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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일 넘도록 멈춰선 ‘세월호의 시간’
오늘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피켓을 드는 사람들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쏜살같다“는 말이 와닿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정신없이 변화하고요. 세월호 소식을 마지막으로 전한 때로부터 어느새 천일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새 많은 일이 있었죠. 세월호가 인양되었고, 정권이 바뀌었고, 미수습자 9명 중 단원고 조은화, 허다윤학생과 고창석 선생님, 승객 이영숙 님은 드디어 가족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은 멈춰선 지 오래입니다.
세월호참사 2004일째였던 10월 10일 서울 망원역 앞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명운동 중인 필자. (출처: 세월공감)
세월호참사 1,000일과 2,000일 사이에 무슨 일이
2014년 4월 16일. 학생들을 포함한 승객들이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모든 시민들이 마음을 졸였습니다. 연이은 언론의 왜곡 보도와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분노하며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수없이 약속했습니다. ‘가만히 잊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보수 정
치인들과 언론은 유가족을 ‘세금도둑’으로 몰았고, 당시 정부는 진상규명을 방해했습니다.
당시 저는 언론이 전하지 않는 소식을 알리고 싶어서,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들과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전했습니다. 분노와 좌절의 이야기들이라 힘들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세월호의 진상규명에 대한 희망적인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이천일이 훌쩍 지난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다섯 명의 미수습자와 함께 깊은 바닷속에 묻혀있습니다.
세월호참사 천일 기억문화제(2017년 1월 7일)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와 만나 광화문 광장이 시민들로 차고도 넘쳤는데, 이천일이었던 지난 10월 6일에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 뮤직 페스티벌’에 밀려 이순신 동상 앞쪽에 작은 무대를 차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월호참사 천일을 추모하며 개최된 뜨개전시 <그리움을 만지다>는 서울 시민청 커다란 갤러리에서 열려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죠. 그러나 이천일을 추모하며 열린 뜨개전시 <번짐>은 안산 화랑유원지 호수 앞 산책로에 설치 전부터 ‘4.16생명안전공원 건립’을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훼손될까 걱정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지난 천일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0월 5일~13일까지 안산 화랑유원지 소공연장 앞과 호수 산책로에서 진행된 뜨개전시 <번짐>. 시민들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안부를 담아 백세 그루의 벚나무에 뜨개 나무 옷을 지었다. (촬영: 화사)
정권이 바뀌었으니 정부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2016년 겨울부터 세월호참사와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시작됐고,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씨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건져내기 어렵다던 세월호는 뭍으로 올라왔고, 광화문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9일간 단식을 했던 문재인 씨는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광화문으로 달려와 유가족들 손을 잡았습니다. 세월호의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는 처벌되며, 안전과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를 만들어갈 것에 대한 희망의 목소리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2018년 봄, 세월호참사 4주기가 되기 전에 광화문 광장에 있던 14개의 천막이 철거되었습니다.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광장에 나와 땡볕과 추위와 싸우며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농성을 이어온 시민들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망원역 입구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피켓팅과 서명운동을 벌였던 저는 이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았다면, 정권이 바뀐 후엔 ‘정부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니 이제 들어가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2018년 3월에 드디어 2기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하지만 “(1기)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비상임위원과 상임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조직적으로 특조위 조사 활동을 방해하고 위법하게 강제해산을 시키는 과정에서 역할”(프레시안, <황전원의 반성문 “세월호 진상규명 방해 인정”> 2018년 5월 2일자)을 했다고 자백한 황전원 씨를 포함하여 유가족이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결국 황씨를 포함시킨 채 2018년 12월에서야 2기 특조위 활동이 시작되었죠.
그러나 특조위가 조사를 위해 황교안 전 총리(현 자유한국당 대표)의 출석을 요구했을 때 “수사권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중앙일보, <“황교안 조사한다”는 세월호 특조위, 어떤 권한 가졌나> 2019년 5월 2일자)라며 무시당하는 등 진상규명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2019년 봄, 세월호참사 ‘5주기’ 즈음에서야 언론은 세월호 재판에 증거물로 제출되었던 영상이나 문서의 ‘위조’가 확인되었다는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을 느낀 몇몇 시민들은 ‘대통령직속 수사단’을 설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청와대 앞에서 문재인 정부에 ‘세월호 전면 재수사’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시민들이 지켜온 천막들이 사라진 후,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세월호참사는 과거의 사건처럼 ‘기억공간’으로만 박제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사람들은 세월호 문제가 다 끝난 줄 알죠’
세월호참사 천일이었던 2017년 1월 9일부터 이천일이 된 2019년 10월 6일. 그 천일 사이에 저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는 2014년 겨울부터 망원역 ‘요일지기’(각 요일을 맡은 당번)가 되어 주 1회 1시간 동안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거나 피켓팅을 했는데요. 제가 담당한 요일에는 피켓팅을 하기 위해 다른 일정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2017년 연말에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우리도 2018년부턴 외롭게 투쟁하기보다 요일을 정해 주 1회 ‘요일지기’가 모두 모여 피켓팅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음의 ‘짐’을 덜었습니다.
