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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성 해방에 ‘포로’가 된 여성들

알리스 슈바르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홍승희) 



‘나는 적극적인 여자가 좋아’ 남자들의 성 해방

 

“성 해방의 물결은 여자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선사한 게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기만과 불감증만 더해 주었을 뿐이다.”(P.19)

 

성 해방의 물결은 이상하게도 남자들이 ‘나는 섹스에서 주체적인 여자가 좋아. 나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여자는 싫어’라고,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남성이 무책임한 섹스와 성 착취를 자유롭게 휘두를 알리바이를 준 것이다. 여자들은 침대 위에서 더욱 격렬하게 신음소리를 연기하거나, 섹스에 흥미가 없는 자신이 ‘어른여성’이 아닐까봐 불안과 자기의심에 시달리게 됐다.


▶ 알리스 슈바르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미디어일다, 2017)

 

일찍이 자위를 통해 클리토리스 오르가즘을 맞본 나 역시, 20대 초반까지 성 해방의 물결 속에서 남자들의 장단에 맞추었다. 청소년기 때는 내내 여자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쿨한 척, 섹스에 능한 척하면서 피임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혼자 뒷감당을 했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섹스하면서도, 쉽거나 문란하거나 더러운 여자로 취급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남성의 시선에 맞춰진 성 해방, 그들이 말하는 섹스와 오르가즘에 내 몸을 끼워 맞추려 했던 것이다.

 

이성애 로맨스,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

 

한동안 나는 삽입섹스가 정상인 줄 알았다. 질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미성숙한 건 줄 알았다. 습관적으로 연인과 삽입섹스를 하고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솔직하게 불편함을 말하지도 못했다. 이성애 로맨스 신화에 사로잡혀서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였다.

 

“여자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착취당한다. 그런 까닭에 성은 개인적인 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이성애만을 인정하는 사회적 교리는 남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는 수단인 것이다.”(p.328)

 

지금 나는 클리토리스 오르가즘만으로도 온전하며, 질 오르가즘을 느끼지 않는 것이 미성숙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또 삽입섹스만이 섹스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이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해 남성의 성기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이성끼리의 섹스가 아닌, 동성끼리의 섹스도 자연스러운 섹스라는 걸 안다.

 

나는 내가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 책에는 레즈비언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자신이 레즈비언인 걸 알게 된 후 자살기도를 했던 이야기, 다시 일어나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가정주부가 남편 몰래 여성을 만나다가 정신병원에 갈까봐 만남을 그만두게 된 이야기, 한 여성이 여성과 첫 섹스를 했을 때 그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에 놀라웠다고 증언한 이야기들…

 

그렇다. 이 책은 이성애 전체주의 사회의 남성종교, 남성정치, 남성문화가 싫어할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다. 아주 아주 위험하고, 그만큼 본질적이다. 이쯤에서 명언 하나. “우리는 남자들이 못마땅해 하는 그런 여자들이다.” -로빈 모르건

 

▶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독일 여성들. 마이크를 잡은 이가 이 책의 저자 알리스 슈바르처다. 

 

삽입섹스의 ‘정상성’과 질 오르가즘의 허구

 

삽입섹스와 질 오르가즘의 신화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인 역할극을 뒷받침하는 자연적 ‘근거’가 된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섹스를 말하는 주체는 가부장 남성과 포르노 자본이 대부분이다. 왜곡된 것을 바로 잡으려면 모두 끄집어내서 뒤집어보고, 생각과 행동의 습관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성 해방의 물결은 삽입섹스의 ‘정상성’과 질 오르가즘의 허구,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상호작용 방식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색과 함께 가야 했다.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전 유럽을 뒤흔든 여자들의 섹스 이야기)는 이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증언한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계층과 성향에 상관없이 여성의 숙명으로 작용하는 성,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 모두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 앞에 무릎 꿇도록 작용하는 그 갈등의 지점은 바로 성이었다. 다름 아닌 여기서 남성의 권력과 여성의 무력이 창출되고 있었다. 모든 사회적 전망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갈피를 잃고 ‘개인적인 것’으로 추락하고 있었다.”(P.20)

 

‘노출증이냐’, ‘수치스럽게 이런 글을 왜 쓰니’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서도 내가 섹슈얼리티 경험을 쓰는 걸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정치적인데, 왜 성만큼은 정치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걸까. 주체적인 사람들조차 성에 관해서만큼은 별 문제의식 없이 기존의 방식을 답습한다.

 

‘항상 참아왔으니까 이 꼴인 거야’

 

책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사람은 50대 성노동자다. 그녀의 삶은 결혼한 주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노동자인 그녀를 위협한 건 거친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결혼을 요구하던 기둥서방, 남편이 된 남자의 폭력이 더 컸다. 그녀에게는 결혼이 고용된 ‘매춘부’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몸을 대줘야 하는 줄만 알잖아. 돈을 치르면 함께 얘기라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들 하지. 그렇지만 서둘러서 일부터 벌이자면 그건 딱 잘라 싫다 그래야 돼. 이거 정말 중요해. 어떻게 맨날 그러고만 살아? 우리 쪽에서 주장을 해야 한다니까. 언제라도 하자는 대로 몸을 대주면, 이거 정말 안 되는 거야. 항상 그래왔으니까 이 꼴인 거야. 가정주부들도 아마 별로 다른 신세가 아닐 거라구. 그래 봤댔자 남편한테 헛된 환상만 키워주는걸 모른단 말야. 착한 여자 시늉만 해봐. 남자들 버릇 못 고친단 말야.”(P.166)

 

책에서 나온 인터뷰어들은 유럽의 여성인데 읽다보면 한국의 여성들과 다를 게 없다. 삽입강박의 해소, 발기효능감의 우쭐함, 사내 역할의 자존심을 위해 섹스하는 남자들을 남자친구나 남편으로 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국경을 초월한 젠더 불평등의 뿌리는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걸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그’들이 만들어놓은 성을 주입받고 있었던 걸까.

 

여성들은 국경을 떠나 비슷한 문제로 혼자 새벽마다 울고, 수치스러워하고,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자신을 혐오한다. 남성들의 전쟁터는 국경에 있지만, 여성들의 전쟁터는 가정집과 안방, 침대에 있다는 걸 느낀다. 정말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구나.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뭘까. 남자들의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 우리의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것, 당장 그곳을 뛰쳐나오거나 단호하게 거부할 것.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나와 맞는 결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것, 백번의 말보다 한 가지 실천, 의지와 결단.

 

“내키지 않는 일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정해서 결연히 그만두어야 해요. 이런 실천의 과정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가 없어요.”(P.219)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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