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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장기 비상시대 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밤이 정말 밤다웠던 시절 

▲ 이중섭 작 <달밤>. 우리가 어릴 때는 밤이 지금처럼 환하지 않았다. 밝은 것은 달뿐, 밤은 정말 밤다웠다.     
 
오래된 시골집을 빌려서 이사를 하다보면 전에 살던 이들이 버려두고 간 쓸모없는 구시대 물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중 녹슨 도끼, 호미나 괭이, 무쇠 솥, 항아리 등은 잘 닦으면 쓸 만한 시골 살림살이로 거듭날 수 있다. 대개는 썩고 곰팡이 피어 먼지가 되어가는 것들이거나 냄새 폴폴 나고 쥐똥 가득한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낡은 시골집으로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옛 물건을 발견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무슨 대단한 골동품 같은 것은 전혀 아니다. 어느 날 먼지를 뒤집어쓰고 무너져가는 창고 한구석을 치우고 있던 중이었다. 썩어서 거의 부서진 나무궤짝 속에 역시 썩어가는 장기판과 몹시 변색한 사진틀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위쪽이 좁아지는 원통형의 작고 빛바랜 사기 그릇 두 개가 있었는데 볼록 솟은 뚜껑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물건인지를 알아보질 못했다. 묵은 먼지와 거미줄이 두껍게 앉은 걸 이리저리 돌려보고 길쭘한 뚜껑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하! 이게 예전에 호롱불을 밝히던 그 석유 등잔’이란 걸 알아보았다. 뚫린 구멍으로 길고 튼튼한 천이나 실을 꼬아 심지로 넣은 뒤에 용기 안에다 석유를 넣고 불을 붙여서 어둠을 밝혔던 등잔들.
 
그랬다! 내가 어릴 때는 밤이 지금처럼 환하지 않았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고 밤이 오면 어둠도 친한 친구마냥 자연스레 찾아왔다. 밤은 정말 밤다웠다. 별이 뜨거나 안 뜨거나 대체로 캄캄했다.
 
여느 날들처럼 하루가 가고 밤이 찾아온다. 밖은 어둡고 어디선가 푸른 도깨비불들이 춤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방 안, 등잔불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어린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밖에서 동무들과 숨바꼭질하며 놀다 들어와서 벌써 곯아 떨어졌다. 어머니는 등잔불 옆에서 구멍 난 옷들을 깁고, 오빠는 작은 밥상에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한다. 졸음에 겨워 바느질감을 밀쳐놓고 누운 어머니는 오빠에게 석유 아까우니 빨리 불 끄고 자라고 말한다. 근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오빠의 코 밑이 새까맣다. 말 안 듣고 늦게까지 등잔불을 켜놓았나 보다.
 
그러니 시골 동네에 처음 전기불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라워했겠는가. 겨우 5와트나 10와트 정도 되는 작은 알전구 하나로 온 집안을 밝혔는데, 그게 너무나 눈부시게 밝아서 엄청나게 신기해하며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몇 십 년이 흐르면서 세상의 밤은 너무나 밝아졌다. 밤새 켜있는 가로등들, 대낮처럼 환한 쇼핑센터들. 눈부신 조명들이 켜있는 건물들과 아파트들. 시골도 가로등이 구석구석 들어왔다.
 
현대의 기적과 경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 진보의 경이로움에 매혹되고 홀린 상태로 일상을 살고 있다. 너무나 매혹되어서 약간은 집단 최면 상태이자 거의 몽유병자들처럼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런 기술의 발달과 풍요가 일상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된 시대에 태어난 청년들은 가난하건 부자건 간에 이 경이로움을 거의 실감하지 못한다. 세상이 원래 이랬다는 듯이.
 
