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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며 나이 든다는 것은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모든 몸은 리듬이다
※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의 저자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기사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0. 프롤로그: 자유부인의 후예들
지인이 한 명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위니까 이미 60대를 넘어선 여성이다. 평소에 그녀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특정 주제를 두고 조금쯤은 진지하게 토론할 때도, 일상사를 두고 조잘조잘 힘 빼고 이야기할 때도 톡 쏘는 삶의 통찰력이 엿보인다거나 주목할 만한 유머를 발휘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어떤 비밀 아닌 비밀 하나를 털어놓은 뒤로, 내게 그녀는 매우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평범함이 갑자기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두른 듯 지극히 풍요롭고 느긋한 쾌락의 뽀얀 은가루로 빛났다.
▶ 일본 동명영화 <쉘 위 댄스>의 미국 리메이크작 “Shall We Dance”(피터 첼섬 연출, 리차드 기어, 제니퍼 로페즈 주연, 2004) 중에서
자, 그 비밀 아닌 비밀이란? 그녀와 그녀 남편이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커플들과 함께 매주 한 번씩 모여서 미러볼이 내쏘는 야한 총천연색 불빛 아래 거침없이 춤을 춘다는 것이다. 추고 웃고 또 추다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고 했다. 이들은 오로지 춤을 추기 위해 만난다는 것이다. 그룹 멤버 중 한 사람이 자기 집 거실을 개조해서 넓은 홀로 만들고 벽 하나를 전부 거울로 바꾼 다음 천정에 미러볼을 달았단다.
그녀는 평생 춤을 배워본 적도 없고 리듬을 타는 몸도 아니어서 춤에 대한 욕망을 품어본 적도 없었고, 책만 끼고 살아서 뻣뻣하기 그지없는 몸이라 허리를 굽혀 손을 땅에 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단다. 그런데 은퇴를 몇 년 앞두고 누군가가 들려준 콜라텍 이야기가 ‘유치하고 저질 같아’ 보이면서도 솔깃해서 필드웤 하는 심정으로 한번 들러보았는데, 그곳에서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중장년의 권리인양 행복에 겨워하며 춤추는 이들을 보았단다. 샤방샤방한 옷을 입은 여자들과 나름 정장을 차려입고 신사연하는 남자들이 서로 잘 보이려고 애쓰며 흥분과 땀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문득 어떤 깨달음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단다.
그렇게 해서 춤 모임이 꾸려졌다. 새삼스럽게 정식으로 춤을 배울 필요가 뭐 있냐며, 주위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핫한 음악들을 틀어놓고 ‘아무렇게나 몸이 원하는 대로’ 막춤을 춘다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자유와 해방과 ‘쾌락’을 선사받는 이날을 중심으로 일주일이 원을 만든다고 했다. 미러볼 불빛 아래 총천연색으로 빛날 그들의 흥분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상상하노라니 나조차 심장이 붉게 뛰는 것 같았다.
그녀의 비밀 아닌 비밀을 들은 뒤로 나는 노후준비나 ‘아름다운 노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춤바람’을 첫 번째 목록으로 꼽는다. 일단 눈을 뜨고 나니 주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춤바람 난 사람들이 속속 출현한다. 피가 뜨거운 십대나 젊은이들에게는 춤이 의당 일상이려니와, 몸의 리듬감이 둔해지는 40-50대부터 작정하고 춤바람 난 사람들은 흥미롭고 행복하고 자신만만하다. 이들이 풍기는 여유자작이라고 할 만한 도취의 느낌도 좋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대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는 말도 듣기에 좋다. 콜라텍에 관한 관심에 이끌려 어느 날 문 닫을 시간쯤 찾아간 한 콜라텍에서 떼로 쏟아져 나오던 중장년, 노년들의 그 쾌락에 취한 얼굴들도 잊히지 않는다. 좀 더 많은 중장년, 노년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로 춤바람 나면 좋겠다.
