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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하며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책 읽기’ 인간답게 살고 싶은 본능에 반응하며
 
‘책 읽기’라는 끈을 가지고 이 시대 청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영상 매체와 스마트폰 문화가 일상을 잠식한 세상에서도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술 문명 찬미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더라도 그들이야 ‘맘껏 그러시라’ 하고, 우리는 책을 사이에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어쩌면 이 글은 세대간의 대화가 될 수도 있겠다. 중년인 나한테 청년이 되어가는 자식들이 있다는 것도 글을 쓰려는 중요한 이유이니까.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런 낯부끄러운 이야기도 해볼 참이다. 또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갖가지 문제들에 눈을 뜨게 된 ‘뺑덕어멈 눈뜬 이야기’도 해보려 한다.
 
나의 30대와 40대는 나 개인의 문제와 시대 문제를 일상에서 작게나마 해결해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면서 흘러갔다. 그러면서 지금 세상과 현대 인간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선을 갖게 된 것 같다. 이런 시선을 ‘세계관’ ‘가치관’ 혹은 ‘자기 삶의 중심 잣대’ 등 뭐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러니까 이 글은 어떤 “의도”가 있는 글쓰기이다. 조금이나마 세계관을 갖게 된 이가 때로 상식적으로, 때로는 불온하게 어떤 청년들에게 말을 걸려고 한다. 불평등하게 꽉 짜인 이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가치를 꿈꾸고, 어떻게든 자기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애쓰는 청년들에게 관심이 간다. 체제의 억압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서 또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 길을 잃고 소외된 청년들에게 더욱더 관심이 간다.
 
꽤 오래 시골에서 살고 있는 내 귀에 요즘 청년들에 대해서 이런 풍문들이 들려왔다. “요즘 애들은 세상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어.” “열나게 유행을 쫓아가지만 정작 자기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모른다구.” “꿈도 없고 찌질하고 비실비실해.” “이기적인데다가 또 얼마나 나약한지.... 쯧쯧.” 아니, 정말 그런가? 그럴 리가! 세상 현실에 가슴이 아픈 청년들, 자신의 고달픈 처지와 인간됨에 한숨을 쉬며 고민하는 청년들, 그럼에도 힘차게 살고 싶은 청년들이 없을 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식의 감상과 겉치레 위안용 청춘 예찬은 사양하련다. 기득권을 움켜쥔 세대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슬쩍 박수 쳐주는 식의 청춘 예찬은, 힘없는 너희들, 내가 던져주는 포장만 화려한 엿이나 먹고 가만히 있으라는 욕이지 싶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현대 기술 문명의 눈부신 업적들. 현란한 미디어들, 화려하게 치솟다가 스러지는 유행들. 거대 시스템에 순응한 바쁘고 피곤한 사람들. 내면의 미숙함과 생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외적 속물근성으로 열렬히 과시하는 인간들이 무리 지어 있다.
 
무리를 지어서 생존과 안위를 보장받고자 하는 영장류 인간의 뿌리 깊은 군집본능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그런데 현대인의 군집성 속에는 공공연하게 “돈 숭배” “계급의식” “특권의식”이 스며들어 있고,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찬양”이란 마취가스까지 자욱해서 나는 이 시대 분위기가 정말 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소비 욕망을 부풀리고, 가난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이 분위기를 따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었다. 지구촌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내전들과 국가 간 전쟁들, 가까운 북한의 기아와 세습 체제, 비만과 다이어트 열풍 그리고 처참한 굶주림이 대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지? 지구의 모든 자원을 다 말아먹겠다고 밀고 들어오는 세계화라는 괴물, 극심한 빈부격차,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정말로 화가 났다.
 
그런데 체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대중매체의 왜곡되고 조각난 선전들과 광고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나는 거듭 현실이라는 발길질에 얻어 차이고 내몰리곤 했다.
 
이럴 때 “인간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힘없는 내가 어쩌겠어. 시스템의 요구에 적당히 맞추면서 살면 되지.”하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져들지 않기가 참 어려웠다. 그런데, 좌절하는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불의를 감지하고 정의로움에 반응하려는 본능 또한 꿈틀거리지 않나? 앞으로 자기 앞에 펼쳐질 생을 충분히 살아보고픈 청년의 강한 생명력과 날카로운 직관은 이렇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대체 이토록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나를 찌질한 인간으로 만드는 이런 세상에서 희희낙락하는 자들은 누구지? 우리 부모님, 내 친구들, 내 주변 누구도 아니잖아? 중국의 열악한 공장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어린 여공들도 아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동 난민들도 절대 아닐 테고, 백인 자본가들에 의해 조상 대대로의 삶터였던 열대 숲을 파괴당하고 그들의 커피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남미나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아니지....”
 
