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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 “우리는 카메라 뒤로도 간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2017년의 할리우드는 여성 배우들에게 고통의 해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줄지었고(관련 기사: 용기 있는 고발이 할리우드를 흔들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남성 감독과 남성 제작자, 남성 배우들에 의해 자행된 많은 젠더 폭력이 폭로되며 화려한 할리우드의 더러운 이면이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배우들, 여성 스텝들은 그 고통에 머물지 않고 있다. 나 혼자 고통을 겪어내야만 한다는 압박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용기를 나누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사실 이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조금씩 시도되어 왔다. 그 중 하나는 여성 배우들이 제작, 연출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다.

 

“나는 뮤즈가 아니다”

 

지난 9월 열린 토론토 영화제(Toronto film festival)에서 화제가 된 작품은 단연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7)였다. 영화 <프란시스 하>(Frances Ha, 2012)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허덕거리는 프란시스를 연기하면서 20대 뉴요커 여성의 자화상을 보여준 배우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준 영화다. 진솔하고 생생하게 10대 여성의 성장과 딸과 엄마와의 관계를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사실 그레타 거윅은 <프란시스 하>와 <미스트리스 아메리카>(Mistress America, 2015)의 감독인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과 공동으로 각본을 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바움백의 뮤즈로 불리며, 함께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기보다 감독이 만들어 낸 창조물로 더 주목받았다.

 

그렇게 누군가의 뮤즈로 불리던 그레타 거윅이 오롯이 혼자 영화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담은 각본과 연출을 담당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다. 미국 매체인 Vulture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뮤즈라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며(I did not love being called a muse), 작가나 감독이 되고 싶었다(wanted to be a writer and director in my own right)고 밝혔다.

 

카메라 뒤로 가는 여배우들

 

여성 배우들이 감독 혹은 제작자로 데뷔하거나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메리 타일러 무어(Mary Tlyer Moore)는 1974년에 자신이 주연이었던 TV쇼 <더 메리 테일러 무어 쇼>(The Mary Tyler Moore Show)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면서, 여성 배우들이 카메라 뒤로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후 2000년대 들어오면서 그런 일들은 조금 더 잦아졌다.

 

1990년대 많은 마니아 층을 만들어낸 드라마 시리즈 <엑스 파일>(The X-files)의 주인공 질리안 앤더슨(Gillian Anderson)은 7시즌의 “모든 것들”(all things)을 연출하고 각본도 썼다. 그는 제작자를 찾아가 자신이 극을 직접 써 보겠다며 기회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이야기를 담아 인기를 끌었던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에서 주연을 맡은 에바 롱고리아(Eva Longoria)는 이후, 드라마 시리즈 <은밀한 하녀들>(Devious Maids), <텔레노벨라>(Telenovela)의 제작자와 감독으로 역할을 확장했다. 에바 롱고리아는 “만약 여성들이 제작자나 감독으로 카메라 뒤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제대로 얘기되지 않을 것이다”(If [women] don’t get behind the camera as producers and directors, our stories will never truly be told)라고 말하기도 했다.

 

▶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자로 참여한 TV 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 스틸 컷 (출처: HBO Offical Website)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시트콤 <프렌즈>(Friends)의 세 여성 주인공 제니퍼 애니스톤(Jennifer Anniston), 커트니 콕스(Courteney Cox), 리사 쿠드로(Lisa Kudrow)는 현재 모두 제작자로도 활동 중이다. 제니퍼 애니스톤과 커트니 콕스는 각각 에코필름(Echo Films), 코퀘트 프로덕션(Coquette Productions)라는 제작사도 만들었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며칠 전인 11월 8일,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 2001)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경력을 가진 리즈 위더스푼(Reese Witherspoon)과 함께 TV 시리즈를 만든다고 발표해 기대를 모았다. ‘아침 TV 쇼를 만드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고 한다.

