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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여중생’들의 서사

구체적인 시간의 애정어린 재현 <여중생A>   



<여중생A>(허5파6 글 그림, 비아북, 2017)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결심은 금방 섰지만, 막상 어떻게 써야 좋을지 생각하면서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사랑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목구멍을 지나쳐 혀끝에 맴돌았던 사적 소회를 감추어야 할지 내보여도 될지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여중생A>의 주인공 장미래는 중3 여학생으로 교실에서는 좀처럼 반 아이들과 말을 섞지 않고, 집에서는 밤낮없이 일로 바쁜 엄마와 술을 좋아하고 폭력적인 아빠를 데면데면 스친다. 미래의 세상에서 색채가 깃든 곳은 교실이나 집이 아니라 게임 ‘원더링 랜드’ 속이고, 미래는 그곳에서 게임 세계 친구들을 사귄다.

 

도서부 활동을 하면서 책꽂이를 정리하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영화 감상 시간에 본인의 입맛대로 선택한 작품을 재생하는 일, 좋아하는 책을 몇 번씩이고 읽고 또 읽는 일도 미래의 세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미래가 학교에서, 집에서, 게임에서, 또 거기서 이어진 세계와 그 너머에서 사람을 만나며 자신의 생활을 더 튼튼하게 쌓고 단단하게 여미는 과정이 차곡차곡 <여중생A>를 채운다.


▶ 단행본으로 출간된 <여중생A>(허5파6 글 그림, 비아북, 2017)


<여중생A>만큼 독자로 하여금 자기 얘기를 꺼내놓게끔 하는 만화를 만나지 못했다. 이 만화가 연재 중이던 2년여의 시간 동안, 댓글 창을 눌러 보거나 포털사이트에 제목을 검색하면 자신의 십대 중반을 회고하는 글들을 수북이 볼 수 있었다. 한참 터널의 가운데서 표류하는 고등학생도 있었고 이제는 양지바른 곳에 뿌리를 내리고 곪은 티눈을 빼듯 과거를 이야기하는 성인도 있었다. 결코 궁금해 할 수도, 기껍게 읽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엔 큰 감정이 소모됐다. 그럼에도 타인의 기억을 읽어 내려가길 멈출 수가 없는 날이 있었다. 누군가와 처지를 견주어 자기를 위안하거나 연민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건 결코 아니었다. 그건, 쏟아진 튀밥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의 외로움을 견뎠고 또 견디는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중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더럭 슬펐던 순간은 나만 빼고 모두가 진정한 친구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였다. 그때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는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인간인가 생각을 했었어’ 라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내 생각에는 세상사람 모두가 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십대 시절의 많은 시간이 쓸쓸해하는 데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버스 뒷자리에 앉던 학생과 선생님 옆자리에 앉던 학생이 보낸 시간이 다를 테고, 학교 안의 청소년과 학교 밖의 청소년이 보낸 시간 역시 다를 테지만, 그리고 그 차이는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저마다 성장통을 앓고도 오늘을 살고 있구나 발견할 때마다 꼬박꼬박 애틋했다. <여중생A>는 작품 자체로도 십대 시절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게 하지만, 그간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억지로 염색해 총천연색으로 만들거나 먹물에 수도 없이 담가서 명 없는 암의 상태로 만들어 놓은 이 시기를 실재하는 개개인의 서사로 고쳐 만나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사이다’ 서사는 없지만 성장하는 주인공

 

주인공 미래는 감정적인 부침을 겪을 때 타인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자꾸만 돌아보고 책망하기도 한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 탓을 하는 버릇을 고치기란 쉽지가 않다. 시간이 약이고 마인드컨트롤이 답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실낱만큼의 확신을 줄 계기는 있어야 빨리 아문다. 미래의 세상은 분명히 모질지만 <여중생A>는 한계까지 미래를 몰아붙여 극도의 부정적 감정이나 선정적 감각을 자아내는 대신 미래에게 다정함을 주고받을 수 있는 끈을 달아준다.

 

도피가 아닌 진정한 우주로서 미래를 견디게 했던 ‘원더링 랜드’의 길드 친구들부터 미래가 자신의 도서부 왕국에 초대한 태양과 미래의 글에 반해버린 백합, 같이 밥을 먹고 놀러 다니며 동성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친구 양선 유진과 하늘, 게임에서 만나 내밀한 고민까지 공유하게 되는 재희, 소심하던 미래의 어깨를 밀어주는 솔직하고 대범한 유리, 미래가 선망하던 어른이면서 미래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재현, 미래를 가만히 사랑하는 엄마, 조심스럽게 지지하는 담임선생님,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출판사 편집자까지.

 

사람들과 연결되며 얻는 여러 결의 사랑과 안정감은 미래 역시 일진 무리에 끼어 멀어지는가 싶던 재민과 연락을 주고받고, 백합의 현재에 순수한 감탄과 축복을 표시하고, 재희에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탠다.

