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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장애여성 수납원들 ‘노동인권’을 말하다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투쟁이 남긴 것⑥


작년 6월,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 오르면서 이들의 실태가 알려졌다. 공공부문이 얼마나 많은 용역 노동자를 쥐어짜며 운영해왔는지 폭로하면서,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217일간 농성했다. 도로공사는 ‘전원 직접고용, 2015년 이후 입사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패소 시 직접고용 해제’안을 발표했고, 올해 2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농성을 해산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라는 과업을 둘러싸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돌아보며, 그 의의와 사회적 과제를 짚는다. [톨게이트 투쟁 기록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어디서 탈북민이 정규직 될 생각을 하냐?’는 소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2019년에 들어서 직접고용이냐, 자회사냐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진짜 선택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직접고용 선택하면 해고되니까 일을 못 하잖아요. (도로공사는 언제가 될지 모를 대법원 판결이 난 이후에야 직접고용할 거라고 했고, 6월 자회사 시범영업소를 운영하면서 이미 500여 명을 해고해 자회사로 흡수했다.) 당장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이 돈이 없잖나요. 자회사 가면 돈은 계속 벌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해고로 스트레스받을 수 있잖아요. 물론 (도로공사는) 자회사가 방안이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 스트레스는 또 어떻게 감당할 거냐?”


재은 씨(가명)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탈북민은 직접고용 못 간다고 하는 거예요. 어따 대고 탈북민이 정직원이 될 생각을 하냐고, 직접고용 선택하면 너희들 스스로 나가게 만들 거라는 소문이에요.”


재은 씨와 그의 언니는 북한이탈주민이다.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팀장에게 묻자, “영업소 노조에 물어보라”며 모른다고만 했다. 사무장에게 도로공사에서 탈북민은 직접고용 안 된다고 했냐고 물었더니, 관리자들은 말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똑바로 대달라고(얘기해달라고) 따지면,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직접고용 주장하고 팀장은 자회사 가라고 압박해서 스트레스 엄청 심했거든요.”


직접고용을 선택한 자매에게 6월 8일 도로공사 지사장이 면담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내가 탈북민이니까 나를 회유하러 온 거예요. 6월 10일까지 서류를 마감해야 하거든요. 제가 그랬어요. 문재인 정부가 정규직으로 해준다고 하지 않냐. 지사장님, 정부 말이 거짓말이냐고 물었어요. 지사장이 말을 안 해.”


지난겨울, 자신들의 투쟁일수만큼 삼보일배를 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용역업체 사장에게 탈북민은 ‘수당’일 뿐


재은 씨는 9월 9일 요금수납원들이 김천 본사 점거 농성을 시작할 때 도로공사와 공권력에 의해 압착을 당하면서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 갈비뼈에 염증이 생겨 병원 치료를 받았던 요금수납원이다.


그의 언니가 먼저 한국에 와서 정착했고, 재은 씨는 남편과 딸을 데리고 2009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언니가 먼저 요금수납원 일을 시작해서 재은 씨와 남편은 언니의 도움으로 2012년부터 요금수납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년 정도 일하고 난 후에 둘째를 임신했다. 임신 2개월째 되었을 때 도로공사 용역업체 팀장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렸더니 돌아온 대답은 “바로 나가라”였다.


“나한테 돈이 안 나오니까, 장애인을 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팀장은 재은 씨에게 며칠 전에 장애인이 다녀갔다는 사실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정부에서 우리 같은 탈북민을 고용하면 사장님께 고용장려금을 줘요. 매월 50만 원에서 70만 원을 최대 3년까지 줘요. 저는 부산의 식당에 취직해서 일 년을 일해서, 여기(도로공사 용역회사) 사장님은 2년밖에 지원을 못 받아요.”


2년이 지나서 탈북민 고용장려금이 중단되자, 재은 씨 자리를 장애인으로 대체해서 장애인 고용장려금을 받겠다는 속셈이었다. 팀장은 ‘사장 입장을 생각하라’고 했다.