 

리즈 위더스푼 또한 몇 년 전 제작사를 설립하여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와일드>(Wild, 2014)의 제작자로 활약해오고 있다. 올해 에미 어워즈 시상식에서는 그가 제작자로 참여한 TV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Big little lies)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제작자로서도 그 능력을 증명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배우로 더 익숙한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조디 포스터(Jodie Foster) 또한 감독으로서도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다. <매드맥스>(Mad Max, 20)에서 최고의 전사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은 제작자로서도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올해 넷플릭스 최고의 시리즈로 평가 받는 <마인드헌터>(Mindhunter)의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어느 정도 탄탄히 쌓인 40대 이상의 배우들만 연출, 제작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건 아니다. 1986년생 레나 던햄(Lena Dunham)은 TV 시리즈 <걸즈>(Girls)의 각본, 연출, 제작을 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대중에겐 누군가의 부인, 유명 커플로 더 알려져 있지만 꾸준히 활동해 온 1978년생 케이티 홈즈(Katie Homes)도 2015년 단편 영화를 찍고 현재 장편 영화를 준비 중이다.

 

여성의 미와 패션 산업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며 인기를 얻었던 TV 시리즈 <어글리 베티>(Ugly Betty)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1984년생 아메리카 페라라(America Ferrara) 또한 현재 출연 중인 쇼의 제작자로 활약하고 있다.

 

미혼모의 출산과 육아를 비롯해 여성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룬 TV 시리즈로, 현재까지도 인기리에 방영 중인 <제인 더 버진>(Jane the virgin)의 주인공인 1984년생 지나 로드리게즈(ina Rodriguez)도 얼마 전 방송국 CW에서 새롭게 편성한 TV 시리즈에 제작자로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20대 여성 네 명의 비밀 페미니스트 소셜 그룹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드라마, 로맨스뿐만 아니라 코메디, TV 시트콤 분야에서도 티나 페이(Tina Fey), 에이미 폴러(Amy Poehler) 등이 배우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각본, 연출, 제작에 참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레이디 버드>의 뉴욕 필름 페스티벌 행사 중에, 영화를 만들려고 투자자들과 이야기할 때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말했다. 그 투자자한테 아내와 딸이 있으면 ‘아, 이거 우리 부인이랑 딸 이야기네요’ 하고 이해를 하고, 여자형제가 있으면 ‘이거 우리 누나/여동생이랑 엄마 이야기네요’ 라고 이해하는데, 둘 다의 경험이 없는 남성들은 ‘정말 여자들은 이러나요?’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많은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빛나는 것만큼이나 카메라 뒤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일 것이다. 에바 롱고리아도 말했듯이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의견을 내고 감독과 조율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남성 제작자나 연출자들이 만들어 내는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때로 이상하기도 하고, 배우가 의견을 내도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것이고, 결국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 사라 폴리가 제작자로 참여한 <앨리어스 그레이스> 포스터


물론, 제작에 참여하거나 연출을 하는 일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016년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할리우드(미국 내 상영 수익) 상위 250개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고작 7%에 불과했다. 여성 총괄 제작자가 참여한 작품은 17%, 여성 제작자가 참여한 작품은 24%, 여성 작가가 참여한 작품은 13%이었다. 여전히 문턱은 좁고 사례도 많지 않다.

 

그렇지만 앞선 사례 말고도 더 많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의 도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여성들의 연대와, 더 많은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과 리즈 위더스푼의 공동 제작의 경우, 여성 제작자와 배우로서의 협업으로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레나 던햄의 경우에도 현재 다른 여성 제작자와 협업하여 1960년 배경의 페미니스트 이야기를 다루는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이자 현재까지 마블에서 나온 영화와 TV 시리즈 중 유일하게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제시카 존스>(Jessica Jones)는 다음 시즌의 모든 에피소드를 여성 감독들이 연출할 것이라고 발표해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배우로 활동했으며 최근에는 연출과 제작에 조금 더 힘을 쏟고 있는 사라 폴리(Sarah Polley)가 제작자로 참여한 <앨리어스 그레이스>(Alias Grace)는 마가렛 엣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843년 캐나다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과 그 범인으로 지목당한 여성의 이야기를 가공하여 쓴 것이다.

 

리즈 위더스푼의 제작사는 <나를 찾아줘>와 <와일드>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작가가 쓴 소설 두 편의 판권을 또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 묻혀진 이야기, 그리고 여성 작가들이 조명 받게 되는 기회도 덩달아 발생하고 있다.

 

하비 와인스틴 성추행 사건 이후, 생각치도 못한 더 많은 사건들이 지금까지도 밝혀지고 있어서 그 고통의 현장을 우리는 같이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고통에서 머물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소리 내고 있다는 것. 우리는 분명 ‘함께’ 나아가고 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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