또 2015년 가을부터 청와대 앞에서 ‘미수습자 수습’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시던 다윤 어머니가 하루라도 쉬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월요일마다 1시간 피켓을 들며 ‘월똥팀’(월요일마다 청운동 피켓팅을 하러 출동하는 당번들)으로도 활동을 했는데요, 다윤 어머니가 1인 시위를 그만두실 때까지 하기로 했던 ‘월똥팀’ 활동도 2017년 여름에 임무를 완수하며 마무리했습니다.
전에는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이 빌까 걱정하며 노란리본 공작소에 가서 리본을 만들었다면, 천일 이후에는 ‘촛불 시민’들이 많아진 것에 안도하며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느라 광화문에 가는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지난 6일 열린 세월호참사 이천일 기억문화제 소식을 접하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들리지 않는 세월호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안타까움과 좌절감 때문에 외면하고 싶었지만, ‘세월호에서 아직 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러다 ‘망원역지기’들과 오래 함께하면서도 피켓팅하기에 바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세월호참사 이천일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움직이는지, 언제까지 피켓팅을 할 생각인지 저와 함께 ‘요일지기’였던 자몽, 모란, 나무늘보, 느낌표와 타잔, 느리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10월 17일, 매주 목요일 망원역 앞에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피켓팅을 하고 있는 ‘망원역지기’들. (출처: 세월공감)
동생인 제가 혼자 피켓팅을 하다가 몇몇 시민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것을 알고, 부천에서 망원역까지 와서 함께 자리를 지켜온 ‘자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천일이 지났는데, 처음에 망원역지기 했을 때랑 비교했을 때 눈에 보이게 달라진 게 없고,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열심히 활동하셨던 분들도 떠나가고, 남아계신 분들 사이에서도 여러 분란이 있고 다른 목소리도 있고…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워. 3년 정도까지는 아이들 생일을 알리는 글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어. 지금은 눈 뜨자마자 세월호 달력을 보면서 애들 생일을 SNS에 올리는데, 그때 마음 같지는 않지만 진상규명될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계속할 거야.”
자몽은 저와 함께 광화문 <노란리본 공작소>에 다니며 리본을 만들다가, 제가 일상이 바빠져 가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꾸준히 찾고 있습니다. 광화문 시민들의 공간이 사라지고 텅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둘째, 넷째 주 목요일에 망원역 피켓팅 대신 광화문으로 가서 정한 시간에 자리를 지키며 리본을 만들고 있답니다.
“나는 세월호를 통해 처음으로 광장이라는 곳에 나와서 활동을 해. 이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도 들어. 오늘(10일) 보수집회에서 또 나왔는데, 참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스피커를 최대로 해서 귀가 찢어질 것 같았어. 세월호 기억공간에는 자리를 지켜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여기를 지켜야 할 책임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시청 공무원이나 416연대 사람이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도 서명도 안 하고 가는 거야. 망원역에서보다도 서명을 못 받아. 망원역은 우리가 막 외치니까 오는데, 광화문은 두 시간 동안 열 명도 없었어.”
진상규명 요구 활동을 삶의 우선순위로 하고 다른 일정을 정하는 자몽은 여태 묵묵했는데, 말을 청하니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광장이 ‘농성’의 의미가 있었는데, (세월호 기억공간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기념관 같이 되어버려서 내 친구는 ‘세월호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고 해. 다 끝난 줄 알아. 오전이나 오후에는 유가족분들이 조를 짜서 지키시는 것 같은데, 저녁 시간에는 사람이 없어. 광장은 정말 비어 있어.”
“이천일 문화제에 주최 측 추산 참여 인원이 천명이라는데, 그만큼 못 되었어. 너무 슬펐어. 이천일이 지나도록 이렇게 진상규명을 하자고 요구하는 게 너무 슬프고, 이제는 사람도 너무 적어서. 그래도 고무적이라고 느껴졌던 건,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 그래도 뉴스에서 나오니까 초등학생 정도 가족들이 보여서 그걸로 그나마 위안 삼을까.”