“임신했다고 나가라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나라에서(법적으로) 임신했다고 못 자르는 거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안 나가면 언니가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어차피 출산하면 일을 못 할 테고, 언니는 가족도 없이 혼자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내가 나가준 거죠.”


그러나 재은 씨가 일을 그만둔 후에도 그의 언니는 사장에게 “탈북민은 내보낸다”는 이야기를 늘 들어야 했다. 북한말투 때문에 사장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언니가 주임이라서 사무실에서 일했거든요. 우리가 모르는 게 많아서 물어보면 사장한테 무시당하니까, 언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언니 혼자서 일 마치고 컴퓨터 공부하고 습득한 거예요.”


사장은 고용장려금이 끊긴 재은 씨의 언니에게 “너 나가”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 나가도록 자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주었다.


탈북민 고용장려금은 통일부가 탈북민을 고용하는 기업에 3년간 고용장려금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정부 지원제도를 잘 활용하는 기업이었다. 고용지원금 덕분에 탈북민이 취업을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악용하는 사례도 많아서 공론 끝에 사업주에게 주는 장려금은 2017년도에 사라졌다. 대신 탈북민에게 직접 지원하는 정책은 강화했다.


재은 씨가 겪은 일처럼, 톨게이트 영업소에서 고용장려금을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있었다는 사실이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회자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요금수납원들의 현실을 알리는 홍보물을 들고 시민들을 만나러 나가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5개월 9일짜리 계약서


재은 씨가 둘째를 낳고 일 년이 흘렀을 때 영업소에도 변화가 생겼다. 용역업체 사장의 중간착취와 부당한 대우를 더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나 보다. 요금수납원들이 경남일반노동조합에 가입했다.


“2015년에 노조가 생겼어요. 사장이 떼먹은 돈을 노조가 다 받아줬어요. 하루는 사장이 일 잘하는 사람 근처에 있으면 소개하라고 했는데, 송숙언니(노조 사무장)가 재은이가 있지 않냐고. 예전에도 일했고, 영업소에서 가까운 데 사니까 나를 부르자고 한 거예요.”


사장은 재은 씨가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를 대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측은 “시력이 나쁘다고 받을 돈 못 받고 표시등을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하는 동안) 실수 한번 안 하고 일을 잘하지 않았냐”며 재은 씨를 적극 추천했다.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제가 계약서를 쓰러 갔더니 사장이 6개월도 아니고 5개월 9일짜리 계약서를 주는 거예요. 실업급여도 못 받잖아요. 이게 뭐냐고.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써야 하냐고, 나는 못 쓴다.”


재은 씨는 그때 처음으로 사장에게 맞섰다.


마침 노조 사무장인 김송숙 씨가 근무를 서는 날이어서, 재은 씨는 5개월 9일짜리 계약서를 노동조합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사장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거라며 핑계를 댔다. 재은 씨는 “나는 종이 필요 없으니까 계약서를 안 쓰고 일했죠.”


노조가 생기고 나서부터, 재은 씨 언니를 사사건건 간섭하며 트집 잡았던 사장이 태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언니는 노조가 생길 때 바로 가입했어요. 우리가 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한 명보다 백 명이 모여야 힘이 생기니까. 노조에 들어가서 한국 사회도 배우고 문화도 배우고. 든든한 울타리가 우리한테 필요했던 거에요.”


장애인 고용장려금 수급 기간 끝나면 어김없이 ‘나가달라’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에서 145일간의 농성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조미경 씨는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다.


미경 씨는 특이하게도 정년퇴직을 일 년 남겨두고 직접고용을 선택했다. 처음엔 자회사로 가라는 도로공사의 시달림을 꽤 받았지만, 자신이 일하는 진안영업소 직원이 전원 노동조합에 가입해 함께 직접고용 갈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결국, 나만 남았어. 도로공사 꼴 보기 싫어서 나는 직접고용 간다고 했지.”