하지만 산업화 이전 시기 혹은 산업이 막 발달하던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세상의 변화란 그야말로 마술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 나름대로 당시의 천문, 지리, 과학 등에도 밝아서 진보학파라 할 수 있는 18세기 정치 경제학자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한테 대형 마트와 자동차와 인터넷 세상을 보여준다고 해보자. 대체 그가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서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에 도착하고, 달에 가고, 화성을 탐사하는 시대이다. 자동차, 비행기, 전기, 고층 빌딩, 영화, TV, 인터넷, 엑스레이 등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그 많은 것들이 사실은 100년도 채 안 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지질학상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시기에만 꽃피울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이 특별함은 바로 화석연료인 석탄, 석유, 천연가스 덕분에 발달한 것인데 말이다.
 
즉, 현대의 이 모든 경이와 기적은 인류가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를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속될 문명이 아니란 뜻이다. 석유시대는 그 본성상 계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특별한 시대가 곧 끝나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 놀라운 화석 연료를 대체할 만한 게 아직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이상한 점은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일반 대중이든 이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다가올 미래를 궁리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거다. 왜 그럴까? 너무나 강력한 진실이라서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아주 비상한 책이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인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가 지은 <장기 비상 시대(The Long Emergency)>(갈라파고스, 2011)란 책이다. 이 책은 우리의 석유 의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석유가 점차 고갈되면서 일어날 세계의 경제적 정치적 격변과 기후 변화, 식량 위기가 닥치게 되는 가까운 미래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하워드 쿤슬러가 말하는 ‘석유 없는 시대의 삶’ 

▲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인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가 지은 <장기 비상 시대>(갈라파고스, 2011)는 석유가 점차 고갈될 가까운 미래 사회의 변화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석유가 없어진 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게 될까. 이 책은 풍부한 자료조사와 비판정신으로 담대하지만 과장 없이 이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낸 믿음직한 글이다. 한마디로 아주 잘 쓴 책이다. 석유 생산 정점(오일 피크)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인류가 맞이하게 될 시기를 “기나긴 비상시대”라고 설정하고서, 이 시대를 여러 분야에 걸쳐서 나름 정교하게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석유 시추의 역사, 과학과 기술, 경제와 금융사, 국제 정치와 사회 변화, 대체 에너지 개발에 대한 환상,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변동들을 찬찬히 읽어낼 수 있다.
 
쿤슬러라는 작가는 큰 그림을 그려낼 줄 아는 통합적 지성을 갖춘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의 종말이나 인류의 멸종을 예측하면서 우리를 겁주는 책은 전혀 아니다. 아주 합리적인 방식으로 신뢰할 만하게 쓰였다는 뜻이다. 현대 기술문명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청년들은 쿤슬러가 그리는 혼돈의 미래를 외면하고 싶겠지만, 부디 용기를 내어서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전혀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내용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잠이 오겠는가.
 
“화석 연료는 지질사의 독특한 선물이다. (...) 화석 연료, 즉 석탄, 석유, 천연가스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지구 인구가 10억이 되지 않았다. 이제 화석 연료의 시대가 열린지 두 세기가 지났고 추출량이 역대 최대인 오늘날, 지구는 65억 이상의 인구를 부양하고 있다. 화석 연료의 노다지는 한 번뿐인 사건이었으며, 우리가 그것을 누린 기간은 인류사에서 비정상적인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발달한 기술이 현대 산업 문명을 구해내지 못할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해본 사람들이나 배울 만큼 배웠다는 지인들도 그렇게 말한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지금까지 놀랍게 발전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해나가지 않겠어요?’ 기술 진보의 힘을 믿는 순진하고 태평한 낙관론자들이다.
 
“우리가 현대 생활의 혜택으로 여기는 모든 것의 바탕이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생필품과 안락과 사치와 기적은 그 기원이나 존속을 어떤 식으로든 값싼 화석 연료에 빚지고 있다. 이를테면 중앙난방이나 에어컨, 자동차, 비행기, 전기, 저렴한 의류, 녹음된 음악, 영화, 슈퍼마켓, 전동 공구, 인공 고관절 수술 그런 것들이 전부 그렇다. 심지어 원자력발전소도 건설이나 정비, 핵연료의 추출이나 가공의 모든 과정을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유혹이 너무나 강했고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이 준 그 기적의 선물들이 지닌 본질적 특성을 더 이상 눈여겨보지 않게 되었다. 즉, 그것들이 유한하고 재생 불가능하며, 고르게 분포해 있지 않은 자원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낙관주의자들은 미래에 어려움이 닥쳐도 어떻게든 극복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석유가 고갈되기 직전에 천재 과학자들이 ‘짠’하고 나타나 무슨 환상적인 기술이나 대체 연료들을 개발할 거라고 생각하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쿤슬러의 주장처럼 나도 화석연료로 인한 풍요는 인류에게 한 번만 허락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 역사에서 유별나게 풍요롭고 특별한 한 시기를 살았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싶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미래의 고난을 맞이한다면
 
