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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은 정말 흑역사일까
1990년대~2000년대 수도권 퀴어여성 역사를 되짚은 <댄앤나우>
‘온라인 탑골공원’이 핫한 키워드로 떠오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SBS 유튜브 채널 ‘KPOP CLASSIC’에서 1998년부터 2000년대 초반 방영된 SBS ‘인기가요’를 실시간 중계한 것이 이렇게까지 화제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왜일까? 사실 그리 먼 과거도 아니고 고작 10~20년 전의 일들인데 말이다.
지금의 청년세대인 20~30대들이 자신의 10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는 현장은 ‘온라인 탑골공원’만이 아니다. 지난달 27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공개된 <달빛천사>(2004년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15주년 기념 국내 정식 OST(국내 성우들이 노래) 발매 펀딩에 6만2천 명이 넘게 참여했다. 목표액을 7,208% 뛰어넘는 23억 원(19일 기준) 이상이 모여 국내 크라우드 펀딩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수도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퀴어 여성들도, 자신들의 지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나누면서 과거를 소환하는 행사를 열었다. 10월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신촌문화발전소에서 열린 <댄앤나우>가 그것이다. 11일 저녁에 열린 좌담회 <흑역사를 찬란한 역사로>와, 12일 낮부터 저녁까지 열린 스펙트럼 콘셉트 쇼 <그때 전시, 그때 공연 그리고 일차>로 구성되어 진행되었다.
11일 저녁, 신촌문화발전소에 열린 <흑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좌담회 현장. ©댄앤나우
화제성으로 본다면 ‘온라인 탑골공원’이나 ‘달빛천사 OST’에 비할 바 안 되지만 ‘그때 그 시절’을 살아내고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진 건 퀴어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서 묻혀 사라져버리기 쉬운 그 역사를 되짚은 <댄앤나우>의 현장을 전한다.
‘신공’을 아시나요?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서울 신촌공원은 당시 ‘이반’이라고 불리던 청소년 레즈비언(물론 다양한 정체성의 여성들이 있었겠지만, 당시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이 기사에선 동성애자로 통칭)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대략 80~100명, 많을 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문’(원 가족이 아니라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끼리 만든 일종의 대안가족)을 이루고 ‘일차’(일일찻집)를 뛰었다는 그곳을 사람들은 ‘신공’이라 불렸다.
신촌공원은 어쩌다가 10대 여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신공’이 되었을까? 그 ‘신공’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 우야, 한국퀴어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오망개, 퀴어 댄스팀 <큐캔디> 디렉터 루시아, 퀴어굿즈 <라온> 기획자 아라는 “흑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좌담회에서 그때의 ‘흑역사’를 하나하나 끄집어 올렸다.
먼저 이번 행사를 기획한 우야는 ‘신공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1982년부터 2019년까지의 주요 연혁을 담은 긴 연도표를 공개했다. ‘신공 문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이야기인데 왜 1982년 이야기부터 나오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1982년에 삐삐라고 하는 무선호출기가 나왔고 1986년부터 천리안 등 PC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어요. 그 후 1995년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에 동성애자 모임 개설되는데, 오프라인에선 1993년에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초동회’가 생겼고 이후 1994년에 남성 동성애자 모임인 ‘친구사이’가, 여성 동성애자 모임인 ‘끼리끼리’가 발족했어요.”
12일에 열린 스펙트럼 콘셉트 쇼 <그때 전시, 그때 공연 그리고 일차> 중 퀴어댄스팀 큐캔디 공연. 큐캔디는 ‘팬코스’ 오마주 공연과 커버댄스 등을 선보였다. ©댄앤나우
삐삐와 PC통신의 시작이 중요한 것은, 밖으로 나와 드러내고 활동하기 어려웠던 동성애자들이 서로를 찾아내고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전은 동성애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여성 청소년이라는 위치에서 봤을 때 중요한 사건들도 있었다. “1986년엔 서울시 보라매청소년회관, 1988년엔 목동 청소년수련관이 개관했는데, 이게 중요한 이유는 이후 1세대 아이돌들의 등장 이후 ‘팬코스’(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이 아이돌의 의상 및 액세서리 등을 갖추고 커버댄스를 추는 일)를 하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여성 청소년들의 또래문화 중 하나였던 팬코스를 탄생시킨 “SBS 인기가요의 시작(1991년), 케이블 음악 전문채널 엠넷의 탄생(1993년) 그리고 H.O.T(1996년), 젝스키스(1997년), S.E.S(1997년)와 핑클(1998년) 등 1세대 아이돌 데뷔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사건들”이다.