1. 콜라텍, 나이 든 몸으로 춤춘다는 것은
콜라텍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 역시 조사를 좀 해보았다. 서울의 종로2가와 청량리 근처에 있는 콜라텍에 가보기도 했다. 인터넷 조사를 하다 발견한 한 카페의 “중년이 즐거운 콜라텍” 연재에서 콜라텍이 어떤 방식으로 중장년의 활력소가 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주로 정치나 사회에 관한 시사 글이 많은 카페에서 처음 “시시한” 콜라텍 이야기를 올릴 때는 쑥스럽기도 했는데, 그 카페에서 가장 조회 수와 댓글이 많은 글이 되어 연재를 계속하게 되었다는 “중년이 즐거운 콜라텍” 글쓴이는 “사교춤을 처음 배워 콜라텍에 놀러온 사람들을 보고 노후대책을 잘했다고 농담을 던진다”는 콜라텍 선배들의 말을 전하면서, “콜라텍 내에서는 스타일과 춤과 매너가 기본”임을 강조한다.
▶ 일본에 사교춤 바람을 몰고 온 영화 <쉘 위 댄스>(수오 마사유키 연출, 야쿠쇼 코지, 쿠사카리 타미요 주연, 1996)
콜라텍은 이런저런 로맨스가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콜라텍 내부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춤을 같이 추는 파트너로 머물든 아니면 밖에서도 만나는 연인으로까지 발전하든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콜라텍이라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흥분된 긴장 에너지’를 한껏 즐기고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얼굴과 옷차림, 표정까지 잘 지어야 한다. 수년전 나는 어떤 여성에게 한 가지 지적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몰랐는데 이 여성이 나와 손을 잡고 노는데 나에게 인물은 잘생겼는데 표정이 안 좋다, 라고 하였다. 표정연습을 좀 하라고 하였다. 기분이 좀 찝찝했지만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시무룩해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입 꼬리는 내려 와 있고 꼭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후로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음속으로 방긋 웃는 밝은 표정연습을 하여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한결 부킹이 잘되었다.”
한국사회에서 나이 든 남자들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기 위해 거울 보며 웃는 연습을 한다니,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청량리의 한 콜라텍에서 만나 인터뷰한 60대 후반의 남성은 개인택시 소유자였다. 그는 오전에 택시운전 일을 하고 나면 오후 서너 시쯤 동네 뒷산에 올라가 적어도 2시간 이상 근육 만드는 운동을 한다. 집에 돌아와 ‘철저히’ 샤워하고, ‘오데끌롱’ 뿌린 다음 집을 나선다. 청량리 콜라텍으로 ‘출근’하는 것이다. 그에게 하루의 리듬은 콜라텍 ‘출근’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근육운동을 할 때부터 그는 ‘이미’ 콜라텍에서 춤추고 있는 듯 기분이 한껏 부풀어 있곤 한다. 아내가 있느냐, 그렇담 같이 콜라텍 드나드느냐는 내 ‘어리석은’ 질문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 나이쯤 되면 각자 자기 방식대로 즐기며 살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라고 말했다.
내가 콜라텍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이미 2-3년 전이었고, 아직 ‘졸혼’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얼마나 많은 중장년 부부들이 내용상 이미 오래 전부터 졸혼의 상태에 있는지, 무한 번성하고 있는 콜라텍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서민층의 중장년이 나름대로 나이 듦과 협상하는 ‘꾀’라고나 할까. 노년층이 계속 두터워질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춤바람과 졸혼의 현실적이며 리듬감 있는 결합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3. 그녀들의 춤추는 몸, 아름다움으로 혁명하다
▶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을 다룬 다큐멘터리 <라 당스>(La Danse, 프레더렉 와이즈먼, 프랑스 미국, 2009) 중에서
내게 아트나 문학, 영화와 달리 춤 공연의 향유란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분명 내재해 있을 텐데 발현시키지 못하는 몸의 언어를 막연하게나마 떠올리는 기억 여행 같은 것이다. 몸이 해부학적·문화사회학적 구조물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의미를 품고 있는 잠재적 언어저장소임을 확인하는 아주 특별한 계기다. 춤 공연을 보면서 거듭 품어보는 소망, 즉 제대로 서고 앉고 눕고 걷는 몸의 단단한 존재감을 넘어서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몸으로 구현해보자는 다짐은 단순히 건강을 위해 꾸준히 몸을 단련하자거나 몸의 표현력을 기르자는 소망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모든 안무가나 무용수들이 강조하는 속도, 호흡, 에너지의 흐름, 리듬 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춤은 기호체계로서의 활자언어가 도달하기 힘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춤 공연을 볼 때마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은, 무용수들의 몸이 지금 수행하며 맛보고 있는 그 통합적 몰입과 주이상스에 동참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곳’은 아무리 정교하게 전략을 짜도 아무리 난폭하게 발버둥 쳐도 우리를 결국 낚아채고 마는 기호체계가 더 이상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곳이다.