석유가 끝나간다면 인류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결핍을 비롯한 여러 가지 크나큰 어려움과 상실들을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란 미래를 나는 믿는다. 물론 그 미래는 지금처럼 환한 세상은 아니리라. 약간 어두침침한 세상이 되리라. 거대 시스템들과 우리를 억압하던 체제도 사라질 테니 규모도 훨씬 작아질 것이고, 지역적일 것이고, 기계가 아닌 인간의 손을 가지고 만들어낸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산업 문명의 부산물들, 즉 플라스틱 쓰레기든 뭐든 이미 생산된 많은 것들을 재활용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희망으로 여기는 점은 산업 문명 기간 동안 화석 연료를 등에 업고서 무식한 깡패처럼 자연을 파괴했던 인간의 오만방자함이 수그러들 거라는 점이다. 그러면 자연은 어떻게든 스스로 회복을 해나가리라. 온난화나 기후변화나 소빙하기가 닥치더라도 자연은 자기 방식대로 나아갈 것이고, 인류는 자연의 신비롭고 겸손한 자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꼼꼼히 읽는다면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석유생산 정점을 핵심 개념으로 해서 근현대사와 화석 연료의 딜레마를 다루는 장이 있고, 이미 시작된 자원 쟁탈 전쟁의 큰 그림들도 볼 수 있으며, 대체 연료가 어떻게 산업 문명을 구원할 수 없는지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기후 변화, 유행병, 물 부족, 환경 파괴, 산업화시대의 그늘을 그린 ‘자연의 역습’ 장을 읽으면서는 겸허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겸손해진 마음으로 미래에 불가피하게 다가올 고난을 투덜거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그 시대를 어찌 살아갈지를 고민해본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살아갈 날들이 많은 청년들은 특히나 고민해야 할 것이 정말 많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살겠다며 비상식량을 쟁여두는 식의 ‘종말 대비 생존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닥칠 미래를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든, 발길질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든, 우리가 직면하게 될 만하거나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일, 즉 모든 활동에서 규모를 전면적으로 축소하거나 조정하고 지역화 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 맹목성을 가진 거대 시스템은 이제 나름의 추진력을 얻고서 나아가고 있다. (...) 하지만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생활방식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우리의 역사 지식과 비판적 지성을 자극할 만한 풍요로운 내용들이 가득해서 청년들이 미래를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에 비하면 다음에 소개할 두 책은 내용이 그다지 심각하거나 묵직하지 않다. 오히려 유쾌하고 긍정적인 책에 가깝다.
 
석유가 없는 시절이 가져올 위기는 어떻게 극복될까 

▲ 프랑스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 제롬 보날디가 쓴<(거의) 석유 없는 삶>(고즈윈, 2008). 미래에 닥칠 거의 석유 없는 현실에서 인류가 어떤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예측하고 있다.    
 
그 하나는 <(거의) 석유 없는 삶>(제롬 보날디, 고즈윈, 2008)인데, 프랑스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가 쓴 책이다. 저자가 가까운 미래에 닥칠 거의 석유 없는 현실을 예상하고서, 그 상황에서 인류가 어떤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예측하고 있다.
 
나름 재미있는 책이다. 제롬 보날디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 상황이 닥치면 인류가 조금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다른 삶의 양식으로 옮겨갈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낙관주의자이다. 문체도 훨씬 가볍다. 앞의 쿤슬러처럼 우리를 약간 우울하게 할지도 모를 고난과 갈등의 시기 혹은 비상시기에 대한 예측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값싼 석유의 종말로 현대인이 잊고 살았던 삶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배우게 될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웃과의 연대, 스스로에 대한 존중, 노동에 대한 애정 등.
 