세상살이에 닳고 닳아서 완강한 속물이 되어버린 어른들은 이 청년들의 노여움에 뭐라 대답하나? 무의식적으로 타협하고 체념해버린 우리 기성세대는 이들의 분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으로 이 글 연재를 떠올렸다. 세상은 거대하고 내가 어찌해볼 틈 하나 없이 꽉 짜인 것처럼 보인다. 이 거대 체제에서 모범 인자로 평가 받거나 성공하여 하나의 톱니바퀴로 사는데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그게 자기 개성을 피어나게 하는 즐거운 인생길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이제 세상이 주입하는 가치들과는 다른 것을 떠올려봐야 할 때이다. 멍하니 가상의 부귀영화를 부러워하던 눈을 돌려서 다른 꿈과 이상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즉, 다른 세상을 상상해야 할 때이다.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하는 주체로 서고 싶다면, 먼저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한 자기 교육이 필요할 시점이다.
 
이런 자기 교육 방법 중에서 접근하기 쉬운 길 하나가 괜찮은 책 골라서 읽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 읽기를 통하여(다른 경험들도 덧붙여져서) 체제란 것과 인간의 무지몽매와 우왕좌왕과 허영심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내가 처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을 수 있었는데, 여러모로 자기 교육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쓰려는 글들은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공부하기나 고전 읽기를 해야 한다는 식의 글들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류에서 비켜난 자가 세상 한 모퉁이에서 유행이나 권위에 주눅 들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읽고 떠올린 생각들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본능에 반응하며 떠올린 단상들이다. 물론 내 몸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면의 마음과 영혼은 청년처럼 싱싱하게 삶을 바라보고 탐구하려는 열정이 있다고 믿으면서 이 글을 쓰고 싶다.
 
1. 우리 시대의 묵시록 <체르노빌의 목소리> 

 ▲ <체르노빌의 목소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새잎

첫 책으로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골랐다. 다음 글부터는 두어 권의 책을 함께 이야기해보려 하는데, 이번에는 서문이 길었으니 이 책 한 권만 보도록 하자. 제목부터 좀 부담스러운가?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기 위한 첫 디딤돌로는 묵직하고 강력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외면하고 싶으나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여기에 있다. 21세기를 사는 인간인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는 아주 불편한 진실!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이야기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스리마일” 같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들은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 그중 최고의 지능을 가졌다는 현생 인류를 심한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뜨리는 사고들이다. 나한테는 전쟁만큼이나 당혹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사고들이다. 인간은 정말 무엇 때문에, 그리고 왜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 나는 진정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이 책은 소설도 아니고 학자가 쓴 학술보고서나 기자가 쓴 사건 기록물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체르노빌 사고를 직접 겪은 무수한 사람들의 10여 년간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내밀한 독백들과 인터뷰들이다.
 
책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사고 후 해체작업자들, 그들의 아내와 가족들, 마을 주민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소방대원들과 군인들, 교사, 환경보호 감독, 기자, 사진작가, 카메라 감독, 의회 의원, 화학 엔지니어, 당 지역 위원회 서기관, 핵에너지 연구소 소장, 핵물리학자, 사고 후 태어난 아이들 등 체르노빌을 직간접으로 겪은 이들의 너무나 어리둥절하고 아프고 통렬한 이야기들이다. 삶과 죽음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자신을 체르노빌의 증인이라고 여기는 저자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나는 아직도 스스로 묻고 있다. 이 사건은 너무나도 쉽게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시한 공포물이 되어 버렸다. (중략) 그런데 체르노빌은 그 자체가 시간의 재앙이었다. 땅에 흩어진 방사성 핵종은 5만년, 10만년, 20만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 삶의 관점으로 보면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여전히 낯설기만 한 그 악몽의 의미를 이해하고 연구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 30여 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라고 한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남한에만 21개가 있고 계속 건설해서 2030년에는 40기가 될 예정이란다. 중국은 13기가 있지만 지금 남쪽 바닷가에 많은 발전소를 짓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수가 아닌가?
 
26년 전 체르노빌 사건이 났을 때(1986년) 나는 대학생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틀어주는 TV로 체르노빌 뉴스를 들었지만 그냥 흘려 들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무지했고 뭐가 뭔지 전혀 몰랐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청년이었으나 한국 교육 체제의 수혜자인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며 장학금 받기에나 관심을 쏟던 청춘이었다. 또 아르바이트하기, 연애하기, 시위하다 잡혀간 친구들 걱정하며 술자리에서 군사 독재 욕하기 등에나 관심이 있었을 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캄캄했다. 어떤 기술로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사고가 나는지, 그것이 이 지구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별 관심도 없었다. 나와 무관한 저 멀리 있는 그들의 일이겠거니 싶었나 보다.
 
