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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작가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의 앞날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인간 종말 리포트/제노사이드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넘치도록 풍요로운’ 세상에서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작았다.
.....
역사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지 못하고
더러운 먼지를 내뿜어 우리 눈을 속였다.
우리 앞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머나먼 길과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야의 '제목이 없는 시'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상당히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과거에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고 상상해본다. 하나의 길은 국가란 것이 생기기 전에 인간들이 살아갔던 길이다. 풍요롭건 풍요롭지 않건 간에 자연에 기대어 소규모 집단들끼리 겸허하게 생존했을 것이다.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했을 테지만 대단한 살육으로 발전되는 일은 드물었을 테고, 오히려 발견과 즐거움을 위한 교류와 교역이 가끔 이루어지던 시대, 소유하기 위한 착취 같은 게 거의 없던 시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반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냉혹하고 가차 없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다른 인간들을 통제하는 길이다. 그 결과 권력과 부의 집중이 이루어졌고, 계급이 생겨났고, 국가라는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 길을 ‘문명화’라고 부른다.
이 길 위에서 인간들은 “성장”과 “발전”이라는 개념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고서 “한때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이 길에서는 주류 사회에 속하기만 하면 사실 못할 게 없었다.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주류의 이데올로기는 늘 인간을 위해서 자연과 타민족을 지배하고 조작하는 게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소수 식민지 민족들처럼 주류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주류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지배당했거나 말살 당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결합으로 인간은 비행기나 컴퓨터도 만들고, 우주에도 가고, 핵무기와 핵발전소도 만들고, 유전자 조작도 맘대로 해내고 있다. 그 옛날 사람들이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꿈은 이루어진다(?).” 과거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불거져서 탈이긴 하지만. 언뜻 보면 넘치도록 풍요로운 세상이다. 분배가 공정하지 않고 풍요의 토대가 자원 약탈이긴 하지만.
<인간 종말 리포트>와 <제노사이드> 속 인간 사회
▲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편소설 <제노사이드> (김수영 역, 황금가지, 2012)
이번에 청년들과 함께 읽고서 이야기해 보고픈 책은 소설책 두 권이다. 둘 다 흥미진진하게 잘 읽힌다. 소설읽기의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상당히 많이 주는 책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인간 종말 리포트>(마거릿 애트우드, 민음사)는 일종의 미래 소설이다. 그런데 딱히 SF소설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 세상이 그대로 간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무얼 만날 지를 꽤나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2003년 캐나다에서 출간된 책의 원제목은 <Oryx and Crake 오릭스와 크레이크(영양과 뜸부기)>이던데, 2008년 한글로 번역하면서는 제목이 꽤 과격하게 붙여졌다. “인간 종말 이야기”에 한국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보일 거라고 생각해서 출판사는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일까?
하여간 최첨단 과학 기술로 무장하고 계급 간 분리로 자기들만 특혜를 누리는 특권 계층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다. 이 세상은 유전자 조작으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이다. 그리고 ‘파라디스 프로젝트’와 재앙…….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고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거기에 유전자 조작으로 과거 인간의 부정적 특성들을 치밀하게 제거해서 새롭게 창조된 신인류 집단. 역시 살아남은 유전자 조작으로 변형된 돌연변이 동물들. 그래서 무슨 일들이 벌어질까? 이런 세상은 과연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딱 부러지게 답할 수 없는 은유들이 아주 많은 소설이다. 읽는 이들 스스로가 사고하고 답을 얻어야 할 다중적인 함의가 많다는 의미에서 나에게는 아주 신선하고 참신하게 다가온 책이었다. 허나 의외로 한국에서는 잘 안 팔린 책이다.
또 다른 책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는 2011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올해 한국에 번역되어서도 꽤 잘 팔린 책이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형식을 빌린 이 소설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루어지는 자원 쟁탈전과 대학살(제노사이드), 신종 바이러스 위협, 인류보다 진화한 신인종의 출현으로 인한 구인간 멸종 시나리오 그리고 최고 지배 계급의 실상 등을 폭로하고 있다. 구도는 할리우드 시나리오처럼 음모와 액션과 모험과 소영웅들이 등장하고 약간의 감상주의까지 골고루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세대에게는 퍽 친숙한 이야기 줄거리일 것이다. 선악의 구분이 비교적 분명하며 해피엔딩이라는 뜻이다.