물론 춤의 언어도 문화사회학적 소통규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종종 미세한 동작들, 큰 움직임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상투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마주치기도 한다. 젠더 관념은 그중에서 제일 심각한 상투성을 보인다.
고전발레에서부터 현대무용에 이르기까지 단연코 ‘무용’을 구현하는 건 여성인데 ‘무용’이 무엇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무엇이 ‘무용’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지 등에 대한 판단에서 젠더 관점은 과연 얼마큼 유효한지 질문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여성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과 여성성, 섹슈얼리티의 연관성에 대한 주류 문화사회의 지배적 표상이 여전히 집요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구현하는 훈련된 몸의 기예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날 때 그 모순을 어찌하랴!
예를 들어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1분>을 몸의 언어로 전환시키는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을 보면서, 이 모순에 당황했다. 뛰어난 기술로 큰돈을 벌 뿐 아니라 도서관을 드나들며 섹스에 관한 ‘학문적 지식’도 만만찮게 쌓은 ‘창녀’ 마리아를 춤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여성 무용수로서는 뱃심과 단단한 젠더 의식을 요구하는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는 손님 취향에 따라 순진한 아가씨와 팜므 파탈, 그리고 너그러운 어머니를 연기하는 전문가다. 전문가로서 그녀는 자신이 두 여자임을,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임을 알고 있다. 그녀가 이해하는 섹스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고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는 하나의 게임’이다. 그것은 ‘신성한 춤’이다. ‘두 개의 신적 에너지,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우주’가 이 춤에서 만난다. 이 만남에서 서로에 대한 경의가 부족하면, 한 우주는 다른 우주를 파괴한다. (파울로 코엘료 <11분> 198-199쪽) 좀 더 자세히 그녀가 수많은 실전과 공부를 통해 파악한 섹스의 정의를 들어보자.
▶ 파울로 코엘료 <11분>(이상해 역, 문학동네, 2004)
“내 손님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섹스는 아무 때나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내적인 시계가 있어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각자의 시계바늘이 동시에 같은 시각을 가리켜야 한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성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은 놀이와 '연극'을 통해 그들의 시계바늘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단순한 만남 이상이라는 것을, 생식기의 '포옹'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같은 책 226쪽)
섹스에 관해 이토록 깊은 통찰력을 지닌 ‘창녀’, (작가 코엘료가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경유해 독자들을 설득시키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바빌로니아의 여신이었던 ‘매춘부의 어머니’ 이슈타르가 구현한 ‘성스러운 매춘’의 현대적 회복을 구현하는 마리아의 섹스 행위를 여성 무용수는 어떻게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전문가 ‘창녀’의 다양한 섹스 모험과 실험을 ‘자유’로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여성 무용수는 옷을 벗는 것도, 성적 행위와 그 안에 깃든 고통과 넘침으로서의 주이상스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도 힘겨워했다. 여리고 작은 새의 날갯짓 같은 망설임과 머뭇거림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훈련된 몸의 움직임 때문에 더 안쓰러웠다. (나중에 나와 나눈 대화에서 그녀는 내가 자기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검은 대륙’의 비언어 영역으로 간주하는 프로이트식 정신분석 해석도, ‘창녀’의 섹스에서 (특히 남성 영혼의) 구원이라는 성스러운 초월적 차원을 보려는 관점도 당당하게 되받아치고 해체하며, 혹은 반어법적으로 전유하고 수정하며 다층적인 논쟁의 장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한국 여성무용수의 몸은, 그것이 아무리 무대 위라 해도 여전히 주권적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 무용에서 미학의 내파를, 그리고 미학이 위치해 있는 상징계의 균열을 기대한다. 무용은 춤추는 그 사람의 몸 이외에 다른 매개체나 도구, 수단이 필요 없는 예술행위이며, 몸 정체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며 파격적인 자기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컨템포러리 무용은 음악 뿐 아니라 무대건축물, 조명, 영상, 오브제 등 다양한 매개물들을 이용한 탈경계적 형식에 익숙하지만 무용의 본질은 춤추는 몸이다. 이 몸은 세상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살이를 몸으로 살아내는 인간의 고뇌와 갈등, 희로애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무용수들이 상체를 벗고 혹은 전라로 무대 위에 등장할 때 그 필연성도 여기에 있다. 이 춤추는 몸은 쉼 없이 유한한 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질문하게 만들고, 젠더화된 사회적 제스처나 활자문화를 비롯해 모든 기호체계의 규범성과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무리 잘 계산된 동작 연결이나 움직임의 흐름이라도 지금 여기에서 춤추는 무용수의 몸은 늘 어떤 과잉, 경계 넘기, 예기치 않았던 발화로 이끌린다.