우야는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신촌이 ‘레즈동네’로 떠오르게 된 큰 원인으로 “1996년 SBS <송지나의 취재파일-세상 속으로>에서 방영한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레즈비언’”을 꼽았다. “그 방송에 ‘끼리끼리’ 활동가들이 나오고 신촌도 나와요. (또한 1997년부터 신촌에 레즈비언 바/클럽들이 생겨남) 신촌과 레즈비언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신촌에 가면 레즈비언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레즈비언들이 신촌을 서성거리기 시작한 거예요.(웃음)”
또래들이 모여서 노는 ‘일차’의 시대 열리다
이후 프리챌(1994년), 싸이월드(1999년), 버디버디(2000년), 엔티카(2000년) 등의 온라인 서비스들이 시작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동성애자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 지며 오프라인으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차츰 늘어났다.
<흑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좌담회에선 솔직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왼쪽부터 아라, 루시아, 오망개, 우야. ©댄앤나우
“중학교 때부터 정말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 및 모임에 다 가입을 했다”는 오망개는 “‘레즈비언 중학교’로 알려졌던 학교에 들어가게 돼서 기대가 컸는데(웃음), 가니까 오히려 ‘이반검열’(학교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여 정학이나 퇴학을 시키거나, 머리가 짧거나 손만 잡아도 제재를 가하고, 스킨십에 따라 벌점을 매겨 행동을 규제하는 반인권적 행위)이 심해서 나 같은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될지 몰라 갑갑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 모임을 찾게 됐죠.”라고 털어놨다.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으로 온라인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실제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결국 생전 가본 적도 없는 다른 지역에 가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신촌에도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차’도 나가고 ‘신공’도 가고 그랬어요. 근데 ‘신공’에 가면 전 좀 무섭더라고요. 사람들이 거의 백 명 가까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화장실도 못 가고. 거기다 화장실에서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싸우는 사람도 있었고, 별별 일이 다 있었거든요.(웃음)”
당시 유명 ‘일차 팀’(’일차’를 주최하는 사람들의 모임) 중 하나였던 ‘카르페 디엠’의 객원 주방 멤버로 들어갔다가, ‘카르페 디엠’이 해산한 이후 ‘인피니티’라는 팀을 꾸려 활동했던 아라는 “‘일차’가 주는 해방감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저는 사실 ‘신공’이나 ‘일차’ 문화에 굉장히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 공간은 레즈비언인 나를 밝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근데 만나는 사람들과 내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그냥 밥 먹으면 되고 수다를 떨어도 되는데, 상대가 ‘내가 레즈비언이다, 여자 좋아한다’는 걸 모르니까 답답하잖아요. ‘신공’이나 ‘일차’에 가면 그걸 그냥 다 까고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 해방감이 너무 좋았던 거에요. 그래서 그 하루가 너무 소중했고 그 공간들이 너무 소중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자리를 하나 만들고 싶었고요.”
행사를 기념한 스티커엔 당시 썼던 말인 ‘띵’(이반과 함께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과 ‘키섹담술’(키스 섹스 담배 술의 줄임말로 ‘(키섹담술)유유유무’ 이런 식으로 쓰이면서 자신이 어떤 게 가능한지(유/무) 표시하는 말로 쓰임) ©일다
외모, ‘가문’, B/P/전천 구분에 장벽도 느껴
하지만 그런 문화 안에 모두가 편안함을 느끼고 자리를 잡았던 건 아니다. 루시아는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도 여러 장벽을 느꼈다.
“처음으로 ‘유이카’ 가입을 했는데 여러 가지가 어려웠어요. 거기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냥 쉽게 만날 수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그 안에서도 엄청 인기가 많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기의 척도는 조회수나 댓글 숫자였죠. 내가 이 커뮤니티에서 인정받는 존재고 내가 얼마만큼 어필되는 존재인지는 그 숫자로 알 수 있었어요. 보통 그렇게 인기가 많은 글을 올린 사람들은, 외모가 뛰어나던지 어떤 팀/가문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죠. 요즘 말로 하면 ‘인싸’같다고 할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방법을 몰라 전전긍긍했던 루시아를 혼란스럽게 한 건, B/P/전천(B는 부치, P는 팸, 전천은 팸/부치 전환이 가능한 사람) 구분도 한몫했다. 커뮤니티에 가입해 소개 글을 쓰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설명할 때, B/P/전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거의 필수적인 단계였던 탓이다.
