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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성들 ‘사랑이란 이름의 착취에 반대해!’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좌담회


작년 가을부터 일본 TBS에서 방영되어 전국적으로 인기몰이를 한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본 적은 없어도 삽입곡 “사랑의 춤”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오랜 동안 몰두해온, 가사노동 이슈를 정면으로 다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과학기술과 젠더’ 연구자인 미즈시마 노조미 씨, <뷰티풀 피플·퍼펙트 월드>(시리얼, 2015)로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만화가 사카이 에리 씨, 자유기고가 우메야마 미치코 씨 등 현재 육아 중인 40대 여성 셋이 모여 좌담회를 열었다.

 

▶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취업난을 겪다가 대학원에 진학한 모리야마 미쿠리(아라가키 유이). 대학원 수료 후 기업에 파견사원으로 일하지만, 파견 중지를 당해 백수가 된다. 아버지의 소개로 열 살 정도 연상의 시스템엔지니어인 모태솔로 츠자키 히라마사(호시노 겐)의 집에서 가사대행 서비스를 하게 되는데… 입주 가사대행 대신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히라마사는 사실혼으로 건강보험과 가족수당을 받고, 미쿠리에게 하루 7시간의 변동근무시간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 생활비 반씩 부담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는 가운데 연애감정이 싹트는 두 사람. 미쿠리가 밖에서 일을 시작하자, 가정의 ‘공동경영 책임자’로서 가사분담 재구축을 모색하는 둘. 원작은 여성만화잡지 [Kiss]에 연재 중인 우미노 츠나미의 동명 작품. 단행본은 올 3월에 완결판(9권)이 발간됐다. DVD도 발매 중이다.

 

드라마에서 일본의 가사노동 실태가 보인다

 

사회(가시와라 도키코, 구리하라 준코): 획기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주인공 미쿠리가 히라마사와 연인이 되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상노동’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요. 법률혼을 하자는 프로포즈를 하고 미쿠리에게 주었던 월급은 저축하자고 제안하는 히라마사에게, 미쿠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하죠.

 

우메야마: 가정이라는 ‘일터’의 노동환경은 남편(고용주) 하기 나름이고, ‘사랑의 불안정함’을 표현한 점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여성의 역할과 ‘사랑은 여성이 만든다’는 전형적인 인상은 떨쳐버리기 어려웠습니다.

 

▶ 우미노 츠나미 만화 원작(講談社, 2013)


사카이: 저는 여성만화잡지 [JOUR](후타바샤)에 <양지보육원 어른반>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일도, 가사와 육아도 혼자 짊어지게 되어 남편에게 화가 나 있는 여성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은 원작을 읽었을 때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아슬아슬하지만 교묘한 설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드라마로 옮겨지면서 미쿠리의 고모인 49세 독신여성 유리짱의 캐릭터가 부각된 점이 좋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저주가 있어. 스스로를 저주하지 마”라는 대사. 쉰 살을 앞둔 이런 여성 캐릭터의 묘사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즈시마: 미쿠리의 친구이자 불량청소년 출신인 얏상이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혼을 결심하는 부분도 좋았어요. 원작의 미쿠리는 페미니스트 레벨이 더 높았지만, 드라마에서는 얏상이나 유리짱의 역할이 더 눈에 띄었어요.

 

미쿠리가 “집안일을 할 수 있는 로봇이 만들어지면 직업을 잃겠다”고 상상하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그럴 리가요. 기술혁신의 결과, 가전제품은 진화하는데 가사노동 시간은 생각만큼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거든요. ‘가사시간의 패러독스’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이미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습니다. 공업화와 함께 가사노동이 여성에게만 집중되고, 분량도 늘어났다는 연구도 있는데요. 드라마에서는 애초에 가사노동의 양이 너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더라고요.

 

사회: 미쿠리의 월급은 기회비용법(시장에서 노동을 제공하지 않아 상실한 임금으로 가사노동 비용을 평가하는 방법)에 근거해 계산하면 연봉 304.1만엔(약 3천70만원). 1일 7시간 노동으로 환산하면 시급은 1,400엔(약 1만4천원).

