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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을 가지고 노는 후조시들

후조시 문화연구기획 <후조시, 상냥하게 가르쳐 줘> 7화 


※ 필자 소개: 요오드, 철가루, 비이커로 이루어진 퀴어문예창작집단 ‘물체주머니’는 2014년 <영혼을 위한 백합수우프>, 2차백합 동인지 <돌아오세요 305호에>를 발행하였고, 문예지 <소설퀴어>를 준비 중이다. (*후조시: Boys’ Love를 향유하는 사람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내 방 책상머리는 후조시(腐女子)들이 펴낸 2차 동인지 표지와 팬 굿즈로 제작한 일러스트들로 가득하다. 소년 둘의 연애를 묘사하는 것 같은 공X수 스티커도 한편에 붙어있다. 소년의 아래에 누운 소년은 고개를 지그시 돌리고 볼을 붉힌 채 엷은 미소 짓고 있다. 이 광경을 본 외국인 친구는 공X수의 한자를 알아보고 흥미로워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이런 건 레즈비언이 좋아하는 것 아니야?”


팬픽이반 친구들과 학생 시절을 보냈던 1980년대 생인 나였지만, 나는 친구의 질문에 새삼 호기심을 느꼈다.


‘남성성을 가지고 노는 것은 레즈비언 실천이군!’

▶ 공X수 스티커. あたらしい くみたいそう(새로운 짝이 되고 싶어) shop-bside-label.com (출처: B-SIDE LABEL)

 

#여성적 쾌락과 별 볼일 없는 ‘남성성’


열 두어 살 이후로 학생 시절 나는 항상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내가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걷는 중에 뒤에서 포옹을 하고 몸을 만져오는 남자친구, ‘나 지금 너무 화가 나 있는데, 우리 만나서 빨리 자자’(?)고 문자를 보내는 남자친구, 나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음담패설을 나누는 남자친구, 좋아한다고 고백하고는 뒤에서 몰래 브래지어 끈을 풀어버리는 남자 애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은 언제나 조금씩 폭력적이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것’은 또래들의 연애에 깊이 들어와 있었지만, 나는 항상 상대보다 성에 관해 덜 알았고, 성적인 경험들은 그렇게 야릇하지만 매우 불쾌한 것으로 경험되곤 했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농밀한 성적 묘사를 그린 한 외국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자위를 하고 난 후, 나의 삶은 크게 변해버렸다. 성적 쾌락을 혼자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섹스는 내게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대되기보다는 급히 해치워야 할 것에 더 가까워졌다. 또 자기네끼리만 아는 비밀인 양 키득거리며 야한 얘기를 나누거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스킨십을 해 오는 남자들이 우스워졌다.


그들이 거들먹거리며 드러내는 ‘남성성’은 내게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느껴졌고, 나는 연애보다는 나처럼 ‘뇌가 썩은’ 여자 친구들과 음담패설을 나누거나 자위를 하는 게 내게 더 큰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쾌한 포르노를 찾아서


이성애의 판타지가 부서져버린 후의 주체를 이전과 같은 이성애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성스럽게 자위하는 나보다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연애에 시큰둥해진 후로, 나는 남자친구라는 대상 없이 스스로의 성적 욕구를 탐색하는 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포르노그래피를 접하면서 나의 성적 판타지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성적 실천을 욕망하는지 더 많이 묻게 되었다.


하지만 특정 직업의 여성이 등장하는 포르노,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등이 등장하는 포르노, 관음적 섹스 포르노, 다수 간 섹스 혹은 난교 포르노부터 시작해서 형수나 여동생과의 섹스 포르노, 혹은 유아나 심신미약 상태에 있는 대상과의 섹스를 재현하는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금기도 없는 것처럼 ‘남성향’ 포르노가 쏟아지는 것에 반해, 여성으로서 즐길 만한 콘텐츠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20대 여성들의 커뮤니티에는 ‘언니들’이 모아둔 포르노 버스가 정기적으로 올라왔지만, 남성향 속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미녀 배우들이 못생긴 남성의 지루하게 긴 피스톤 운동을 견뎌내는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고 나면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여성향 포르노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언제나 많았지만 잘 만들어지지도, 구해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여성향 포르노가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부족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이른바 야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또는 영화의 인물들을 커플로 엮는 BL(Boy’s Love) 2차 창작지 또는 트위터 썰 계정들은 내게 생생한 여성적 욕구의 표현들로 가득한 놀이터이자 유쾌한 포르노의 장이다.


▶ 쿄야마 아츠키 <헤븐리 홈시크>(삼양출판사, 2016) 영국에서 향수병으로 고생하다 우연히 재회한 두 동창생이 가벼운 스킨십과 정서적 교감을 시작으로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 게이라고 정체화한 적이 없는 주인공들은 향수병이라는 예외 상태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가변적 섹슈얼리티를 경험한다.


이성애 판타지에서 여전히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강렬하고 공격적으로 스킨십을 주도하는 남성상은 더 이상 유일한 것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공X수라는 클리셰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BL 서사 속에서 젠더 역할이 불분명한 주인공들은 상상력을 동반한 많은 남성성을 재현한다.


