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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내 사랑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영화 <내 사랑>(에이슬링 월시 감독, 아일랜드 캐나다, 2016)의 원제가 ‘모드’(Maudie)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자극적인 제목의 책 겉표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알맹이는 제목과 다른, 그런 책 말이다. 달콤한 로맨스를 연상시키는 ‘내 사랑’이라는 제목은 영화와 도통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 사랑’의 발화자는 주인공 모드의 남편 에버렛이 아니었을까? 한편, 역설이라는 생각도 스쳤다. 아내인 모드가 죽은 후 텅 빈 집에서 통곡처럼 중얼거렸을 ‘내 사랑’이란 말, 그 말을 하기까지 지나온 시간이, 유리조각처럼 빛나지만 아픈 시간이 영화 <내 사랑>이란 생각을 했다.


▶ 에이슬링 월시 감독,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영화 <내 사랑>(Maudie) 스틸컷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영화 <내 사랑>

 

심한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한 모드는 마을의 상점 게시판에서 가정부를 구하는 생선장수 에버렛의 메모지를 보게 되고, 혼자 그의 집을 찾아간다. 어린 시절 보육원을 전전했던 에버렛은 세상에 정을 주는 데 인색한 남자. 그에 반해 모드는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아먹을 때조차 닭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여성이다. 모드와 에버렛, 이 둘을 이어준 것은, 어쩌면 상처가 아니었을까. 그들을 사랑으로 확장시켜 준 지렛대 역시 세상의 소외된 외곽 지대에 살고 있다는 상처라는 공통분모였을 터.

 

부모가 죽은 뒤 친오빠 찰스에 의해 아이다 숙모 집에 맡겨진 모드는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붓질을 할 때 행복해지기에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녀가 숙모는 못마땅하다. 그림을 그리는 걸 방을 어지럽히는 걸로만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림은 소모적이고 무용한 것일 뿐. 예술, 아니 정확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예술행위는 한마디로 쓸모없는 짓인 것이다.

 

그뿐인가? 아이다 숙모는 모드가 에버렛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겠다며 독립을 선언하자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비난한다. 몸이 불편해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냐며, 인연을 끊자는 협박까지 하며, 이후 모드가 에버렛의 집에 진짜로 기거하며 가정부로 일하자 에버렛의 ‘성노예’라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숙모의 말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폭력적인 시선이 물씬 느껴졌다. 여성이 유리천정을 뚫었을 때, 여성의 능력보다는 외모, 사적인 관계 등 부가적인 것들로 성취의 원인을 찾으려는 그 비열한 시선들 말이다. 성녀와 창녀라는 대립 이미지로, 혹은 모성이라는 신념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면의 역사가 아니던가. 그 통제를 위해 가부장제 사회가 했던 일이 바로 여성을 남성에 비해 결핍된 존재로 왜곡하여 모든 잘못을 여성에게 전가시키는 작업이었다.

 

▶ 에이슬링 월시 감독,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영화 <내 사랑>(Maudie) 스틸컷

 

영화에서 에버렛이 모드에게 나무토막이랑 하는 게 당신과 섹스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폭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집에서 기르는 개와 닭보다도 당신이 하위 서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남성연대로 유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어떻게든 타자적인 사물로 전락시켜 열등한 존재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모드가 애버렛의 집을 처음 찾아가 대화를 제안했을 때, 애버렛이 차를 마시며 기껏 한다는 말이 “여기로 이사하는 데 소가 몇 마리나 필요했을 것 같아요?”였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에게 세상은 측량하고 넘어서고 완수해야 할 숫자일 뿐, 사물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모드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중요히 생각하는 효율성과 서열의식의 시선을 그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의 고백

 

그러나 결혼 후 그들의 관계 지형도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한다. 몸이 불편한 모드를 대신해 에버렛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등, 그전에 결코 생각지 못했던 지점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은 잔잔한 경이로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로버트 A 존슨의 책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 나오는 구절들과도 겹쳐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여성이 먼저 ‘여기 앉아서 이야기해보자’ 라고 말한다. 남성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진화의 매개자가 된다. 여성은 종종 남성에게 새로운 차원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빛을 비춘다.”

 

모드의 임종 때 에버렛의 회한에 찬 말은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에버렛의 이 뒤늦은 고백이야말로 남성연대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고백이 아닐는지. 남성연대의 유지를 위해 남자들의 잘못을 여성들에게 덮어씌운 채 여성을 억울한 죄인으로 만들었던 죄를 이제는 고백해야 할 때다. 그것은 남성연대를 용인했던 가부장제 사회를 치유하는 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에이슬링 월시 감독,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영화 <내 사랑>(Maudie) 스틸컷

 

아마도 치유는, 사랑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이 든든한 배수진으로 둘러져 있음을 아는 일이기도 할 터. 그러한 연유로 에버렛에게 느닷없이 뺨을 맞은 모드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부여잡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단지 슬프지만은 않다. 그것도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물감을 묻혀 그리다니! 그리고 손가락에서 탄생한 꽃과 나무가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그토록 밝고 눈부시다니! 이 얼마나 커다란 역설인가?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벽 속에 갇힌 에버렛의 마음을 비롯해 세상 모든 갇힌 존재들의 마음을 마치 마법처럼 어루만져서 다시 태어나게 해주려는 것 같았다.