 

ⓒ허5파6 글 그림 <여중생A> 중에서 지속가능한 낙원을 꿈꾼다는 미래

 

책도 영화도 많이 보고 글 솜씨도 좋은 미래는 ‘내 글이 바로 나는 아니라는 걸 아는’, 작가로서 단단한 태도를 갖추고 글을 쓴다. 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비판 받고 싶지 않아서 치장된 문장을 쓰는 백합과는 또 다르다. 미래는 재능이 있지만 그 재능이 미래가 친구를 사귀고 신의와 호감을 얻는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미래가 멋지기 때문에 미래와 친구가 되고 싶고, 되길 허락한 것이 아니다. 그냥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친구가 된다. 따라서 미래의 이야기는 숨죽이고 있었던 능력자―재력, 권력, 인맥, 걸출한 재주 중 하나 이상을 가진―가 자신에게 망신을 준 상대를 비굴하거나 초라하게 만들며 비웃는 ‘사이다’ 서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더불어 미래가 가진 재능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거나 작게 평가되는 순간 미래의 세상을 무너뜨릴 정도로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도 못한다. 미래가 호감을 느끼던 일진 유리를 돕고자 쓴 인터넷 소설은 미래가 ‘여중생A’로 보도되며 일순간 영웅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결국 속 시원한 응징을 가져다줄 수 없다. 다만 그것으로 미래가 절망하거나 무너질 필요 역시 없다. 그저 글쓰기는 미래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미래가 자립할 수 있는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인 것으로도 족하다. 사람이라는 끈을 잡고 몸을 일으킨 미래는 글을 쓰면서 타인에게 내 자존을 의탁하지 않아도 되도록 지구력을 기른다. 미래 스스로 생각했듯 ‘사람을 낙원으로 삼아선 안 돼. 사람은 움직이는 거니까. 나는 지속가능한 낙원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또한 미래가 회심의 일격으로 퇴치하면 이내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는 악당으로서 최후를 맞지 않는다. 미래는 아빠가 남들에겐 웃으면서 넉살 좋게 말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문자 메시지도 보내고, 쪼그라든 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악마가 아니라 작고 초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건 아빠가 절대적인 악인이 아니라는 면죄의 여지를 주는 게 아니라, 도리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어도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단 걸 보여준다. 미래가 칼이라도 빼들고 직접 폭력을 중단하고자 하거나 에필로그 없이 무 썰듯 똑 떨어지는 ‘사이다’를 날리는 것, 그도 아니면 관계를 회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과연 죽음보다 더 ‘좋은’ 결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와 비슷하게 작품 속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태양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원망, 백합이 이기적이라는 비난, 노란을 단죄하지 않느냐는 원성으로 댓글창이 시끄럽고는 했다. 만화는 태양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여동생이 있다는 것, 백합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결혼으로 상대방의 힘에 의탁해 ‘편히’ 살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과 달리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 노란은 친구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이 많다는 것을 일러 주고, 다만 그 전사나 성격이 사건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는 걸 주지한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잘못이 아니게 될 수는 없듯, 반대로 잘못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미워해야 할 평면적 악당으로 여길 까닭 또한 없다. 재희가 미래에게 ‘아직 16살이잖아요, 너무 어른을 이해하지 말아요’라고 말한 것을 뒤집어, 이들은 아직 열여섯 살이고 종종은 이해받지 못할 수 있다.

 

어떨 땐 다 컸다고 하고, 어떨 땐 아직 어리다고 하고, 안팎으로 갈팡질팡하는 시기의 흔들거림을 <여중생A>는 때로 그저 끌어안길 택한다. 그리고 그건 꼭 미성숙하기 때문에만 겪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겪는 일이기도 해서, 미래에게 ‘내가 그동안 배웠어야 할 건 그런 공략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아이들하고 잘 지내는 법이었는데’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 사람을 마주하는 건 게임 루트를 공략해서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므로.

 

ⓒ허5파6 글 그림 <여중생A> 중에서 생리대 얘기를 하는 미래와 친구들

 

‘중2병 오타쿠’들이 보낸 2000년대 중반

 

한편 <여중생A>는 1980-1990년대와 달리 아직 복고로 다루어지지 못하는 2000년대 중반이 배경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인 추억으로 자리 잡기엔 현재와의 거리감이 설익어서인지, 이 시기의 많은 것들은 ‘흑역사’로 불리곤 한다. 나 또한 이때 여중생이었다. 나는 차원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이 하나씩은 있는 오타쿠였고, 이맘때는 가히 서브컬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오타쿠라는 단어 하나로 나를 명명하지만, 그때만 해도 구구절절 변명을 붙여가며 만화며 아이돌 등등에 ‘호의를 가진’ 입장으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처음 ‘중2병’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다. 지금이야 오타쿠가 멸칭이 아니고 중2병이라는 말이 사춘기 청소년을 향한 혐오 단어가 될 수 있단 걸 알지만, 그땐 ‘중2병 오타쿠’만한 조롱 혹은 힐난이 또 없었다.