 

우메야마: 시간 당 비용으로 봤을 때 싸긴 하지만, 주부들이 하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1,400엔만 되어도 좋겠다는 느낌도 들죠.

 

사카이: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365일 밤낮 가리지 않잖아요. 하루 종일 육아를 하는데 연봉 300만엔은 전혀 적당하지 않아요.

 

미즈시마: 근무시간이 끝났다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라는 거냐 싶죠. 애당초 일본 남성의 가사와 육아 시간은 선진국 중에서 최저 수준으로 악명이 높아요.

  

▶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 국가별 비교 (일본 내각부 작성)

 

페미니즘은 더 많은, 더 나은 선택지를 제시한다

 

사회: 마지막 회에서 둘의 미래를 점치는 다트 장면을 보면 맞벌이, 전업주부, 다둥이 엄마거나 딩크족…

 

미즈시마: 선택지가 너무 적죠. (웃음) 게다가 어떤 선택지도 ‘가족’ 단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않아요. 페미니즘은 가사노동에 대해 여러 해결 방식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가사의 공동화예요. 요리도 빨래도 공동이 맡아 개인의 부담을 줄이는 구조입니다. 일본에서도 리브(Women Liberation, 1970년대 일본의 여성해방운동) 세대가 콜렉티브 하우스(Collective House, 다양한 가구가 함께 거주하는 공동주택)를 운영했었고, 해외에서는 이 사상에 기초한 건물이나 마을 설계까지도 있으니까요. 히라마사와 동료가 돌아가며 밑반찬을 만들 수 있거든요. 이런 선택지가 ‘없다’는 것 자체가, 가사는 각 가정의 자기책임이라는 높은 사회적 압박을 보여주죠.

 

우메야마: 드라마에서도 미쿠리의 취업난과 히라마사의 정리해고가 그려졌습니다. 실제로 여성 다수가 비정규직이고, 블랙기업이나 과로사 등의 문제도 있죠. 임금노동도 마냥 안정적이고 편한 건 아니기 때문에 전업주부로 도피하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들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한편, 드라마에서 미쿠리가 주부의 노동에 대해 “노동시간의 상한도 없으니 블랙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듯, 결혼도 안주할 만한 곳은 아닙니다. 어떻게 리스크에 대비할까 같은 부분도 다룬 점이 인기를 높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카이: 계약결혼을 한 다음에 드라마에서처럼 정당한 대가와 휴식이 있는 결혼, 그러니까 결혼의 좋은 점만 취하고 싶다는 반응이 여성들로부터 꽤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회: 그런데, 미쿠리가 “월급을 받고 싶다”며 직장을 찾아 나섭니다.

 

사카이: 그냥 돈 버는 것뿐 아니라, 사람과의 유대관계가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식의 대사도 있었죠.

  

▶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중 한 장면.

 

미즈시마: 마지막 회의 다트 장면은 임금노동이 전제된 선택지였습니다. 여성노동을 후려치는 임금노동의 시스템에 올라타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생활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있는데 말이죠.

 

사카이: 드라마도, 원작도 마지막은 맞벌이를 하면서 가사분담에 대해 함께 생각해나가자는 식으로 끝나요. 다만, 전업주부라도 금전적인 가치가 있다는 자기긍정만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싶어요. 이 드라마의 인기가 일본 사회가 변화하는 어떤 계기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메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은 하라’는 메시지도 있다고 볼 수도 있고요. 남녀 공동가사라는 메시지는 담고 있지만, ‘남녀 커플’ 중심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미즈시마: 그래도 이 드라마로 인해 가사노동의 분배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 페미니즘이 제안해온 시도가 확장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공동으로 요리를 하든가, 아이를 교대로 맡기는 관계를 외부에 많이 만든다든지, 가사노동을 가정 안에 함몰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은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어른만 갈 수 있는 단골 바’가 아니라, 싸고 맛있는 반찬가게나 아이들도 갈 수 있는 페미니즘 식당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거예요.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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