또 미국이 벌였던 이라크 전쟁이나 콩고나 우간다에서 벌어진 민족 간 대량 학살과 피비린내 나는 르완다 내전이나 무장 집단의 민간인 학살 등을 배경에 놓고 있어서 현실감도 상당히 느껴진다. 그리고 전 미국 대통령 부시를 금방 떠올리게 하는 인물과 그들의 정책과 군사 행위와 암투로 가득한 정권의 실상까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신종 플루 소동이나 광우병 파동을 겪고 있는 세상이니까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 멸종 시나리오도 이제는 딱히 공상과학만은 아닌 것이다.
두 책 모두 최첨단 컴퓨터나 유전자 조작 같은 발달한 과학 기술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현대 작가들이 과학과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수준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낸 드문 경우라고 생각해서 이 책들을 골랐다. 과학 기술의 최신 성과들을 잘 모르는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 이런 묘사와 설명들은 지금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소설적인 설정이야? 진짜 이 정도까지 나아가고 있는 거야?” “어쨌든 이 작가들은 과학 기술 발전에 아주 관심이 많구나. 최신 연구 성과를 꾸준히 탐색하면서 소설의 주요 장치로 쓸 정도로 현대 과학 기술이 무시무시하게 발전하고 있는가봐.” “그런데 이건 끔찍한 건가 아니면 나름 희망찬 건가? 이들의 상상 혹은 염려는 과연 미래 현실의 일부가 될 것인가?”
특히 <인간 종말 리포트>를 읽으면서는 작가가 그려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나 또한 여러모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기 세포니 유전 공학이니 생명 공학이니 나노 기술 등이 대중매체에까지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한때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열풍과 다음번엔 또 어떤 사기꾼들이 등장해서 대중들을 냄비뚜껑처럼 들썩이게 할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더랬다.
나는 젊은 시절에 과학이나 공학에 별 재능과 흥미가 없었기에 살아오면서 내내 과학 기술의 성과를 최종적으로 소비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들을 읽으면서는 좀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내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과학기술의 엄청난 성과들을 그저 소비만 하고 살아간다면, 미래에는 어떤 세상이 다가오게 되나? 나는 어떤 세상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체르노빌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당하기만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렇다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과거 시절에 대한 원망과 그저 비탄에 젖는 태도 역시 별로일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생각하고 전혀 다른 걸 힘껏 상상해봐야지 싶다.
낙관과 경계, 과학기술 이용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 마거릿 애트우드의 장편소설 <인간 종말 리포트>(차은정 역, 민음사, 2008)
이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적 재능과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면서도 현대과학 기술의 놀라운 성과들과 그 실용화 단계가 어디까지 진척되고 있는 지를 꼼꼼히 연구한 듯하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유전자 조작에 특히 중점을 두었고, 다카노 가즈아키는 최신 치료제 개발과 유기 합성이라는 제약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둘 다 공부를 아주 많이 했으리라. 탐구심이 많다는 점에서 이 작가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고 부쩍 호감이 간다.
하지만 이 두 소설은 전체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고 결말도 아주 다르게 끝난다. 과학 기술 이용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인간의 성(性) 문제처럼 아주 복잡한 문제들을 많이 거론하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동물 멸종, 생명 공학, 기후 변화, 나노 기술, 줄기 세포 연구, 노예 제도, 비디오 게임, 바이오 테러 등 현대 세계가 맞닥뜨리고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글을 쓰고 있지만, 작가는 공상과학 소설에서처럼 가상의 비현실적인 미래세계를 상상하는 게 아니다. 많은 것이 역사적 전례를 지녔거나 현재 진행 중인 것들에 가깝다. 아주 기묘하게 현실적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으며, 섬뜩하고 어두운 풍자조차 작가의 문학적 성취로 여겨지곤 했다.
