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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오르가슴을 말하다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몸해방 프로젝트⑧ _하리타

 

※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와 삶의 변화를 통해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몸해방 프로젝트” 편이 이어집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나의 가장 순수하고 내밀한 기쁨, 자위

 

이번에는 여성의 자위, 여성 고유의 성적 욕구와 에너지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사실 좀처럼 글을 써내기 어려웠다. 정치판이 막장이고 시국이 이리 어지러운데, 한국의 동지들은 주말마다 촛불집회 다니기 바쁜데 웬 자위타령? 하는 자기검열의 목소리도 들렸고, 심난한 뉴스, 밀린 일 더미,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내 성적 에너지는 요즘 바닥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한편으론 기쁨과 쾌락을 찾아야하는 것 아닐까? 사는 게 힘들다고 모든 이가 자위하길 멈춘다면… 사회가 얼마나 더 광기와 폭력으로 가득찰지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내게 자위는 ‘가장 순수하고 내밀한 기쁨’, ‘내가 나의 의지로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쾌락’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물론 아니다. 나는 자위라는 세상을 만나고, 인정하고, 그곳에서 활보하기까지 무수한 벽들을 깨고 나와야했다. 담장 또 담장, 문 또 문으로 둘러쳐진 아흔아홉 칸 기와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규방(유교 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이 제한되었던 양반집 규수들의 생활공간)을 마침내 뛰쳐나온 거다.

 

※ 대다수의 인간이 성적인 존재이며, 성적 충족을 추구한다는 전제를 갖고 이 글을 쓰지만 나는 세상에 무성애 성향을 가지거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염두하고 있다. 또 이 글에서는 인터섹스나 여러 젠더퀴어의 경우가 아닌, 확정된 여성 섹슈얼리티 입장에서 여성 혹은 남성 파트너와의 섹스를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자위에 대한 무한 예찬이 나오더라도, ‘성적으로 활발한 것이 당연한 가치’라는 메시지로는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의 자위에 덮어씌워진 불명예

 

▶ 1995년에 생긴 미국 ‘자위의 달’ 캠페인 포스터. 샌프란시스코 한 섹스숍에서 시작한 것으로, 공립학교 성교육 프로그램에서 자위를 장려하던 교사가 해고된 사건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출처: heavy.com


‘자위? 그걸 왜 해. 넘치는 성욕을 주체 못하는 남자들이나 하는 건데. 추접해. 여자가 자위를? 대체 얼마나 밝히길래? 교회에선 자위가 죄악이라던데….’

 

부모에게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신문 칼럼에서, 가정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다 보면 자위를 이렇게 취급하게 된다. ‘자위는 섹스의 열등한 대체제다’, ‘남자는 성욕이 넘쳐 자위를 통해 해소해야 하지만 여자는 그 정도의 성욕이 없다’, ‘자위는 부끄러운 짓이다’ 등의 근본 전제들도 내면화하게 된다. 나 역시 예전엔 여기 가로막혀 마냥 부정적이었다. 막상 자위를 하면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아예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성의 권리나 온갖 젠더 불평등 문제에는 촉각을 세웠던 나인데, 여자들이 순결이니 정숙이니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섹스를 해야 한다고 믿었으면서도, 자위하는 여자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는 무덤덤했다. ‘자위하는 여자들도 있긴 있겠지. 그런 사람들은 성욕이 유달리 많은가? 연애를 오래 안했나?’ 라며 나와는 무관한 얘기로 선긋고 있었으리라.

 

스물세 살에 쾌락의 열쇠를 찾다

 

그러던 어느 날, 때는 스물세 살의 겨울.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과 마침내(?) 섹스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 반전. 별로였다. 영 시원치 않았다. 애무에 무능하고 무관심한 그 사람의 손길이 답답했고 각종 ‘결합’도 껄끄러웠다. 쾌감도 조금 고조되다 푹 꺾였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사람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집에 돌아와서도 몽롱하고 간질이는 기분이 계속됐다. 흥분도 됐다. 어느 새 나는 자리를 깔고 누워 현실에서 못 이룬 것들을 다 해보는 판타지를 펼치고 있었다. 이불 속에선 내 손이 몸 구석구석을 비비고 어루만지며 ‘하고’ 있었다.