미경 씨는 18년 동안 요금수납 업무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8년 동안 도로공사의 지긋지긋한 갑질에 시달렸고, 장애인으로서 노동을 착취당했다. 18년간 참아왔던 수모를 다 털어버리기라도 하듯이 미경 씨는 직접고용을 선택했다. 정년을 앞둔 마지막 1년은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145일간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 농성장을 지킨 조미경 씨는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다. 오른쪽이 조미경 씨. 


“도로공사는 아는 사람 없으면 들어가기 힘들어요. 내가 들어가 보니까, 다 빽으로 들어왔어요. 소장 빽, 대리 빽, 도로공사 직원들 빽이 있어야 알음알음 들어가더라고요. 나는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도 들어갔으니까, 처음엔 정말 기분 좋았어요.”


미경 씨가 장애인 취업박람회에 가서 도로공사 영업소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듣고 신청하자,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취업을 알선해주었다. 미경 씨는 요금수납원 일을 하게 된 걸 행운이라고 믿었다.


“장애인 수당은 급수마다 다른데, 나는 30만 원씩 나왔어요. 한 곳에서 3년 정도 정부에서 사장에게 고용장려금으로 지원했는데, 열 명이면 300만 원이 나올 거잖아요. 그 돈이 다 사장한테 가는 거예요.”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따라 기업은 장애인을 고용할 의무가 있다. 민간기업은 3.1%, 공공기관은 3.4% 의무고용률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를 초과하여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일정액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장애인 고용장려금이다.


장애인에게 고용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제도지만, 현장의 밑바닥 실상은 사람 머릿수만큼 돈으로 환산되었고 장애인은 수급 기간 동안만 노동자로서 가치가 있었다. 


“고용장려금 수급 기간이 끝날 때면 막말을 하던지, 잔인하게 잘라. 상처 주고. 그런 거 엄청나게 많이 봤어. 그리고 또 장애인을 고용해서 수당을 받고 운영하지요. 나는 (그 기간이) 3년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은 바뀌었대요.”


미경 씨도 수급기간이 3년이 끝날 때면 어김없이 사장으로부터 ‘그만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근처의 다른 톨게이트영업소로 옮겨서 그 용역업체의 사장이 고용장려금을 받을 수 있도록 일했다.


한국도로공사가 고위직 명예퇴직자에게 톨게이트영업소를 맡겨서 운영하던 수의계약(optional contract. 입찰 등 경쟁을 통한 계약이 아닌, 상대를 임의로 지정해 맺는 계약) 방식일 때의 일이다. 당시는 한번 계약을 하면 4-5년간 용역업체를 유지했다. 그러다 점점 공공기관에서 외주용역을 공개 모집하고 최저단가로 경쟁입찰하는 방식을 도입하면서, 2년마다 업체를 새로 선정하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톨게이트영업소 운영 업체가 2년마다 주기적으로 바뀌게 되자, 계약종료로 인해 해고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장애인고용장려금을 지원받는 업체가 2년 주기로 변경된 셈이기 때문에, 장애인 노동자들은 영업소를 옮겨 다닐 이유가 줄었다.


장애인, 탈북민 요금수납원의 업무는


톨게이트 요금수납 업무는 출구와 입구 근무, 그리고 사무실 근무 세 가지로 구분해 3교대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출구 업무는 차량 운전자가 통행권을 가져오면 운행한 거리까지 요금을 정산한다. 입구 근무는 적재 불량단속과 운행제한 단속 및 재검측, 고속도로 사고 차량 회차 안내, 그리고 차도를 잘못 진입할 때나 고속도로 통행권 발권을 못 할 때 안내하고 도와준다. 사무실 업무는 전산처리, 하이패스 위반 처리, 차고진입을 잘못한 차량, 적재물 과적 차량 고발장 작성 및 입력, 도로공사의 지시사항을 시스템 처리하는 업무를 한다.


