, 머지않아 증손자 볼 나이에도 지치거나 상처받아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이불 속에서 몸을 태아처럼 작고 불쌍하게 오그리고 엄마, 엄마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서럽고도 서럽게 엄마를 찾는다면 누가 믿을까...내 시름에 겨워 엄마,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 끝도 없이 옛날 생각이 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부르면서 마음이 훈훈하게 젖어오면 오그려졌던 몸이 펴진다.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은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젖줄이다.” -박완서 “증손자 볼 나이…난 지금도 엄마가 필요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나는 내 안에서 날 불러주는 다정한 음성이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내 기억의 갈피에서 다정하게 “혜련아”라고 불러주는 목소리가 없다. 내 존재 자체가 그저 사랑스러워서 나오는 음성을 들은 기억이 없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냥 단편적인 몇몇 상황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건 뭉뚱그려진 삶의 배경 같은 것이다. 일종의 분위기이다. 장마철 잠시 해가 났다고 장마철을 빛나는 해의 계절로 기억하지 않는다. 장마철은 눅눅하고 습한 계절이다.

 

내 몸의 역사는 돌봄 받지 못한 몸, 천덕꾸러기의 몸, 매 맞는 몸, 따돌림 당하는 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몸, 수치스럽고 추한 몸,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는 몸, 이무도 걱정하지 않는 몸…이다. 점점이 피가 배인 지하실처럼 뭉뚱그려진 어둡고 습한 배경이다.  (김혜련)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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