 

퍼내도 퍼내도 다시 물이 고이는 촉촉한 샘을 만들고 붉은 석양 속을 관통하는 비행을 하고 까만 밤하늘에 형형색색의 폭죽을 마구 터뜨렸다. 그렇게 첫 오르가슴. 오르가슴의 황홀경은 학습된 수치심이나 죄의식 따위를 거뜬히 무찌르고도 남았다. 나는 전혀 부끄럽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아, 다음에 또 해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몸은 기억력이 좋다.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여섯 살 때 우리 집 베란다에 커다란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그 밑에서 나 혼자 손가락으로 보지를 살짝 살짝 건드리며 간질이던 것. 열 살 때 이불 속에서 언니랑 같이 서로의 젖꼭지를 핥아보거나 혀끝을 마주 대며 찌릿하는 느낌에 소스라쳤던 것. 그야말로 보지에 털도 안 났던 시절의 비밀스런 기억들이다.

 

언젠가 여자 친구들과 엠티 가서 진실게임을 할 때, ‘야한 비밀 말하기’가 주제로 나온 적 있다. 몇몇은 ‘알고 보니 자위’였던 경험을 털어놨다. 나처럼 아주 어릴 때 일이었다. 그런 애들은 그냥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란 거라고? 오늘날 유아교육학에서는 10세 이하의 남아. 여아 모두 스스로 성기를 만지며 그 감각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성감을 찾아내고 거기서 오는 감각을 음미하는 것, 즉 자위는 그만큼 자연스러운 행위다. 

▶ 자위하는 여자를 그린 일러스트.  ⓒ출처: womenshealthmag.com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주도권을 갖는 법

 

자위, 특히 여성의 자위를 나쁜 것, 열등한 것, 잘못된 것이라 퍼뜨리는 오랜 성담론이야 말로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이자 자연을 거스르는 왜곡이다. 여성들이 순진무구하게 살다가 결혼을 하고야 비로소 한 남성 파트너에 의해 성적으로 성숙되고 그의 방식으로 길들여져 ‘기쁨을 아는 몸’이 되도록 조장해온 가부장적 성질서.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33년 전 아빠와 결혼하고야 첫 섹스를 해본, 아직도 내가 ‘처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 엄마가 그랬고, 주일미사에 다니며 혼전순결을 지키다가 서른 전에 결혼해 이제 딸을 하나 둔 착실한 우리 언니가 그랬다.

 

‘자위하면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어서 좋아’ 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다. 자위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 그 자체니까. 그냥 느낌이 좋으니까 하는 거다. 하지만 이 얘긴 꼭 해야겠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부르짖는 몸에 대한 결정권이나 섹스에서의 주도권은 자위할 줄 아는 여자, 자위 잘 하는 여자들이 더 잘 챙길 수 있다는 나의 확신 말이다.

 

자위를 통해 성욕, 성감, 성애와 관련된 내 몸의 구조적, 감각적 반응 기제를 탐구할 수 있고, 이는 우리가 온전한 성적 주체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파트너와 교감하고 호흡을 맞추는데 집중하게 마련인 섹스, 소통 안 된 강박관념과 미묘한 권력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섹스에서는 ‘내 몸 탐구생활’이 더디고 미진할 수밖에 없다.

 

내 몸은 언제 성적 흥분과 자극을 원할까? 물론 배란기 때, 야한 장면을 보았을 때, 만지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또 뭐가 있을까? 내 성감대는 어디어디일까? 보지, 입술, 가슴은 당연하고. 귓볼이나 목, 겨드랑이는? 엉덩이나 등허리, 발목과 허벅지 안쪽, 배꼽 주변은? 언제 어떻게 만지면 어떻게 간질이나. 내 클리토리스는 얼마나 클까. 또 얼마나 커질까. 어떤 순서, 방향, 길이, 온도, 진동으로 만져줘야 그녀가 가장 화끈하게 희열할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감각이며 나의 것이기에 나만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이 답들을 잘 알면 성적인 기쁨과 괘락, 만족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물론 그 결정은 무궁무진한 조합의 선택지를 바탕으로 한다. 나아가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제어할 것인지는 (혹은 제어를 안할 것인지… 와우!) 그야말로 ‘그때 그때 달라요.’

 

자위 이후의 섹스

 

자위 안하던 시절의 나는 어땠나? 몸이 달아오르고 기분이 이상야릇해질 때도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섹스할 때 내 가슴, 내 클리토리스, 내 질이, 내 피부가 부풀고 꼿꼿해지고 촉촉해지고 초민감해지는데, 나는 손놓고 누워 잘하든 못하든 파트너의 손길에만 의존(!)했던 거다. 나도 잘 모르니 파트너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요청하기도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조금 더’ ‘거기 말고 좀 더 밑에?’ 그러니까 나의 불만족은 애무 잘 못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위 많이 해봐서 잘 아는 그들은 자기 성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섹스를 주도했고, 잘 모르는 나는 억울하게 그쪽으로 끌려간 거다.