반면 다카노 가즈아키는 최신 과학 기술 특히 제약 합성 기술을 퍽 신뢰하는 사람이다. “불치병과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면, 그리고 병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은 옳다”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제약 기술이 개발되고 그것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면에서 과학 기술 낙관론자이고 인간 중심주의자이고 미래를 희망차다고 보는 것이다.
오, 과연 그러한가? 생명 과학 연구들이 거대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막대한 금액의 프로젝트에 포섭되게 되면, 그 연구는 곧 자본의 논리에 따르게 된다. 그러면 머지않아 마거릿 애트우드가 예견한 세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즉, 죽음을 거부하고 싶어 하는 어떤 인간들의 과도한 욕망, 자기들의 젊음을 유지하고 영생불사하려는 돈 있는 인간들의 탐욕을 위한 유전자 공학 기술로 변모되어 버릴 것이란 뜻이다. 불치병 치료니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줄기 세포 개발 어쩌구 하는 것은 감상주의에 호소하는 때깔만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결국은 우리가 먼저 최신 기술을 선점 개발해서 돈 왕창 벌자, 그리고 우리끼리만 갈라먹자는 과학이 되고 만다는 거다. 사실 황우석 열풍도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었나? 그런 예들은 현재 제약 업계에서 “다 알지만 모르는 체 하는” 비밀이 아니던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이 지점까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대중들의 희망과 감상만 슬쩍 건드리고, 이 기술이 결국에는 특권 계층에만 이용될 거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시선의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의 차이일까? 남성은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순진하게 낙관적일 수 있는 것일까? 참여하는 자로서의 자신감?
물론 지금 문명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중심축이란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에서 음모를 펼치고 전쟁을 벌이고 대학살을 행하면서 권력의 구도에 따라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대개 마초 남성들이고, 자연스럽게 여성은 미래 세대를 보살피는 역할(돌봄 노동!)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딱히 물고 늘어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게 현실이니까.
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 남성 작가가 자원 쟁탈전과 대학살을 비판하고, 소모품으로 이용되는 군인들이나 용병들 문제들에서는 공정성을 가지려고 애쓰지만, 성(性)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번도 제대로 성찰한 적이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어쩌면 그런 성찰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손쉽게 낙관적이고 은근 해피엔딩으로 글을 써도 잘만 팔리는걸, 뭐. 마거릿 애트우드처럼 여성 관찰자로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문제들에 관해서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는가.
마거릿 애트우드 더 읽기
내가 처음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만난 것은 <시녀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상황 설정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끌려서 끝까지 다 읽었지만, 솔직히 여성인 내가 읽기에는 꽤 암담한 기분이 드는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정부와 법률을 장악한 남성들이 완벽한 통제권을 가지고서 모든 여성들의 삶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통제하는 전제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 난 이런 세상에서는 정말로 살고 싶지 않군.”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작가는 왜 이런 암담한 소설을 쓰고 발표했을까? 여성인 자신이 현실 속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경고를 주기 위해서? 이런 체제가 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과학과 영국 왕립학회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책 <거인들의 생각과 힘>(빌 브라이슨 편집, 까치글방)에 실린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 “미친 과학자들의 광기”도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길 권한다. 전 세계의 유명한 석학들이 쓴 과학에 대한 찬가로 넘쳐나는 글들 속에서 고유하고 개성적인 그녀만의 시선이 퍽이나 돋보이는 글이다.
하여간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야의 시에서처럼 “우리 앞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머나먼 길”이 남았는지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인지, 이와는 반대로 햇살 환한 따스한 신작로가 펼쳐질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상상하고 그리는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비슷하다면 왜 그러하고, 다르다면 왜 그러한가. 이 길로 계속 간다면 난 어떤 것을 만나게 될까. 지금은 우선 이런 문제들을 떠올려두고서 들에서 일하는 틈틈이 생각해볼 참이다. 아름다운 이 가을 날 너머에 여유롭게 생각해볼 한가한 겨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으니까. 이 시대 청년들은 자기가 가는 길에서 어떤 것들을 만나고 싶은지 궁금하다. (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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