완벽한 미의 정형성을 추구했던 고전발레를 넘어 당대에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표현과 발화는 몸과 몸 정체성의 구성적 성격을 일깨운다. 절대 빈틈없이 완벽하게 동일성의 체계로 수렴될 수 없는 몸 언어의 비체계적 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문학이나 아트에 비해 (보다 전문적인) ‘무용’이나 (보다 인류학적으로 광범위한) ‘춤’이 미학 내에서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이 ‘취약점’이야말로 무용-춤이 크고 작은 인식론적 파장이나 심지어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 두산아트센터와 안은미컴퍼니가 ‘한국인의 몸과 춤’ 리서치를 통해 2011년 처음 선보인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이런 관점에서 제도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다분히 서구의 ‘아름다운 무용/수’를 전범으로 삼는 ‘무용’이 문화인류학적 맥락에서 집단적 놀이문화와 흥, 그리고 개인의 자기표현에 주목하는 (광의의) ‘춤’으로 보폭을 옮기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안은미 등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류학적 맥락에서 ‘춤’을 만들고 추고 전파하면서, 춤의 해방적이고 전복적인 경계 넘기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안은미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보고 온 날, 나는 집에서 막춤을 추며 내 몸이 말하게 했다. 며칠 동안 내내 혼자 막춤을 추며 흥겨워했다. 2010년부터 세 대의 카메라를 들고 네 명의 젊은 무용수들과 함께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밭에서, 경로당에서, 버스정류장에서, 구멍가게 안에서 마주친 할매들에게 즉흥적으로 춤 좀 춰 보시라, 권하고 또 함께 어울려 춤 춘 결과로 탄생한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춤과 몸의 관계를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하게 해방적으로 가르친다. 몸에 ‘이미’ 리듬이 있다는 것, 그 리듬은 걷고 일하고 사랑하고 누군가를 돌본 모든 움직임의 기본 에너지라는 것, 그래서 삶은 이미 춤이고, 춤은 이미 삶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빠박머리’ 여성 무용수이며 안무가인 안은미가 무용계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 추고, 또 무용수들에게 추게 하는 춤이 막춤이고 뻔뻔댄스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주류의 규범이 가르는 삶과 춤, 정교하게 훈련된 몸 언어로서의 ‘전문 무용’과 몸 안의 리듬과 흥에 따를 뿐인 ‘그냥 춤’의 구별을 매우 문제적인 차별로 폭로하면서, 시간 속에서 살아 낸 몸의 물결을 삶-춤의 과정으로 통합시킨다.
특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에서 ‘막춤’추는 할머니들을 춤 ‘공연’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시키면서 안은미가 강조하는 것들, 예컨대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물성이나 질감 그리고 시간성, 살아온 만큼 추는 춤, 그 살아낸 삶이 내뿜는 에너지 등은 무용의 한계를 춤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내파시킬 때 꼭 필요한 인식론적 지점들이다.