냉전시대라서 미국과 소련 간에 핵전쟁이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이 책에도 나왔듯이 원자력 발전소 같은 “평화적 핵은 집집마다 있는 전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원자력 발전소에 관한 정보도 아주 빈약했고, 파멸로 치닫는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도 많지 않았다.
 
지금은? 두렵고 슬프지만 관심이 많다. 삶과 죽음의 비밀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만큼, 인간 존재가 왜 생겨났는지 의문이 드는 만큼 관심이 있다. 이 지구에 존재하는 온갖 생명체들에게 관심이 가는 만큼 그들이 멸종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떠올리고 싶은 만큼,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부모가 된 만큼 관심이 크다. 이 기술 문명이 어디까지 지구를 파괴할까 근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인류란 종이 계속 이어질지, 이어진다면 어떻게 변화해갈까 궁금해 한다. 변화하는 지구 환경에서 미래 세대들은 어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방사능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출현할까?
 
이 책에 실린 수십여 개의 독백 이야기들은 각각 나름의 빛깔과 색조로 ‘불가사의한 것을 만나버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가만히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낯선 이야기들이므로. 그런데 금지 구역에서 혼자 7년을 살아온 할머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나는 낯설지 않았다.
 
“이젠 다 익숙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것은 죽음이야. 그것 말고는 이 세상에 정의란 없어.... 나는 평생토록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일했어. 하지만 정의는 나를 찾아오지 않더라.” 강도가 찾아오면 어쩌실 거냐고 순찰 경찰이 묻자 “우리 집에 뭐가 있다고? 내 영혼이라면 모를까. 나한테는 영혼밖에 없어. (중략) 심심해지면 조금 울지.”
 
또 다른 마을 주민들 이야기 “체르노빌.... 전쟁 위의 전쟁이었어. 어디에도 구원은 없었어. 땅에도, 물에도, 하늘에도....” “무슨 말을 더 하나? 살아야 했어. 그것밖엔....” “여기 왜 왔느냐고요? 여기서는 우리를 내쫓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이 땅은 이제 누구의 땅도 아니죠. 하느님이 가져가셨죠. 사람들이 버렸어요.” 만약 하느님이 있다면, 왜 그 땅을 가져가셨을까?
 
사고 이전 벨라루스의 풍요로웠던 자연들, 온갖 생명들이 깃들어 살던 무성한 숲과 들판들, 시골 마을의 공동체적인 삶들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과거인가? 구 소련이 이 재앙을 전쟁처럼 전체주의적으로 해결하던 방식과 영웅적인 미덕으로 포장하려는 선전술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우리는 믿는 데 익숙한 민족이다. 정부의 조치와 거짓말을 믿었다. 나는 당원이었고 침묵하면서 절대적으로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다.” 책 곳곳에서 국가가 국민을 속이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체제 유지를 위한 무시무시한 속임수들. “공황이 조성되는 걸 막기 위해 기밀 사항으로...” “방사선량 측정 결과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올 봄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남한 정치인들의 발언 몇 개만 들어보자.
 
“북한 핵 폐기를 위해 우리도 핵 주권을 가져야 한다. 대치 국가 간 핵 협상은 오직 핵으로만 가능하다”(새누리당 송영선) “요새 우리가 돈 벌 수 있는 부분이 원전하고 철도밖에 없어요. 지금 풍력, 태양력 그거 언제 해서 기술개발하고 언제해서 돈 벌 거예요?”(새누리당 강길부) “새로운 녹색성장 사업 중에서 핵심이 원전 기술 아니겠어요? 원전 비중을 계속해서 늘리는 것이 불가피한 방향이죠.”(새누리당 최경환)
 
이 정치인들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새로운 무엇,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살고 있었더라도 그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까? 핵을 찬성하는 남한 정치인들을 체르노빌 근처에 보내는 건 어떨까? 아이들이 암으로 죽어가고 행복한 임산부와 행복한 엄마를 만나기 어려운 그곳에 이들을 보내서 몇 달만이라도 살게 하자. 이걸 이번 대선 캠프에 정책 제안으로 내보고 싶을 지경이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체르노빌은 결코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연대기처럼 느껴졌다. 이미 난파해버린 기술 문명의 잔해들.... 인간은 그렇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만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다.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살아가고픈 그대 청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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