2019년 6월 30일 대량 집단해고를 당하기 전.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출근하기 전 부스 앞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진행하는 모습. (공공연대 한국도로공사지회 제공)


장애인 할인카드, 면제카드, 보훈카드 종류에 따라 할인이 다르고, 카드가 있어도 본인 탑승, 등록차량인지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화물차량은 1~5종의 요금도 시간대별로 할인율이 다르다. 견인차량은 견인방법과 견인한 장소에 따라 요금계산이 달랐다. 이 모든 걸 다 외워야 한다.


통행권을 안 들고 오는 사람은 입구 영업소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봐야 하고, 확인이 안 될 때는 고객님을 설득도 해야 한다. 지갑이 없다며 외상으로 해 달라는 고객도 있다. 하이패스 카드 충전을 해주면서 정작 받아야 할 통행료를 못 받고 차를 보내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 통행료는 수납원이 다 물어내야 했다.


“경주 영업소에 급하게 입사해서 5일 동안 교육받았어요. 그 안에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3일 구경하다가 바로 투입되었어요. 그럼 박살 나면서 배우는 거죠. 사람들이 요금수납 업무가 단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안 그래요. 한 3년을 배워야 한다고 해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김정희, 5년 차 경주영업소)


이 모든 업무가 장애인이나 탈북민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척추장애인도 있고, 의수족을 사용하는 중증 장애인도 많았어요. (이 일이) 도로 위를 많이 뛰어야 하거든요. 30분 쉬는 시간에 과적 걸리면 차를 한쪽에 세워놓고, 설명하고, 회차모드 시키고, 안 걸리게끔 설명하고 유턴해서 다시 와서 또 걸리면 사진 찍고 경찰 부르고… 이걸 입구 근무자가 다 하는데.” (조미경)


“우리 영업소는 발달장애인이 6-7년 같이 일했는데요. 비장애인들의 배려가 없으면 일하기 어렵거든요. 잘 걷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대처하기 어려워요. 수납업무만 하면 가능한데, 한 번씩 도주차량이 생기거든요. 차를 세우기 위해서 50-100미터 달려서 세워야 해요. 그 차를 놓치면 일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이 와요.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근무하다 과적에 걸린 차가 오면 다리가 덜 불편한 사람이 뛰어나갔어요.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 때문에 우리가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요. 용역업체 사장이 계약해지를 하면서 비장애인을 내보내고 (장애인 고용장려금 받으려고 그 자리에) 장애인을 채용하는 게 문제였던 거지.”(김송숙)


김천 본사 농성장 앞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모습.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탈북민 노동자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와서 제일 힘들었던 건 말투에요. 중국에서 왔냐고 물을 때 제일 기분 나빠요. 처음 일 년 동안은 말을 못 했는데 일 년 지나고 나는 북한에서 왔다고 밝혀요. 오해를 안 받으려면 말투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여기도 지역 사투리 있듯이 나도 사투리 쓴다고 하죠.” (재은)


아주 짧은 찰나에 통행권을 받고 요금을 받으면서 나누는 몇 마디 대화에서 고객들은 용하게 재은 씨의 북한말투를 눈치챘다. 억양이 높고 세게 느껴지는 북한말투는 꼬투리가 되고 차별이 되어서 돌아온다. 북한에서 왔다는 건, 또 다른 차별의 시선 속에 놓이게 만든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았어요. 용역업체도, 고객들도, 억양이 세다고 우리가 화를 내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민원이 들어오기도 해요. 가짜민원 넣어서 수수료 물게 만든 적도 있고.” (재은)


노동인권 침해는 직접고용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도로공사는 1969년 출범했다. 알려진 대로, 2000년 초반만 해도 톨게이트 요금수납 업무는 정규직 자리였다. 구조조정 일환으로 외주화가 되고 용역직원이 생겨났다. 2009년 한국도로공사의 350여 개 모든 영업소가 외주용역으로 전환했다. 중간착취가 용이해졌고 저임금 일자리를 여성으로 채웠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회적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 지원제도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해 장애인과 탈북민 노동력을 유입시켰다. 공공의 업무는 그렇게 공공성과 점점 멀어졌다.