“계속 ‘내가 누군지’ 물어야 했고 그 안에서 선택해야 했어요. 내가 날 ‘부치’라고 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무언가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요. 그게 힘들었어요. 내가 나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들어갔고, 분명 어떤 맥락에서는 소중하기도 한데, 그 공간에서 날 어필하고 인정받는 게 중요해지기도 하니까 불안하기도 했죠.”
“신공에 갔지만 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던 루시아가 다시 ‘신공’과 연결된 건 <퀴어뱅>(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2008년부터 진행한 10대 여성이반 거리이동상담 활동)을 시작하면서다.
“19살 때였을 거에요, 전 상담가는 아니니까 상담을 한 건 아니고, 판넬 같은 거 들고 페미니즘을 알리고 그랬거든요. 예를 들어, 여러 여성 이미지가 있는 판넬을 들고 ‘이 중에 여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하는 거죠. 청소년들이 다가오면 ‘같이 해 보실래요?’라고 말 걸고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을 같이 얘기하고 스티커 붙이고 그런 거요. 활동은 재미있었어요. <퀴어뱅> 활동을 하면서, 내가 (이 커뮤니티에) 들어와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답답했던 부분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이 커뮤니티와 함께하고 싶었던 거죠.”
12일에 열린 스펙트럼 콘셉트 쇼 <그때 전시, 그때 공연 그리고 일차> 중 ‘하우스오브허벌’의 공연 ©댄앤나우
그때 그 시절은 정말 ‘흑역사’일까?
<흑역사를 찬란한 역사로>라는 좌담회 이름에 걸맞게, 그때의 일들이 왜 주로 ‘흑역사’로 소환되는지에 대한 물음과 그 역사를 제대로 짚어보자는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그 시절은 왜 ‘흑역사’로 불리는 걸까? 라는 물음에 대해 루시아는 “커뮤니티에서 인정받고 싶은 맘에 계속 갈등하고 헤매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흑역사’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때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잘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냥 ‘으으.. 기억하기 싫다거나 그때 힘들었다’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게 되잖아요. 그리고 당시에 내가 어떤 식으로 갈등했고 그걸 어떤 식으로 헤쳐 나오면서 힘을 발휘했는지의 역사이기도 하고요.”
당시 ‘일차’를 진행하면서 “많은 실수들을 했기 때문에 ‘흑역사’로 기억되는 것 같다”고 말한 아라는 “그렇기에 내일(12일) ‘일차’ 행사는 그런 부분들을 보완하려고 노력했다”며 웃었다.
당시 학교에서 ‘마녀사냥 및 이반검열’을 당했던 상처도 그때를 떠올리기 싫은 ‘흑역사’로 만드는 이유다. “학교에서 교내방송으로 누구누구 이름을 불러요. 그래서 가 보면 다 칼머리인 거에요.(다같이 웃음) 같이 불려서 혼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끈끈한 유대감이 생기기도 했죠.”(아라)
또한 “진짜 ‘찬란한 역사’로 기억하기 위해선 더 많은 것들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얘기한 우야는 “당시의 B/P/전천 문화, 심지어 그때 우리가 얼마나 뭘 몰랐으면 펨(Femme)을 P라고 했겠어요.(웃음) 그 문화 속에서 부치가 어떤 남성성을 수행하게 되었던 과정과, 부치에게 기대되었던 것 등의 더 많은 이야기도 꺼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객석에선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분명 기록될 가치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단지 개개인의 ‘흑역사’로 덮을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야 ‘우리들의 역사’로 만들 수 있다는 <댄앤나우> 행사에선, 무시하지도 포장하지도 않은 그때의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종로, 이태원은 게이동네라고 하면서 신촌, 홍대는 왜 레즈동네라고 불려지지 않는가. 왜 우리의 땅과 기억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우야)라는 물음이 단지 질문에 머물지 않기를, ‘그때 그 시절’의 퀴어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나올 수 있기를, 그리고 ‘찬란한 역사’로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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