 

남자의 자위는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시되기 때문에 사춘기 때부터 대다수 남자들의 생활은 수많은 ‘당연한 자위’로 점철된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에게 잘 먹히는 섹스는 예습 완료인 셈이다. 물론 섹스에 필요한 과정과 소통을 생략된, 화학조미료 범벅 인스턴트 같은 포르노에 의존한 예습이라는 거대한 함정이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자위 없이 섹스부터 경험한 몇몇 여자 친구들은 ‘섹스가 왜 좋은지 잘 모르겠던데’, ‘들어갈 때 딱 5초만 좋고 나머진 느낌 없어’ 같은 말로 날 경악케 했다. 그녀들은 자기 쾌락을 못 챙기고 파트너 남성의 욕구와 필요에만 맞추느라 그랬던 거다. 남성 파트너가 섹스를 좋아하고 중요시하니, 여성 자신은 좋은 줄 모르더라도 관계에서 섹스에 ‘의무’로 임한다. 그런 그녀에게 섹스는 엄밀히 말해 ‘노동’이다. 귀찮지만 적당히 해주고 대신 관계의 다른 부분에서 원하는 걸 얻어 상충하려는 경향도 생긴다. 무료봉사는 억울하니까. 다행히도 내 친구들은 대부분 다년간의 탐험 끝에 애초 입장을 번복했다. ‘나 요즘 섹스가 너무 좋아졌어. 중독될 것 같아!’ 오케이. 너도 이제 왔구나, 이 세계로. 격하게 웰컴!

 

▶ 거울을 보며 자위하는 두 여자. 연인일까, 친구일까? ⓒ출처: mytinysecrets.com

 

자위를 즐겨하게 되면서 나의 섹스는 확연히 달라졌다. 우선 파트너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의 의견이나 요청, 의지가 분명하고 자신감 있어졌다. 덕분에 섹스할 때 몰입을 방해하고 자괴감을 줬지만 표현하기는 어려웠던 마음속의 혼란, 불편함, 불만족, 적당한 타협, 눈치 보기가 많이 사라졌다.

 

섹스는 몸의 대화라지만, 고도의 지능이 있는 인간의 섹스는 언어를 동반할 때 더 섹시해지는 것 아닐까? 나는 여성 파트너와 섹스할 때는 신체조건이 비슷하다는 강점 덕분에 더 많이 대화하고 공감한다. 함께 또 번갈아 다양한 것을 시도하며 멀티플 오르가슴이 있는 긴 놀이로서 섹스할 수 있다. 남성 파트너와는 아직도 내게 껄끄러운 성기결합에서 나에게 맞는 자세, 결합 깊이, 강도, 길이, 타이밍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파트너와 함께하는 자위’ 컨셉의 섹스도 좋다. 이는 서로의 가장 은밀한 순간을 공유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자위는 보통 혼자 하는 거니까. 함께하는 자위에서는 성기결합보다 훨씬 쉽게 동시에 오르가슴을 맛볼 수 있다. 안전한 유리공 속에서 둘이 손 꼭 잡고 우주로 팡! 튕겨나가는 기분. 이걸 ‘동기화된 자위’(synchronized masturbation)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편, 번갈아 자위한다면 한 사람은 절정의 오른 상대방의 모습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그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에 깊이 감탄”하게 된다. 이건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이 늘 말인데, 그는 날 바라보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린 적도 있다. 함께하는 자위라는 관점에서 나는 섹스를 이렇게 표현하겠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에게 자기 몸의 ‘쾌락열쇠’를 빌려주는 것이라고. 자위가 바로 열쇠, 그 열쇠의 주인은 우리 각자이다.

 

※ 잠깐, 섹스를 잘하기 위해 자위를 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자위는 섹스의 대체제가 아니다. 섹스와 무관하게 자위는 기쁘고, 황홀하고, 짜릿하며, 삶의 위안이 되는 행위 그 자체다.

 

클리토리스, 정말 대단한 그녀

 

▶ 우연히 찾아낸 잇템! TypsyGypsies 브랜드의 음부 팬던트. 전복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디자인에 ‘완소’ 클리토리스엔 진주로 포인트를 줬다. 나에게 주는 연말선물로 당첨! ⓒ출처: etsy.com


자위를 할 때 궁극의 쾌락은 물론, 클리토리스가 책임진다. 과학전문 작가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는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Woman: An Intimate Geography, 1999)에서 한 장을 클리토리스 탐구와 찬양에 바쳤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클리토리스는 8천 개의 신경섬유 다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역할을 겸하지 않는 순수한 성기관이다. 입술이나 혀를 비롯한 신체 어느 기관보다 신경이 밀집해 있고, 남성의 페니스 보다는 두 배 많다고 한다. 말인즉슨,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의 최대치가 남성의 두 배라는 것. 남자들이 섹스에 그리 목을 매고도 막상 우리 여자들이 느끼는 것이 절반도 못 얻는다니… 쯧쯧.