“장애인협회나 인권센터에서 장애인을 고용한 곳에 안마의자를 주면, 휴게소에 비치해서 장애인 노동자가 써야잖아요. 그걸 사장이 가져가는 거예요. 장애인이 물건을 옮기고 이동할 수 있도록 전동장비 같은 걸 지원해주는데, 그것도 안 줘. 장애인의 눈높이에 맞춘 책상과 의자 같은 것도 나오는데 그것도 사장이 다 가져가요. 정부 정책에 맞게 운영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주현주)


한국도로공사의 용역업체가 취약계층을 많이 고용하고 고용장려금 제도를 잘 활용해서 통계상 고용률을 높였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장애인 또는 탈북민이 노동하는 환경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 노동자의 채용이 곧 고용장려금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그저 통계상의 고용률만으로 이를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 농성에 끝까지 함께한 김송숙 씨는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직접고용 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며, ‘노동조합이 소수자의 노동인권 문제를 더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과세계 점좀빼 제공)


“한국에 와서 몇 년을 일하면서 느낀 건, 정규직이 돼야겠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있고, 후대가 있는데, 해마다 계약하고 해고를 반복하니까 직접고용 되는 게 절실했죠. 6월 8일 지사장 면담하고 나서 자회사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어요. 해고되든가 말든가 그때부터 무조건 직접고용 가자고 마음먹으니까 더이상 신경 안 쓰게 되더라고요.” (재은)


직접고용을 선택한 1500명 톨게이트 노동자들 속에 탈북민 재은 씨 자매가 있었다. 217일간 직접고용을 쟁취하기 위해 서울 청와대에서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 농성까지 치열하게 투쟁했다. 동료 요금수납원들에게 자신이 탈북민이라고 밝히자 “와아, 대단하다”며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확실한 내 편을 만났다. 그들은 217일 직접고용을 쟁취하기 위해서 동고동락했던 ‘동지’였다.


“언니는 (영업소 사장이) 자신을 탈북민이라고 많이 무시하고 깔본다고 속상해했어요. 그래서 탈북민 지원단체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우리랑 일을 안 하잖아요. 먼 데 있고, 우리 실정을 잘 모르고. 현장의 문제는 쉽게 해결 안 되죠.” (재은)


그동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투쟁의 결과로, 이제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직접고용 확답을 받아 출근할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편견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전과 같이 차별을 감내하며 살지만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히 달라진 점이다.


“자회사로 가서 일을 더 하면(자회사를 선택하면 요금수납업무, 정년연장과 임금인상을 해주겠다고 함) 낫기야 낫겠지만, 도로공사에 질렸나 봐. 서무 갑질에 질렸나 봐. 한번은 싸우고 싶었어요.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언제 있을까 싶어요.” (조미경)


정년을 일 년 앞두고 한번은 싸워야 했던 이유. ‘직접고용’ 네 글자는 미경 씨에게 ‘차별철폐’로 읽혔고 ‘인간존엄’을 보여주고 싶었다. 용역업체의 중간착취에 시달렸던 노동인권 침해의 역사를 바꿔내기 위해서 직접고용을 선택하고 투쟁했다.


요금수납업무가 복잡 난해해서 장애인은 할 수 없다고 말할 게 아니라, 장애인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고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중간착취자의 부도덕한 행태를 비난한 데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장애인이 노동할 수 없는, 노동하기 힘든 환경을 비장애인에게 책임 전가했던 노동인권 침해의 역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겪은 고통이다.


“김천 본사에서 농성해보니까, 장애인들이 엄청 많았어요. 장애인이라서 자회사를 가라고 하고, 비장애인이라서 직접고용 가라고 한 거 아니잖아요. 도로공사가 사람들을 다 길바닥으로 내몰았잖아요. 저는 민주노총이 장애인 노동문제를 더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권문제를 방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농성이 직접고용만 해결된다고 해산하는 건 아쉬워요.”(김송숙)


*인터뷰 진행 및 기록: 톨게이트 기록팀(나랑, 시야, 희정)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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