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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안톤 체호프를 읽다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산다는 것은 애처롭지만 아름답다' 

한때는 나도 소설 읽기를 꽤 좋아했다. 젊을 때는 세계 문학과 한국 문학을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요즘처럼 논술에 대한 압박이나 의무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험 같은 타율적인 공부에 시달려서 머리가 무겁거나 심란할 때 소설책을 읽었다.

 
문화란 걸 별로 접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자란 탓에 어리벙벙하고 무지한 내가 청년이 되어 도시로 나왔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던 세상(도시)과 사람들(근현대인)과 사랑의 문제(가장 풀기 어렵던 문제)를 문학을 통해서나마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 구석진 곳에 앉아서 소설을 읽던 시간은 나를 휘두르던 현실에서 벗어나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몽상의 시간이었다.
 
왜 나는 체호프를 다시 읽게 되었나 

▲ 러시아의 문학작가 안톤 체호프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는 세계가 언어를 통해 표현될 때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또 언어 예술의 미적이고 도덕적인 즐거움과 그것의 크나큰 의미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예전처럼 소설을 부러 찾아 읽지는 않는다. 아마도 현대에 유행하는 소설 양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잘 팔린다는 최신 한국 소설들을 읽다가 여러 번 실망한 경험이 겹쳤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혹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같은 인생의 수수께끼에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의문과 관심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고 느낀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근래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읍내 도서관에 갔는데 최근 한국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문학상을 받은 소설집이 눈에 띄었다. 겨울이라 농사일이 없어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사는지라 한번 읽어보려고 빌렸다. 요새 내가 한국 문학을 너무 박대하는 건가 그러면서. 수상작가의 중단편들과 인터뷰, 평론, 후보작들이 실린 책이었는데, 읽으면서 솔직히 실망했다.
 
‘뭐야, 잘 다듬은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세계가 기껏 이런 거야? 이토록 저속하고 자기 탐닉에 빠져 있는 진부한 욕망표출 뿐이야?’
 
‘내가 바보인가? 문학이라는 언어 예술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 자신과 인생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욕구를 가진 게 시대에 뒤떨어진 건가? 어찌 이런 시시하고, 재미도 별로 없으면서, 기분까지 안 좋게 만드는 소설들을 최고라고 추켜 주고 상을 주고 난리일 수 있지? 문단이란 곳은 원래 그런 건가?’
 
여전히 소설과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살짝 반항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달까. 신선하고 최고로 맛있다고 선전해서 덥석 떠먹었는데, 파리들이 떼거지로 앉았다 간 쉰밥을 먹었을 때의 고약한 기분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체호프를 다시 읽자.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과 희곡들을 책장에서 찾거나 도서관에서 빌렸다. 역시나! 체호프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실망은커녕 문학에 대한 내 오랜 믿음과 사랑을 서늘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나란 사람이 젊을 때나 중년이 된 지금이나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체호프가 이야기하는 방식을 내가 참 좋아하는구나.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에 배반당하고, 세상을 힘겹게 인지하고, 세상에 참여하고, 타인을 속이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구나, 체호프는.’
 
이해할 수 없는 삶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2002). 그의 글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졸이며, 우리를 전율하고 슬프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체호프의 글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고, 우리를 전율하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당신의 인생이면서 또 나의 인생이기도 한 이야기. 어쩌면 무심하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빛나는 이야기들. 아주 러시아적인 것도 같지만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사들이 들어 있다.
 
체호프 번역본들이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 잘 번역됐다고 생각되는 단편선집들과 희곡 전집을 골라 읽었다.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2002)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4)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 여기 단편선집들 속에는 서너 개의 유명한 단편이 겹쳐서 번역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다른 단편들과 중편들이 실려 있다.
 
체호프가 그리는 인물들 중에는 인생에 대해서 어리둥절해하고, 뭐가 뭔지 모른 채 당혹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온다. 내가 그러했고, 우리가 도처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당신은 아닌가?) ‘아, 세상이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착하고 선량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유리 구두도 받고, 금도끼도 받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네요? 어찌 그럴 수가 있나요?’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2002)에 실린 단편 “공포”에는 삶을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하는 하는 사람이 나온다.
 
“친구, 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두려워해요. (...) 내 병은 삶에 대한 공포지요. (...) 나는 천성이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지라 저승 세계니 인류의 운명이니 하는 문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일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쓰라린 인식이다.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에 힘을 소진하는 진부함이 무섭다는 주인공. 무슨 대단하고 고상한 목적이 있기에 사람들이 가난과 무지 속에서 괴로워하는지 모르겠다는 인식.
 