 

클리토리스를 통한 여성의 어마어마한 성적 잠재력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체제 위협’으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질투와 은폐, 공격의 대상이었다. 프로이트는 별 근거도 없이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을 질 오르가슴에 비해 ‘미숙한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이를 정신분석 세션에서, 강의에서, 저서에서, 미디어에서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또 세계에서 제일 큰 의료 데이터베이스 메드라인(Medline)을 검색해보니 클리토리스에 대한 연구 자료는 5년 동안 단 60건이었다고 한다. 페니스를 주제로 한 연구는? 그 서른 배에 달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지금도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할례라는 전통으로 널리 행해지는 성기 절단(genital amputation)이다. 어린 소녀들의 클리토리스를 잘라내 버리거나 오줌 구멍만 남기고 대음순을 아예 꿰매버리는, 일찌감치 ‘여성 섹슈얼리티의 싹’을 잘라 버리는 극악 행위. 보통 마취도 살균도 없이 하는 이 시술로 많은 여성들이 죽거나, 몸과 마음에 장애를 갖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공감했던 건, 클리토리스를 통한 멀티플 오르가슴에 대한 논의였다. 남자들은 기껏해야 한 시간에 세네 번 발기->사정(=오르가슴)해도 힘쎄다 소리를 듣는 반면, 여자들은 한 시간에 오십 번도 넘게 가능하단다. 이게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나는 경험상 안다. 올라도 올라도, 닿아도 닿아도 언제나 또 갈 수 있다, 그곳에. 클리토리스 오르가슴 만세!

 

남자 섹스 파트너는 으레 성기결합을 다른 무엇보다 더 선호하지만, 나에게 성기결합은 오히려 오르가슴을 극대화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이다. 클리토리스 자극 없이 성기결합만으로 오르가슴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반대로 클리토리스를 만지다가 클라이맥스 즈음 질도 같이 자극하면 쾌감이 빵! 터진다.

 

클리토리스와 흔히 비교되는 지스팟(G-spot)을 별도의 기관이 아닌 클리토리스의 뒷부분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 클리토리스 신경다발이 뒤쪽의 질 안, 방광을 감싸고 있는 지스팟 조직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 골반 부위에 퍼져있는 1만5천 개의 신경섬유가 클리토리스 신경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감염 위험에, 접근하기도 만지기도 까다롭고 그다지 섬세하게 반응하지 않는 지스팟보다는 여러모로 클리토리스가 훨씬 좋다.

 

자, 이쯤 되면 ‘여성은 타고나기를 성욕이 남자보다 적다’는 명제를 우리는 거뜬히 무너뜨릴 수 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성욕이 적은 게 아니라, 성욕을 추구하지 않도록 사회화되는 것뿐 아닐까. 많은 경우 여성들은 억압적 교육과 사회통념, 성폭력 경험 때문에 성욕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도 못한다. 또 성욕이 있으나 (특히 남성과의) 섹스는 원치 않기도 한다. 자기 성감에 대한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강압적 섹스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파트너와의 소통 부재나 갈등으로 인해 섹스가 하나도 즐겁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땐 자위로도 충분하고 완전할 수 있다. 가부장제를 뒤엎을 강력한 힘과 용기를 주는 클리토리스 쾌락,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으로 말이다.

 

자의식마저 놓아버리고…

 

클리토리스, 대음순, 소음순, 회음부를 거쳐 질 입구에 드리워진 장막(처녀막이라는 오명을 쓴)을 살짝 들춘다. 따뜻하고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질로 들어가 본다. 질 주름 사이사이를 만져본다. 한참 가다보면 흥분할수록 도드라지는 오돌토돌한 질감의 엄지 손톱만한 피부 조직도 느껴진다. 이제 자궁 경부까지 닿아본다. 그쯤에서 월경컵이 안착할 만한 자리도 찾아본다. 손가락만 열 일할 게 아니다. 오감을 다 동원해 탐험한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흘끗할 때 입에선 신음과 탄식이 터져 나오고, 그 소리에 두 귀는 더욱 열린다. 붉게 부풀어 오르는 질 내벽에서 끝없이 스며 나오는 액을 손으로 훑어 혀로 맛본다. 절정에 오를수록 짙어지는 겨드랑이 향내가 코를 무장해제 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호응할 때, 내 몸 뉘인 시공은 점점 흐릿해지고 결국에는 나 자신마저 잊혀지는 순간이 온다. 지금 죽어도 좋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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