“주름진 몸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삶이 체험한 책이었고, 춤은 대하소설 같은 역사책이 한순간에 응축해서 펼쳐지는 생명의 아름다운 리듬이었다.”(김승현, <정의숙 전미숙 안은미의 춤: 한국춤 백화제방의 세 꼭지점> 126쪽)는 안은미의 말은 노년들의 생애구술사를 그 어떤 역사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카이비스트의 태도와 연결된다. 모든 살아낸 몸은 수많은 시간과 장소, 경험을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라고 말하는 몸 정체성 이해의 관점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이다. 구어든 문자든 말이 아닌 몸의 표현 언어에 주목하는 무용-춤에서 이러한 태도는 더욱 정치적이다. 그만큼 무용계가 기대하고 용인하는 몸의 표현력은 보수적인 규범성에 갇히기 쉬운 까닭이다.
▶ 2013년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초청작 라시드 우람단의 <스푸마토>(Sfumato)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본 나의 반응은 이전에 라시드 우람단의 <스푸마토>(Sfumato)에서 단련된 여성 무용수가 보여준 몸의 능력을 보며 감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라시드 우람단의 <스푸마토>(Sfumato)에서 나는 쏟아지는 폭우 아래서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돌고 또 돌던 젊은 여성 무용수의 몸과 속도, 힘에 압도당했다. ‘훈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증언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탄은 ‘결코 따라하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자각이기도 했다. 공연장을 나서는 나는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스푸마토>에서 그 젊은 무용수가 보여준 ‘능력’은 아마도 전문 무용수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 이미 꽤나 나이든 무용수들에게도 위축과 소외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훈련해도, 자신을 믿어도, 통찰력이 있어도 일정 나이가 되면 ‘더는’ 가능하지 않은 몸의 능력이니까. 뛰어난 무용수를 언급할 때 흔히 등장하는 ‘40대까지도 무대에서 춤을 춘’이라는 말은 이러한 몸의 시간적 정황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환기해야 할 것은 몸의 시간성을 품는 춤의 이해다! 미학은 곧 정치학이라는 깨달음이다!
삶의 굽이굽이를 품고 있는 몸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몸, 죽음을 ‘향해’ 현재적 삶을 충일하게 살아내는 몸을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요청한다. 늙어가는/늙은 사람에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울 것, ‘아직도’ 늙지 않은 몸과 삶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연령주의-미 산업의 음험한 책략은 여성들의 삶을 왜곡시키고, 자기 멋대로 마음껏 늙어갈 기회를 박탈한다. 이러한 사회문화 환경에서 늙어가는 몸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춤을 추는 여성/무용수들은 몸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역사성의 주름들을 한껏 펼쳐서 새로운 의미들을 부화시키는 전위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4. 에필로그: 춤추는 몸이 만들어내는 개혁
미메시스(mimesis; 모방,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능력)를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은 미메시스의 이중 방향을 언급한다.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공포의 대상을 닮음으로써 원초적 경험의 공포를 극복하는 뛰어난 방식인 것처럼, 미메시스는 미메시스의 주체를 미메시스에의 강압에서 해방시킨다. ‘아첨하면서 닮아가면서’ 그러나 닮음을 강요하는 규범이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바로 이 미메시스 측면의 내재적 목표다.
▶ 안은미컴퍼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안은미컴퍼니, 안은미 연출) 2017
미메시스는 또한 표현된 것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강요된 표현과 닮음을 해체하고 억압된 표현을 드러내는 것, 춤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미메시스 측면을 다 감지하고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실체화도 아니며, 전달 가능한 것을 자연주의적 의미에서 복제하는 것도 아니다.
늙어가는 여성 무용수들의 춤이야말로 여성성이나 여성성의 신비주의적 실체화, 또는 젠더화된 ‘아름다운 무용/무용수’ 이미지에 맞서 춤 자체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전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혁명적 도약을 이룬 여성 무용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정치적 혁명이다. 제발 노년으로, 뚱뚱한 몸으로 ‘분장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들고 뚱뚱한 몸‘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맘껏 춤추시라! 무용수야말로 춤바람 든 사람들 아닌가. 내놓고 자유부인의 후예인 사람들 아닌가. 제대로 난 춤바람이야말로 사회-젠더-개혁의 바람몰이임을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들 아닌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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