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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통속적인 문법으로 비범성을 드러내는 웹툰 (나하)  


※ 이 기사의 필자 나하님은 연세대학교 페미니즘 학회 Alice와 실천단 ‘97년생 김나영’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쌍년이 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원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쟁취하려 하고야 마는 년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쌍년’이란 단어는 남성에게 있어선 기피하고 혐오하면서도 결국엔 구애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 이들을, 여성에게는 워너비면서도 닮지 말아야 하는 이들을 의미했다.

 

최근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이 단어를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정의하며 전유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모든 걸 실천하려는 여성’으로 역사를 걸어온 수많은 인물들이 ‘쌍년’의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이 언어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의 부정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트위터에서는 “#나는_쌍년이다”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기도 했으며, 최근 저스툰에서 <쌍년의 미학>(민서영 작가)이라는 만화가 성황리에 연재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최근 이슈들에 힘입은 페미니즘 입문자라 하더라도, 사실 여성이라면 누구든 속으로 싫어할 수밖에 없는 ‘쌍년’의 기호가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이때의 ‘쌍년’은 남성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들을 사용하는 여성들을 지칭한다. 그 남성들은 다른 여성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다. 그녀들은 경쟁자 여성을 알게 모르게 험담하기도 하고, 순진한 척 연기하며 남성들이 원할 만한 말과 행동들을 계산 하에 진행한다. 많은 남성들이 이에 매료되므로 ‘쌍년’을 제외한 다른 여성들은 그녀를 페어플레이 하지 않는 분탕종자,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적은 여자’(여적여) 구도이다.

 

▶ <내 ID는 강남미인> 댓글 내용. 일상 속 여적여 구도를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웹툰에서 기맹기 작가가 연재중인 <내 ID는 강남미인>에서도 이 구도를 스토리플롯에 차용한다. 성형 끝에 ‘고친 듯이’ 예뻐진 주인공 강미래는 캠퍼스 첫날 신입생 환영회에서 쌀쌀맞지만 잘생긴 남자주인공 도경석과 자연미인 현수아를 만난다. 당연하게도 경석은 이후 주인공과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이 때 수아는 미래를 은근히 공격하고 경석에게 아양을 떠는 등 ‘쌍년(혹은 여우)짓’을 하며 둘 사이의 사랑을 방해한다.

 

그런데 이러한 통속적 문법들을 기반으로 한 만화는 의외의 비범성을 드러낸다. 캠퍼스 생활, 이를 넘어 사회 전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여성혐오의 맥락들을 잡아내고, 이에 등장인물들이 사이다 서사를 생성하는 것이다. 미래는 ‘강남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모에 대한 경멸어린 시선들을 받고 편견과 차별적 언행과 위협의 대상이 된다. 다른 여성 등장인물들 역시 비슷한 경험들을 한다.

 

그러나 수많은 에피소드 내에서 주인공 미래는 둔해서 눈치 채지 못하거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 때문에 불합리한 상황들에 항변하지 못한다. 여기서 비련의 여주인공 대신 화를 내주는 건 까칠하고 눈치 빠른 도경석이다. 수많은 사이다 서사는 그의 질주를 통해 완성된다. 남성권력을 기반으로 부당한 일들에 목소리를 내는 ‘왕자님’이라는 점에서 도경석은 (특히 여성)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자신에게 엉기고 미래를 괴롭히는 수아에게 사이다 발언을 날릴 때이다. 약자의 편에 선 경석은 왕자님, 즉 선을 대표하게 되고 수아는 반대급부의 ‘마녀’, 즉 악이 된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 스토리 플롯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수아는 여성독자들에게 있어 같은 억압을 받는 여성이기보단 ‘악녀’, ‘발암인간’, ‘쌍년’이었다.

 

ⓒ기맹기 글 그림 <내 ID는 강남미인> 중에서. 수아를 제일 싫어하는 건 도경석

 

이는 작가가 통속 연애담 장르의 주류 작법으로 작품 뼈대를 세웠고, 독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많은 여성향 로맨스물에서 여성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주인공을 시기, 질투하는 악녀 캐릭터이다. 왜 수많은 여성들을 위한 동화들에서, 공주는 ‘왕자님’을 추구하고 ‘마녀’에게 위협당했을까?