단편 “미인”에 나온 구절. “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그녀가 내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며 뭔가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그것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었다.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 모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같은 책에 실린 중편 “주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의 생각은 먼 과거로, 어린 시절로 치달았다. 그 옛날의 일들은 실제로는 그랬을 리 없는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으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저승에서 아마도 우리는 먼 과거에 이승에서 살았던 삶을 바로 이런 감정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여태껏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은 불투명했다.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했으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슬픔과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이야기

▲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4)에는 미묘하게 슬프고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단편들이 많이 나온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4)에는 미묘하게 슬프고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단편들이 많이 나온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거나 열정적이지 않다. 그들처럼 끈질긴 의지로 삶의 진로를 바꾸는 일일랑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 인생들이 사소하고 하찮고 시시해 보인다.
 
“6호 병동”은 사람들 내부에 잠재된 폭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중편이다. 또 지식인 의사의 무기력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이 맞이하는 최후란 어떤 것인지도 보여준다. 실제의 삶이란 거창한 궁극의 진리나 추상적인 추론의 세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 의사 안드레이 에피미치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해로운 일을 하면서 나에게 속는 사람들로부터 봉급을 받는다. 나는 정직하지 못하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사회의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지방 관리들도 해로운 일을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봉급을 받는다.... 그러니까 내가 부정직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이다. 내가 2백년 후에 태어난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다 속임수입니다. 내 병은 내가 20년 만에 이 지역 전체에서 유일하게 지적인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 사람이 정신병자라는 데 있을 뿐입니다. 내가 병든 게 아닙니다. 단지 벗어날 길 없는 궁지에 빠진 겁니다. (...) 인생의 마지막에서 지금 내가 겪는 것과 같은 것을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겁니다. 악성 신장염이나 심장 비대증에 걸렸다면 당신은 치료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미쳤다거나 죄를 지었다고 사람들이 말하면, 한마디로 갑자기 주목을 받는다면, 당신은 벗어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벗어나려고 애쓰겠지만, 그럴수록 더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연약하단 말입니다.... 전에 나는 침착했고, 밝고 건전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거칠게 몰아쳤고, 나는 좌절하고 말았지요.... 우리는 연약하고 시시합니다, 현실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린 시절의 고결한 충동은 지치고 병에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짧은 단편인 “대학생”에는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세계 인식도 엿보인다. 대학생은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은 찬바람이 과거에도 불었겠지. 그때에도 지금처럼 모진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이렇게 헤진 지붕과 무지와 우수, 이런 황량함과 어둠과 압박감이 똑같이 있었을 거야. 이런 공포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거야.”
 
하지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멈춰서야 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달아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들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 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인류의 삶에 방향을 제시했던 정의와 아름다움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분명히 인류의 삶과 이 지상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형성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젊음과 건강과 힘의 감각―그는 이제 스물 두 살이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행복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기다림이 조금씩 그를 사로잡았다. 삶은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또한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졌다.”
 
체호프가 말하는 ‘사랑’은 

▲ 체호프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체호프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에는 사랑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단편들이 나온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서 덜 고립될 수 있을까.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경계를 넘지 못해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글프게도 내 이야기인 양 읽힌다.
 
“자기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오해 때문에” 그리고 인습의 굴레 때문에 연인들은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할 때서야 비로소 남자 주인공은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인지를 깨닫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단편이다. 비록 경박하게 시작한 불륜의 사랑이지만 주인공들이 어떤 경계를 넘어 진정한 삶을 만들 것도 같은 암시가 있다. 이번에 읽으면서 새로이 와 닿았던 구절. (이전의 다른 번역보다 이 책 번역이 훌륭하다.)
 
“새벽빛을 받아 너무도 아름다워 보이는 젊은 여인과 나란히 앉은 구로프는 바다, 산, 드넓은 하늘이라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배경에 매혹되어 마음이 평온해졌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 스스로 존재의 고상한 목적과 인간의 가치를 망각한 채 저지르는 일들을 제외하면,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덧없는 인생에 대한 성찰 담긴 희곡 <바냐 아저씨>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에 실린 유명한 4대 희곡(“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은 모두 쓸쓸하다. 나는 이 희곡들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고, 젊을 때 러시아에서 “세 자매”를 본 기억이 있다(러시아어였기에 여주인공들의 분위기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중에서 오늘은 <바냐 아저씨>를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은 <숲의 수호신>이란 장막극을 새롭게 고쳐 쓴 것으로 역시 비극과 우수가 어린 작품이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 20여 년의 청춘을 날려버린 바냐 아저씨와 조카 소냐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흔 일곱 살에 느닷없이 깨닫게 된 환멸, 앞으로 남아 있는 무의미하고 덧없는 인생에 대한 성찰은 당연히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는 특히 의사 아스트로프란 인물에 관심이 많이 갔다. 왠지 체호프가 실제로 많은 부분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다. (아스트로프는 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스트론(astron)에서 나왔다는 걸 이번에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멀리서 반짝이는 별임을 알지 못하며, 한때는 열정이 넘쳤으나 이제는 냉소주의자의 시선을 갖게 된 시골 의사이다.
 