문재인 정부는 하지 않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세월호참사 2004일째였던 10월 10일 서울 망원역 앞 피켓. 이제 공소시효가 1년 5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출처: 세월공감)
2014년, 무작정 망원역에 찾아간 저를 친절하게 맞아 줬던 ‘모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천일 됐다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가 깜짝 놀랐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싶고, 솔직히 말하면 이년 삼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이천일까지 돼서 이러다가 십년 이십년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우울해졌어요. ‘망원역 피켓팅 언제까지 할까?’ 생각하다가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우리의 망원역은 당장에 진상규명을 하라고 아우성을 한다기보다, 가족과 나란히 서 있다는 의미가 가장 큰 것 같아요.”
“우리가 ‘이번엔 잊지 말자’, ‘잊지 않을게’라고 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것 역시도 다 잊어버리고, 사실 사람들 대다수가 잠재된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행한 폭력, 원인을 밝히지 않는 것도 2차 폭력인데, 이런 폭력에 다시 무뎌지고, 이런 폭력에 나를 노출시키는 거잖아요. 세월이 얼마가 가든지 우리 이웃들에게 폭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계속 상기를 해내야 잠재된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예방할 수 있다.’ 이런 의미가 있는 거여서 힘닿는 데까지는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혼자는 할 수가 없는데, 함께하는 동료가 있어서 맘먹을 수 있는 거고, 참 감사해요.”
이름처럼 과묵한 ‘나무늘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요.
“처음 할 때는 머릿속에 큰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요. 늘 커다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겨우겨우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이게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는데, 이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망원역지기 중에) 누가 그만두자고 (먼저 말)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서명받고 피켓팅하는 것) 안 해도 된다면 제일 좋죠.”
이전에는 피켓들을 망원역 옆 건물에 두고 사용했는데, 이제는 맡아줄 수 없다고 해서 마을 카페에 맡겨야 합니다. 자연스레 피켓을 차로 실어 나르는 당번이 된 ‘느낌표’의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참사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었고,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근데 진상규명은 더디고, 성과는 안 보이고, 여전히 유가족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싸우고 계세요. 416연대와 가족협의회가 소통이 잘 안 되고 내부에 피로감이 있는 반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촛불’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던 것이 세월호 부모님인데 이렇게까지 약속을 안 지킬 수가 있는지, 부모님들 손 맞잡고 금방 해결할 것처럼 했지만, 진행이 안 되니 참담해요.”
“세월호는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맞닿아있어요.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2020년 12월까지인데, 내년까지 딱히 진상규명을 위한 가이드를 만들기 어려울 거예요. 특조위가 기소권 수사권이 없고 말 그대로 위원회라 우리가 대통령 직속 특별수사단을 요청했던 것인데, 안 된다고 했어요. 최근에는 검찰이 주도하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아쉬움이 크죠. 들리는 목소리 중에 ‘자유한국당 해체’ 요구 같은 것도 있는데요. 지금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게 문재인 정부인데, 그들(자유한국당)에게서 권한을 빼앗은 건데, 이제 그런 주장은 맞지 않죠. 이 정부가 하지 않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복잡한 생각이 들어요.”
‘월똥팀’ 멤버이기도 했던 ‘타잔’은 다른 활동이 많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합니다.
“속상하죠,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밝혀진 것은 없는데 잊혀져가고 있고, 가장 애썼던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외롭게 하고 있고,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것이 당연한 양 사람들 의식 속에 자리매김된 게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죠. 사실 다른 마음 먹지 않고 묵묵하게 미련하게 해왔는데, 그게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잖아요. 많은 고민도 있을 거고 개개인의 상황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장 일순위로 올려놓고 포기하지 않고 하는 그 노력이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다른 일들에 묻혀버리고, 그냥 일상처럼 돼버린 게 속상해요.”
타잔의 이야기를 들은 날도 망원역에서 ‘세월호 전면 재수사’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기 위해 모여 피켓팅을 했는데, 모자에 태극기 뱃지를 달고 있던 노년 남성이 들고 있던 물건으로 타잔을 위협했습니다. 소란이 벌어지고, 그분이 가고 난 후 타잔은 자신이 더 놀랐을 텐데도 “세월호 리본을 가방에 달아주세요”, “세월호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치던 모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염려했어요.