그러한 다양한 남성성을 반기면서, 임신수에게 출산을 종용하거나 강공의 최애캐가 육아에 지친 파트너를 지극정성으로 마사지하는 장면을 연성하는 후조시들의 판타지와 욕망은 폭력적으로 경험되는 일상의 이성애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후조시들은 그러한 재현을 통해 폭력적 주체라 여겨지는 남성주체에 이입함으로써 이성애 관계에 불안하게 잠재돼 있는 폭력을 스스로 실현해 보기도 하고, 폭력적 관계를 바꾸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놀이와 실험에 익숙한 후조시들에게 폭력적인 이성애 연애 서사나 규범적 젠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남성상이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공X수라는 BL 커플의 공식이 남녀의 위계적 젠더 역할을 재현하기 때문에 비판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내가 보는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또한 BL물이나 그것을 즐기는 후조시들이 현실의 게이들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는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성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젠더 역할에 공감함으로써 스스로의 섹슈얼리티 또한 가변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후조시에 대한 그와 같은 비판은, 변하지 않는 이성애적 주체를 가정함으로써 오히려 이성애 관계를 정상화하는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닐까?


#이성애 관계에 의문을 던지는 후조시 실천


‘한남과는 도대체 연애를 못하겠다!’는 헬조선 여성들의 비혼 선언은 이성애 판타지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이성애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성애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학자 게일 루빈이 잘 지적했듯이, 그것은 특정한 성애를 지배적인 것으로 작동시키는 담론 위에서 기능하는 사회적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여성성/남성성과 이성애 연애에 관한 판타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내가 널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지 못하고 잠입경찰 현수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버리는 <불한당> 재호의 연애담에 열광하다가, ‘마누라’ 험담을 남성동맹의 확인쯤으로 생각하며 퇴근 후 아내 몰래 성매매나 일삼는 한남들의 남성성과 마주치면 그것이 얼마나 하찮게 느껴지는가! 연인과 함께하는 식사를 정성스레 준비하는 <어제 뭐 먹었어?>의 냉(冷)미남 시로와 비교하면, 아내의 도마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여성성에 관한 한남들의 판타지는 또 얼마나 덜떨어지게 느껴지는지!


▶ 영화 <내부자들> 스틸 컷. 소위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남자들의 사투를 그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재현되는 권력자들의 룸살롱 문화는 남성관객들로부터 현실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재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 영화 <불한당> 스틸 컷. 잠입경찰 현수에게 사랑을 느끼는 재호

 

폭력적인 스킨십을 환상적으로 재현하는 드라마, 구수한 운율을 만들기 위해서 입에 찰싹 달라붙는 여성혐오의 언어를 갖다 쓰는 래퍼들의 음악, 각종 사회정의를 말하기 위해 어김없이 희생당하는 여성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를 등장시키는 영화나 소위 룸살롱 장르영화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BL 속에 살아 숨 쉬는 다양한 남성성과 사랑의 언어들은 현실의 도피처가 되어줄 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지, 어떤 방식의 연애를 더 꿈꿔 볼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게 해준다.


#후조시들, 어쩌면 이미 퀴어?


▶ 파트너 켄지와 함께 먹기 위해 요리하는 <어제 뭐 먹었어?>(요시나가 후미 작, 삼양출판사)의 시로


남성 주체들이 여성을 교환하는 문화 위에 세워져 있는 이성애 규범적 남성 지배의 문화는 여성을 주체가 아닌 ‘교환의 대상’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여성 간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때 지배적 규범이 부과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단순성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성적 욕망에 대해 함께 말하며 끊임없이 성적 판타지를 개발해 가는 후조시 여성들의 연대는 어쩌면 이성애 규범이 허가하지 않은 관계에까지 욕망을 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일 수 있다.


이쯤에서 다시 질문해 보자. 남성성을 가지고 노는 것은 정말 레즈비언 실천일까? 어쩌면 후조시들은 여체보다는 미려한 남체에 더 흥미와 성적 욕구를 가질 수도 있고, 또 후조시 실천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감추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성애자에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정성별에 맞는 규범에서 미끄러져나가는 후조시 실천을 지속하고, 또 규범적 남성성을 의문시하며 고정된 성적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이성애 관계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후조시들은 어쩌면 퀴어 주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실천 속에서 이미 퀴어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점에서 후조시들은 퀴어 운동과 연대할 수 있는 동지가 아닐까?


여기서 필자들은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서로 진영을 긋고 서로에게서 분리되게 만드는 성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를 넘어서, 이성애 중심주의와 그것이 의존하는 젠더규범성에 문제제기하고 좀 더 해방적인 성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데 후조시와 퀴어 주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철가루)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이 연재의 제목인 <후조시, 상냥하게 가르쳐 줘>는 이도 기호우(井戸ぎほう) 1차 BL만화책 <상냥하게 가르쳐줘>(やさしくおしえて)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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