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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돌여덕’ 소설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소설을 쓴다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소설가 조우리
※ 2020년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있고, 나아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과 차별, 위계 등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내가 신뢰하는 동료인 소설가 천희란은 “소설가는 자신이 쓴 소설로 지금 서 있는 위치를 밝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나는 최근 들어 자주 생각한다. 2012년 3월에 발표한 데뷔작부터 2020년 6월에 발표한 최근작까지 여덟 편의 소설을 묶은 소설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희란의 말을 따르면 이 소설집은 내가 소설가로서 2010년대를 살아온 궤적일 것이다. 나의 2010년대는 2015년을 기준으로 명확히 달라졌다. 나의 소설도 그렇다.
소설가 조우리 프로필 사진. S.E.S.를 향한 팬심을 담아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고 프로필 사진을 찍었지만 책에는 흑백으로 들어갔다. ©촬영: 김준연
2015년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페미니즘 리부트’는 2016년 10월 『82년생 김지영』의 출간과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고발을 통해 문학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가 페미니즘적인 사유 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도를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의 소설에 담긴 페미니즘적인 사유란 무엇인가.
출간 예정인 단편집의 목차를 정하면서 편집자는 내 소설이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나뉜다고 정리했다. ‘노동하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곤경’과 ‘퀴어 여성의 내면과 관계’가 그것이다. 나의 데뷔작 <개 다섯 마리의 밤>은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의 ‘희망버스’를 모티브로 공장노동자인 레즈비언 커플이 부당한 해고를 겪으면서 서로를 오해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다. 가장 최근작인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동거를 하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이 친구의 아들 돌잔치에 초대받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근 10년 동안 나는 여성들이 일하고 사랑하면서 겪는 일들에 대한 소설을 계속 써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분명 달라졌다.
2015년 1월에 발표한 소설 <11번 출구>는 2020년의 나를 많이 고민하게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다미는 환승역인데다가 큰 규모의 지하상가까지 연결되어 있어 분주한 지하철역의 빵집에서 휴가도 없이 하루종일 일을 한다. 일을 하다가 누군가가 ‘11번 출구’가 어디냐고 물어오면 ‘11번 출구는 없어졌다’고, ‘이제 없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반드시 11번 출구에 가야겠다고 우기는 사람을 빵집의 단골손님인 ‘남자’가 나타나 11번 출구로 안내해주겠다며 데려가는 일이 생긴다. 다미는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임기응변을 발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는데, 정작 그 이상함에 대해서는 알아보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다미는 이전보다 더 나빠진 상황 속에 홀로 남겨진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이 소설은 2014년 여름에 쓰였다. 부정할 수 없이 ‘세월호 이후의 소설’이며,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의 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발표할 때 나는 다미가 단골손님이었던 남자를 기다리는 것으로 썼다. 다미는 그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잔인한 결말이었다. 그때 나는 나를 포함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 그건 내 소설 속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대가 없었으므로 희망도 줄 수 없었다. 내심 이 소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핑계로 다미를 몇 년 동안 그 마지막 장면 속에 남겨두었다.
2020년에 소설집을 엮으면서 나는 이 소설을 새롭게 다시 쓰거나 아예 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을 발표 당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소설집에 싣게 되었다. 부족한 모습인 채로, 그때의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인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미에게 너무나 잔인했던 결말에 대해서는 한 문장을 덧붙였는데, 그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그 어떤 여성도 잔인한 결말 속에 남겨둘 수가 없게 되었다고. 그 어떤 실패 뒤에도 또 다른 날이 온다고 이야기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첫 책, 조우리 장편 소설 『라스트 러브』 ©창비
지난해 10월 출간된 나의 첫 책 『라스트 러브』에도 나의 변화가 담겨 있다. 가상의 아이돌 걸그룹 ‘제로캐럿’의 마지막 콘서트에 얽힌 멤버들과 팬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2017년 4월부터 14주간 ‘문학3’ 웹사이트에서 연재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정리해 출간되었다. 그 과정에서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마지막 팬픽이다.
『라스트 러브』는 7장으로 구성된 본편과 소설 속 제로캐럿의 팬인 ‘파인캐럿’이 쓴 것으로 설정된 팬픽 7편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팬픽들은 실재하는 여성 아이돌들의 노래를 모티브로 한다. 연재 당시 마지막 팬픽은 소설 속 제로캐럿의 데뷔곡이자 마지막 콘서트의 엔딩곡인 ‘라스트 러브’를 모티브로, 마지막 콘서트가 끝난 뒤 시간이 흘러 데뷔 10주년 기념 팬미팅을 위해 다시 모인 제로캐럿 멤버들이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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