 

그즈음 문방구와 학교 앞 서점에서는 파티, 밍크, 윙크, 이슈, 케이크 같은 만화잡지를 팔았고, 동네마다 두어 군데는 있었던 비디오 가게는 만화책으로 시작해 판타지, 무협지, 인터넷 로맨스 소설 등 차근차근 대여 항목을 늘려갔다. 다음 카페와 제로보드 사이트를 주요 플랫폼으로 인터넷 커뮤니티가 성행했고, 일본문화가 둑이 터진 듯 유입되면서 라르크 앙 시엘이나 글레이 같은 밴드부터 쟈니즈 소속 아이돌까지 일본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다. 후에 ‘원나블’로 불리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필두로 한 (고민 없이 차별적인 명명인) 이른바 소년만화의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MMORPG 게임인 마비노기가 큰 인기를 끌었고 서울과 부산 코믹월드에 사람이 붐볐다. 선유도 공원과 양재 시민의숲에서 사진을 찍던 코스튬 플레이어들이 있었고, 10대에서 20대 여성 플레이어에게 마음대로 반말을 하거나 성희롱을 해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받던 성인 남자사진사도 여럿이었다. 사람들은 msn메신저와 세이클럽 아이디를 공유했다. 동(방신기)슈(퍼주니어)(SS)501중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고르는 것이 반마다의 과제였고, 열렬한 팬인 친구들은 그룹 멤버의 생일날 반 아이들에게 명함과 사탕을 나눠주기도 했다.

 

<여중생A>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중학생 시절과 더불어 이 2000년대 중반을 실감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여중생A>에는 이 시기 열대여섯 살의 청소년이 사랑했던 것들, 그로 인해 겪었던 세상의 기묘한 구석까지도 속속 녹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 시대적 배경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 어째서 가해자의 죽음으로 가정폭력을 종결하는지, 미래 주위의 아이들은 왜 명명백백 징벌되거나 더더욱 구체적인 악행의 주체로 드러나지 않는지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이 곧 가치중립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사실’이나 ‘가감 없음’ 같은 말은, 실은 얼마나 불확실한가? 특정한 세부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곧 진실을 담보하는가?

 

<여중생A>는 결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폭력은 인상으로 제시하는 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사유도 설명되지 않는다. 미래를 감싸는 다정한 우연과 인연 역시 기적적이다. 미래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도 생기고, 엄마와도 화목하고, 존경하던 작가를 멘토로 만난다. 하물며 미래가 서울에 사는 것도 미래에게는 행운이다. 미래가 지방에 살았으면 재희도 만날 수 없고, 홍대도 출판사도 가볼 수 없고, 세상을 보고 시간을 겪는 감각도 달랐을 것이니까. 서글프지만 당연하게도 이러한 결말은 모든 십대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여중생A>를 나쁘게 만드는 요인이냐면 그렇지 않다. 눈물겨운 비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이 우주는 애정과 관심을 기반으로 건축한, 장밋빛 미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걸 충실하지 못하거나 나쁜 재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재현은 결국 보았거나 보고 싶거나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의 재현인 것일 테니까.

 

ⓒ허5파6 글 그림 <여중생A> 웹툰 83화. 친구 어깨에 기대는 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중생A> 속 장면은, 웹툰 연재분 83화에서 미래가 유진에게 머리를 기대는 순간이다. 작중에서 특별히 의미 부여되지 않는 한 컷일 뿐인데도, 여전히 그 장면만 떠올리면 눈물이 핑 고일 정도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일도, 기대온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두는 일도 처음부터 퍽 자연스럽게 하기 어렵다. 미래처럼 관계에 자신이 없고 다른 사람과 체온을 나누는 일이 어색했던 사람이라면 아마 더 그랬을 것이다. 거절당하지 않을 걸 알고, 냄새가 난다거나 행동이 이상하다거나 하는 말로 시비를 걸어도 거짓이라고 대꾸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을 갖고, 아니면 적어도 개의치 않아하고, 이 관계를 없던 일로 하거나 망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야만 할 수 있는, 스스럼없어지기까지 각고의 시간이 필요한 그런 동작. 허공에 연습할 수도 없어서 반드시 친구가 필요한, 바로 그런. 내가 정말 무리에 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미래가 한참이나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불편함 대신 포근함을 느끼는 순간을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웹툰 <여중생A>는 2016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 오늘의 우리 만화상은 총 다섯 작품이 받았는데 그중 <여중생A>와 <유미의 세포들>, <혼자를 기르는 법>이 모두 여성의 성장과 독립을 다루었다. 세 편의 만화 모두 댓글창에서 ‘남자 주인공은 없나요/누군가요’라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았다. ‘이렇게 꾸미면/머리를 기르면/살을 빼면 예쁠 텐데 왜 안 그래요’ 라는 해맑고도 유해한 의견을 만만찮게 접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자연스럽게 비슷한 댓글이 줄어들었다. 여자의 이야기에 굳이 남자 주인공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한 사람이 자라는 데 갖춰야 할 것은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김송요)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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