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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라의 와이너리>(winery) 11 스페인② 셰리 와인
음식 중에는 첫 맛에 누구에게나 맛난 것도 많지만, 대체 무슨 맛인지 ‘별미라는데 이걸 왜 먹나’ 싶은 것들이 가끔 있다. 후자를 배워서 알게 되는 맛 즉 ‘터득하는 맛’ (acquired taste)이라고 한다. 모르는 음식은 궁금해서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도 아무리 마셔보아도 그 맛이 주는 재미를 도무지 알 수 없던 와인이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의 셰리 와인이다. 셰리의 본고장에 가면 좀 알게 될까 하고 첫 스페인 와인여행 때 무턱대고 헤레스(Jerez)에 갔다.
스페인의 독특한 와인 스타일, 셰리
▲ 버스타고 가다 찍은 헤레스 지역 포도밭. 석회질 토양이라 땅이 하얗다. © 여라
스페인 현지에서는 Jerez de la Frontera라는 좀 긴 도시이름의 앞단어만 따서 헤레스라고 부르고, 그것을 영국 사람들은 ‘셰리’(Sherry)라 부른다. 앞글에서 한 번 설명했듯이, 신세계 와인은 포도 품종(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 등)이 와인이름이지만 구세계 와인은 생산지역(보르도, 끼안티, 모젤 등)이 와인 이름이다. 셰리는 바로 스페인의 ‘셰리 지역' 와인이다.
셰리는 스페인의 독특한 와인 스타일이다. 주요재료는 재래종인 팔로미노(Palomino) 품종이다. 남부 스페인의 눈이 시리게 밝은 햇빛만큼이나 눈부시도록 하얀 석회토양에서 자라나는 팔로미노 품종 자체는 사실 별 특색도 없다. 하지만, 세계의 다양한 와인 스타일은 각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서 잘 자라는 포도품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시도와 실패와 성공을 통해 얻어진, 사연 있는 결과물이다.
‘와인 바이블’의 저자 캐런 맥닐이 지적하듯이, 프랑스에 샴페인이 있다면 스페인에 셰리가 있다. (국내에도 ‘와인 바이블’이라고 소개된 와인관련 책자가 있지만, 이 책은 케빈 즈랠리의 책으로 원제는 ‘케빈 즈랠리의 와인 완벽코스’ 쯤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와인은 각각 지역 특유의 석회토양에서 자라난 여러 포도품종을 빈티지까지 블랜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일반 와인보다 품도 많이 들고, 세월도 훨씬 오래 걸린다는 점도 같다.
다른 점도 물론 있다. 일단 상당한 가격 차이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제조과정에서 발생한다. 샴페인에 거품을 주고 갓 구워낸 빵 같은 풍미를 주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셰리도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 1차로 와인을 만든 뒤 나무통에 숙성시킬 때 일부러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곰팡이를 피우고 커다란 창문으로 바다바람을 쐬어 독특한 풍미를 준다. 그리고 알코올 도수가 일반 와인보다 훨씬 높은 증류주를 섞는다.
이렇게 증류주를 섞는 와인스타일을 주정강화와인 (fortified wine)이라고 한다. 스페인의 셰리 말고도 포르투갈 두로 벨리에서 만드는 포트, 마데이라 섬에서 만드는 마데이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마르살라, 남부 프랑스의 뱅 두 나투렐 (vin doux naturel) 등이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 셰리와 마찬가지로 주로 더운 지역에서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일종의 방부제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더해 넣은 것에 기인하여 이런 스타일이 발달했다고 한다.
와인 한잔의 맛을 완성시키는 것
▲ 균일한 품질을 내기 위해 헤레스에서는 솔레라(Solera) 시스템이라는 독특한 블랜딩 방식이 발전했다. 맨 위층에는 새 술을 담고 매해 그 아래층 나무통으로 조금씩 섞어 내려간다. 맨 아래층에 담긴 와인을 병입한다. ©여라
아마도 셰리는 그 와인세계가 가장 폄하되는 와인일 것이다. 주요 수입국인 영국의 입맛에 맞춰 일부러 달달하게 만든 종류가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셰리의 스타일은 물처럼 맑고 드라이(=달지 않은)한 종류부터 새카맣고 걸쭉하며 달달하고 풍미가 깊은 종류까지, 그 용도도 식전주부터 디저트까지 폭이 넓다.
도통 알 수 없을 것 같던 셰리와인은 헤레스에 가서 그곳 음식과 사람들을 만나 풍광을 즐기며 며칠 마시다보니 훨씬 익숙하게 다가왔다. 역시 문맥이 중요하다. 문맥에서 뚝 떼어내 와인만 익히려 하니 즐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아쉽게도 스페인 바깥에서는 그 다양한 스타일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셰리 중에서 가장 흔하고 저렴한 피노(fino)셰리가 그렇다. 친해질 만하니 이별이다.
오래 전 뉴질랜드에 갔을 때 친구에게서 추천을 받아 그곳 특산품이라는 꿀을 사온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딴 곳이라고 여겼던 그 곳에서 가져온 것과 똑같은 물건을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발견했을 때에야 난 알게 되었다. 한국엔 뭐든 다 있다고. 다만 현지보다 좀 많이 비쌀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것들이 수입되고 수출되는 세계화의 시절이어도 돈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들은 별로 이동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피노 셰리처럼 현지에서는 즐기는 데에 돈이 그다지 들지 않지 않지만 외국에 갖고 나오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렇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종일 뜨거운 햇볕에 벌겋게 익은 얼굴로 카오산 거리에서 친구들과 킬킬거리며 저녁내 기울였던 싱아 맥주는 아무리 한국에 수입되어 같은 친구들과 마셔도 그 맛을 내지 못한다. 여행을 다시 떠나는 이유다.
보름 남짓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헤레스에서 나흘을 지내고 나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이다. 창밖에 석양이 지는데 문득, 살아있으니 참 좋구나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비록 셰리는 없다 해도 돌아갈 집과 친구들과 가족이 있어 새삼 고마웠다. 셰리는 뭐, 역시 스페인 가서 마셔줘야 제 맛이지.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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