 

적어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이는 그녀들을 더욱 유순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팥쥐가 아닌, 인내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과업들을 착실히 수행하는 콩쥐가 되라고. 그러면 부유하고 잘생긴 고을 원님이 너를 공주 취급하며 데려가줄 것이라고 주입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 남성의 전유물로서, 수동적 객체로 인형처럼 살아갈 것을 강요받는 한편, 거의 모든 사회적 수행에서 남성의 열화판(하위호환)으로 여겨진다.

 

남성 혼자 생계 부양이 불가한 대다수 서민가정에선 일-가사 양립을 강요받으면서도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는다. 이는 적어도 사회에서 가정 내 재생산(출산과 양육을 통한 노동력 확충)을 활성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묵과되거나 오히려 장려되었다. 이때 여성들은 자신의 경제적 책임자이자 보호자로 서있을 남성에게 간택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여성들은 자신의 라이벌이지, 연대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여적여 구도, 그 속에 내포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주입된다.

 

<내 ID는 강남미인>의 독자와 작가 역시 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때 작가는 여적여 구도를 극사실주의적 방식으로 재현하며 불합리에 대한 떡밥을 깔지만, 독자들은 이를 통속적인 선-악 구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포착하더라도 간헐적이다.

 

이에 따라 독자들은 웹툰 속 여성들이 겪는 수많은 억압들을 목도함에도 불구하고 ‘쌍년’ 수아에게만큼은 동정심을 좀처럼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적의 처단이란 명목 하에 통쾌해한다. 수아 역시 가부장제 사회 속 피해자라는 사실은 최근 에피소드(74화 <무너짐>)에 이르러서야 주목된다.

 

ⓒ기맹기 글 그림 <내 ID는 강남미인> 중에서. 미래는 수아가 곧 자신임을 발견했다.

 

이젠 적어도 거시적 차원에서 수아의 모든 ‘쌍년짓’들이 사회적 산물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외모 하나로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다. 몸 구석구석이 해부되어 값어치 매겨진다. 수동적이고 상냥한 척 하지 않으면 욕먹는다. 결국 같은 과의 가장 잘생기고 따기 힘든 별(남성)이 나의 것이 되었을 때, 혹은 내가 그 별의 ‘것’이 되었을 때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 것을, 더 안전해질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이 모든 강박들에 얽매이는 게 수아만의 일은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런 지표들에 익숙하며, 비슷하게 사고한다. 가장 둔하고 순한 주인공 미래조차 루키즘(lookism, 외모지상주의)을 내면화한 채 주변 여성들의 외모에 점수매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 둘은 사실 웹툰 속 그 어느 캐릭터보다도 닮아있다.

 

이는 이어지는 전개, 먹토 에피소드(56화 <위장하다>) 이후 여과 없이 드러난다. 수아와 미래는 사회가 강요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의 몸을 묶는다는 점에서 너무나 비슷하고, 결국 서로의 공명을 알아챈다. 이에 미래는 수아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고 계속 챙기며, 수아는 미래에 대한 (아마도 원래는 애정과 동질감이었을) 이유 모를 증오심과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경석이 하는 일이라곤 미래의 관심을 오지랖이라 말하고 수아의 악녀성을 단죄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기도 하며, 사회가 그 두 사람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기맹기 <내 ID는 강남미인>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이다.

 

“왜 우리, 왜 살 찌지도 않았는데 빼고, 심지어 토하고, 칼 대고, 예쁘려고 노력하고, 얼굴로 나누고! 우리끼리 싸우고! 왜 그래야 하는 거야! 우리 탓 아니잖아. 그렇게 불행하게 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게 이상한 거잖아. 그러니까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진짜로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할거야.” -76화 <두 사람, 두 손> 中에서

 

작가는 이제 자신의 패를 거의 꺼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여성들이 ‘미래’였고 따라서 많은 독자들이 미래에게 이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수아’일 수밖에 없다는 외침이다. 가부장제 내의 프레임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사람을 욕하는 우리는, 곧 우리에게 맞닥뜨려질 불가피한 생존을 위한 선택들로 인해 같은 여성들에게 공격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조차 ‘우리(여성)의 탓’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들을 진정으로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야만 한다.

 

되살린 쌍년의 기록 속에서, 수많은 순정만화 속의 독자들은 이젠 자신들의 가장 통쾌해야 할, 그녀가 가장 지독하게 몰락하는 장면에서 눈물 흘려야 하며, 분명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녀들의 연대를 향한 여정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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