“(다른 망원역지기들이) 마음을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게 있죠. 우리가 청운동에서 길 건너에 (미수습자 수색을 요구하며 일인시위 하는) 누구를 봤을 때 서로 안쓰럽고 애틋하고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게 있었잖아요. 그때 미수습자는 소수여서 오히려 더 그런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여기는 그래도 성미산마을 공동체가 등 뒤에 버티고 있고, 손을 내밀면 올 사람들이 있고 공감받고 응원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점점 구석으로 밀려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나도 처음엔 그랬어.’ 이 말은 ‘이젠 그만해도 되잖아.’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함께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반응도 없고, 몇 주기 몇천일 되면 그제야 뭔가 매년 같았던 그런 행사들을 하고서 면피하는 느낌도 들고요. 사실 그런 행사들을 만드는 것보다 일상에서 꾸준히 약속 지키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언제까지 피켓을 들 거냐’는 질문에 대해
타잔은 ‘언제까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할 거냐는 질문에, 영국 힐스버러참사 유가족들 이야기를 꺼냅니다. 힐스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노팅엄 포레스트와 리버풀의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준결승 경기가 열린 영국 중부도시에 있는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리버풀 축구팬 96명이 밀려드는 관중에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합니다. 경찰은 팬들의 부주의로 생긴 단순 사고라고 했지만, 유가족과 리버풀 팬들은 포기하지 않고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고, 결국 27년 만에 법원으로부터 ‘경찰의 과실치사’라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세월호 2주기 지나고 유가족이 영국에 갔잖아요. 그때 너무 우리가 힘든 상황이어서 그분들이 27년 만에 해결되었다는 게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 하루하루가 이렇게 힘든데, 우리가 몇 년을 어떻게 버텨. 정말 이년, 삼년 안에 해결나지 않으면 유가족들은 다 말라죽을 거고, 우리도 더이상 버틸 힘이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압박과 폭력이 심각한데, 이십몇 년이라니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갈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권을 바꿔도 미동도 없는 걸 보면, 이건 정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요구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죠.”
“근데 그렇더라도 세월호를 놓지는 못할 것 같아요. 내가 내 집에서 내 아이를 보고, 내 가족이 웃고, 일상적인 삶을 존중받으며 살고 싶다면, 그렇게 못하는 사람을 안 보고, 그들을 놓고 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언제까지 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느리’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올 초에 호프집에서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 나눌 때도 대답했던 마음 그대로예요. 망원역 당번제로 지켜줬던 분이 있어서 나도 참여할 수 있었고, 이분들이 그만둔다고 하면 혼자 할 수는 없고, 그때까지는 쭉 하고 싶어요. ‘망원역지기가 그만한다고 할 때가 그만할 때’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으며 또 여러 맘이 들었습니다. 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며 일상을 사는 저는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가 ‘이제 우리 충분하니 그만하자’고 이야기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 맘속에 숨어있었을지도 모를 어떤 계획은 망한 것 같습니다. 저는 망원역에서 먼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한 시간 피켓팅을 하러 왕복 두 시간을 걸리는 길을 2년이 넘게 다니고 있는데, 너무 바쁘거나 아프지 않는 한 앞으로도 목요일마다 이들과 망원역에서 시민들에게 세월호를 잊지 말라고, 진상규명을 위한 요구에 서명해달라고 외치게 되겠지요.
언젠가 너무 피곤했던 목요일 저녁, 피켓팅하러 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떠올랐지만 결국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 망원역에 다녀왔죠. ‘이런 사회에서 체념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때문에 더이상 소중한 생명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긍심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내가 행복할 때,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덜 미안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또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계속 망원역을 지키겠지요.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4.16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을 기억하며 함께 만들어갈 시간을 그려보는 이야기마당 <세월호의 시간> 홍보 웹자보 (출처: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공소시효 1년 5개월을 앞두고
이번 글은 공권력의 횡포가 극심했던 박근혜 정권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애칭으로 글을 썼을 때보다 더 암담한 마음으로 힘들게 썼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서 같은 마음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지치며, 그 안에서 갈등을 겪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요.
촛불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고, 이천일 전 약속을 떠올려서 이제는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이 그대로 돌아가는 걸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끝없이 좌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공소시효가 이제 1년 5개월 남았습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화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세월호 유가족들은 합창으로 다른 약자들을 찾아가 응원하고, 연극과 416TV로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10월 22일부터 12월 말까지 세월호 유가족과 그 곁을 지킨 안산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을 기억하며, 또 함께 만들어갈 시간을 그려보는 “<세월호의 시간> Talk To You”라는 제목의 이야기마당이 안산에서 열립니다. <세월호의 시간>을 신청하면 유가족들이 여러분을 찾아가니 많은 관심과 신청 부탁드립니다. http://bit.ly/세월호의시간
※ 세월호참사 재수사 촉구 서명운동 참여하기 http://bit.ly/세월호재수사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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