 

벽에 그림을 그리고 나서 모드는 그동안 받지 못한 급료를 에버렛에게 요구한다. 폭력에 움츠리지 않은 채 자신이 떠나길 원하느냐, 남길 원하느냐, 돌직구 질문까지 던진다. 에버렛에게 오히려 마지막 기회를 준다. 그 당당함은 차가운 벽에 꽃과 새를 그려 넣은, 아마도 예술이라는 시간이 준 힘. 그렇다. 모드에게 그림은 분명 치유였다.

 

치유로서의 그림

 

글쓰기 강의에서 만난 한 오십 대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기억을 글로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고, 자신 안에 묵은 감정들이 자꾸만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고백한 것처럼, 세상 모든 예술은 치유의 씨앗을 품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치유가 됨을, 외로운 모드와 에버렛이 만난 것처럼 상처가 빚은 고유한 눈물들이 먼 곳의 사람들을 이어줌을, 누군가는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누군가의 울음을 누군가는 대신해서 울어주어야 함을, 그 일을 하는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임을, 모드를 보며 나는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견디는 힘’이라고 이제는 말하고 싶다. 모드가 에버렛의 집에 일하러 온 첫날, 그녀가 가장 처음 한 일도 바라봄이 아닌가. 그녀는 집에서 갖고 온 그림을 선반 위에 얹어두며 바라본다. 더께 묻은 세간살이를 청소하는 것보다도, ‘바라봄’을 그녀는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다.

 

그것을 ‘처음의 시선’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관절염으로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어렸을 때 창을 통해서 만났던 세상, 그래서 한 번 본 것을 머릿속에서 기억해내며 그림을 그렸던 그녀가, 절룩거리며 걷는 탓에 사람들의 조롱 어린 시선을 감내해야 했던 그녀가, 세상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꿈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상처의 그림자도 느껴지지 않는 아이처럼 행복한 그림을 통해 이미 경험했으나 다다르지 못한 아름다움이 우리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에이슬링 월시 감독,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영화 <내 사랑>(Maudie) 

 

그리고 그 꿈의 기억을 찾아내어 집안 구석구석에 꽃과 나무, 새로 그려 넣을수록 메말랐던 에버렛의 집은 싱그런 물기가 샘솟는 기쁨의 정원으로 변신해 간다. 마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은 ‘모든 마음은 제각기 자기 집을 짓는데 나중에는 집이 마음을 거둔다’고 이야기했다. 모드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집이 가득 찰수록 모드와 에버렛 사이가 주종관계에서 서로를 품는 사랑으로 진화해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그림을 세상에 알려준 여성 산드라가 모드에게 과연 당신의 창작열의 원천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창문을 통해 보이는 새, 꿀벌이 매번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모드는 창을 바라보며 담담하지만 힘 있게 고백한다.

 

“내 인생 전부가 액자 속에 있어요, 바로 저기.”

 

우리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익숙한 사물들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그 탄생은 분명, 가부장제 문화가 잠식해놓은 왜곡된 시선이 치유되었을 때, 그 너머 더 나은 곳을 향해 진화해 갈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 장면에 등장한 흑백 영상 속의 실제 모드 루이스의 얼굴, 모든 것을 다 품고 걸어가는 듯한 그 눈빛과 입가의 미소를 그래서 난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녀는 무명의 가난한 작가인 내게 아주 선명하고도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두려워하지도 마. 고통은 너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거야. 그래, 창작의 원천이 되어줄 거야!”

 

▶ 에이슬링 월시 감독 영화 <내 사랑>(Maudie) 중에서

 

[‘내 사랑’을 더 잘 읽기 위한 영화 미학]


영화 <내 사랑>은 실존했던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의 삶을 다룬 영화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모드 루이스는 기존 미술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그림을 그린 화가로 “그림 그리는 일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불편한 몸으로 어린 시절부터 창을 통해 바라보던 세상이 전부였기에, 영화에서 모드가 창문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영화 내내 창을 통해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자주 등장하는 점도, 모드와 에버렛의 관계가 진화될수록 창을 통한 시선이 불투명함에서 투명함으로 이동하는 점도 흥미롭다.

 

모드가 에버렛의 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 대화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모드를 배웅하는 에버렛이 바라보는 모드는 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 같다. 모드와 에버렛 사이에 비스듬히 열린 문이 가로막혀 있고, 그 문 위의 먼지 자욱한 흐린 창으로 애버렛이 모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선은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에버렛의 모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그 순간 “당신은 도움이 꼭 필요해요” 라고 에버렛에게 던지는 모드의 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중의적이지 않은가.

 

한편, 모드의 그림을 세상에 알려준 활동적인 여성 산드라가 신은 체리빛 구두를 예쁘다고 부러워하던 모드에게 ‘걷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지닌 채 다가온다. 다리를 저는 모드에게 걷는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고통스럽지만 계속 삶을 향해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일 터.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자연풍광 속을 절뚝거리며 혼자 걸어가는 모드, 함께 의지하며 걸어가는 모드와 에버렛을 너무도 아름다운 원경으로 담아낸 여러 장면들이 그러하다.

 

절연했던 숙모를 찾아갈 때 모드가 입은 코트가 산드라의 구두 색깔과 같은 것도 유의미하다. 그것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모든 상처를 직면하겠다는 모드의 마음을 마치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버렛은 혼자 집에 망연히 앉아 있다가 집 밖에 있는 죽은 모드의 그림을 집 안으로 갖고 들어온다. 그리고는 이내 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모드라는 한 여성이 에버렛이라는 한 남성에게 빛을 비추는 존재였음을 아프지만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모드가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열어주며 예술로 마음을 치유하는 존재였음을 말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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