그를 남몰래 연모하는 아가씨 소냐의 설명을 들어보자. “선생님은 해마다 숲을 가꾸세요. 또 오래된 숲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살피고 계세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숲은 대지를 장식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인간에게 위대한 감정을 불어넣는다는 거예요. 숲은 혹독한 기후를 완화시키기도 하고요.”

▲ '바냐 아저씨'가 수록된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  
 
요 근래 심각해진 이상기후와 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혹시 우리가 숲을 다 파괴해서 그런 것은 아닐지? 아스트로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엇 때문에 숲을 파괴하려는 거지? 러시아의 숲은 도끼 때문에 찢겨져 나가고 엄청난 나무가 죽어가고 있어요. 길짐승과 날짐승의 보금자리는 황폐화되고, 하천은 말라가고, 기막힌 풍경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걸 태워버리고, 창조할 수 없는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무분별한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증가시키려고 인간은 이성과 창조력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숲은 점점 줄어들고, 강은 말라가고, 야생동물은 사라지고, 기후는 망가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대지는 나날이 점점 더 빈곤하고 추해지고 있는 겁니다.” 딱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 같다.
 
“내가 하는 말이 자네에겐 대수롭지 않게 들리겠지. 하지만 벌목으로부터 구한 숲을 지나갈 때나, 내가 두 손으로 심은 어린 숲이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천 년 후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나도 거기에 다소 기여했을 것이란 사실을 의식하게 되지. 자작나무를 심고, 나중에 그것이 푸르러져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때면, 내 영혼은 자긍심으로 충만해지곤 해.”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시선. “사람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얼굴도, 옷도, 영혼도, 생각도요. 그분은 아름답습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죠, 하지만... 그녀는 그저 먹고, 잠자고, 산책하고,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우리 모두를 매혹시키고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녀에게 의무가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체로 인생을 사랑합니다만, 우리의 인생, 러시아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런 속된 삶은 견딜 수 없습니다. 나 자신만의 사적인 생활을 말해보자면, 정말이지 거기엔 좋은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깜깜한 한밤중에 숲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만일 멀리서 등불이 반짝이면 피로도, 어둠도, 얼굴을 때리는 나뭇가지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 그런데 나한테는 멀리서 반짝이는 등불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
 
멀리서 반짝이는 등불이 사실은 자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의사 아스트로프.
“나와 자네한테는 딱 한 가지 희망밖에 없어.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유쾌한 환상이 찾아올 거라는 환상밖에 없다니까. 이 시골의 속된 생활, 경멸할 만한 생활이 우리의 삶을 중독 시켰고, 졸라맸고, 그래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속물이 되어버린 거라고.”
 
꽁꽁 언 한겨울에 태어난 노란 병아리처럼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44세에 세상을 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왜 하나같이 이리도 짧은 삶을 살다 갔는지 모르겠다. 소로, 오웰, 잭 런던, 체호프까지. 그들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지난한 삶을 짧은 세월 동안 열렬하게 살고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면서 이승을 떠난 건가? 운명하던 날 밤 체호프는 샴페인을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제 죽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오랫동안 샴페인을 못 마셨네...”라고 하면서 평온하게 잔을 비운다. 그리고 돌아누워서는 영원히 운명했다.
 
지난 12월 내내 우리 집 암탉 비단이가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알들을 품었더랬다. 그러더니 일주일 전쯤에 노란 병아리 두 마리를 부화시켰다. 성탄절이 지나고 눈이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눈을 치우다가 닭장에서 삐악 삐악 거리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날이 너무 추워서 설마 병아리들이 깨어날까 싶었는데, 이 녀석들이 기어이 태어났다. 여름에 깨어난 까만 병아리는 벌써 늠름한 중닭이 되었는데.
 
닭장 물통에 부어준 물이 금방 꽁꽁 얼어버리는 한겨울에 이 어린 새끼들을 어쩌면 좋을까. 근심 반 기쁨 반으로 우리는 요새 분주히 닭장에 드나들고 있다. 노란 솜털이 보송보송, 까만 눈과 노란 부리가 얼굴의 반, 크기는 애기 주먹만 하다. 엄마 품속에서 삐삐거리다가 모이와 물을 주러 가면 살포시 나와서는 고 귀여운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물을 마신다. 참으로 사랑스럽다. 송년과 새해맞이 선물로 자연은 우리에게 이 어린 생명들을 주셨나 보다. 애처롭지만 산다는 것은 아름답구나, 체호프 식으로.  (도은)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민음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톤 체호프, 열린책들
      <사랑에 관하여> 안톤 체호프, 펭귄클래식코리아
      <체호프 희곡 전집> 안톤 체호프, 시공사   

  *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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