“우리는 석유에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삶의 양식에 관한 상상력이다. (...) 많은 이들이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가까운 지역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트랙터 대신 손으로 땅을 일굴 것이고, 모든 물자가 귀해져서 버리는 물건은 거의 없어지고, 넝마주의와 만물수리공 같은 직업들이 새로이 부상할 것이다. 새로운 가치 기준은 지속성과 신뢰성, 단순성이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들이다.”
 
제롬 보날디 역시 석유야말로 현대의 마법사이자 만능 천재라고 위트를 날리면서, 문제는 우리가 그 석유에게 경제와 노동, 여가, 더 나아가 일상생활의 모든 열쇠를 맡겨 놓았다고 혀를 차고 있다. 그러면서 이 마법사가 곧 사라질 거란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아차리고 경계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도 현대인들이 감히 진실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집단 최면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끝없는 자신감은 근거 없는 고집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진보에 대한 확신, 과학에 대한 신념은 일종의 집단 최면 현상일지도 모른다. (...) 여전히 과학 기술은 우리들의 의식을 계속해서 깊숙이 어루만지고 있으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의 관습과 행태를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잊도록 만든다.”
 
거의 석유 없는 시대에 새로운 직업으로 부상한 직업 목록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농업관련 직업으로는 농사철에 일하는 농업 노동 품팔이, 풀 뽑는 사람, 벼 베는 사람, 마을 공동 소치기 등이 있다. 물 관련 직업으로는 수상버스 안내인, 배 도착 견인 사공, 뗏목꾼, 하역 인부, 선박 해체업자, 제방 관리인 등이 있다. 수공업 관련 직업도 흥미롭다. 벽토 반죽가, 만물 수리공, 중고 구두 수선가, 땜장이, 목수 등. 그 외에 짐꾼이나 배달꾼, 마부, 행상인, 인력거꾼, 짐마차꾼 등이 과거와 달리 정당한 직업으로 대접을 받는다. 첨단 기술자 같은 어제의 선망 직업이 미래에는 그 지위를 잃는다는 뜻이다.
 
보날디의 예견에 따르면, 미래의 사람들은 이제 석유 없이 살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을 배워간다. 그동안의 성장과 부, 발전이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 인류는 이제 자연에서 온 모든 것들이 더없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류는 다른 생활양식은 찾아낼 것이고, 그 삶은 결코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우리의 인간성이 온전히 발현될 기회이기를

▲ <축복받은 불안>(폴 포켄, 에이지21, 2009)은 석유 없는 사회의 대안을 만들어갈 수많은 사회운동에 대한 찬사의 글이다. 
 
간단히 소개할 다른 한 권의 책은 <축복받은 불안>(폴 포켄, 에이지21, 2009)이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전 세계 풀뿌리 운동에 관한 희망 보고서”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석유 없는 삶이 글의 주제는 아니고, 수많은 사회운동에 대한 찬사의 글이다. 환경 운동가이자 사회적 기업가인 저자는 대단한 낙관주의자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듣고도 비관적이지 않다면 정확한 데이터를 접하지 못한 사람이고, 이 ‘이름 없는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고도 낙관적이지 않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다.”
 
저자는 ‘지구를 위해, 다른 종을 위해, 지속 가능한 상호 의존성을 위해서’ 지금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고 있는 풀뿌리 사회운동, 즉 ‘위대한 지하운동’이 펼쳐지고 있다고 본다. 지구를 비롯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놀랄 만큼 다양한 생명들을 구하려고 사람들이 물밑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인간의 권리와 기업의 권리 사이의 갈등, 환경 운동이 사회 정의 운동이나 토착문화 보호 운동과 연결되는 지점, 면역 반응으로서의 풀뿌리 운동, 어떻게 세계를 복원할 것인지의 문제 등을 희망차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이 책이 경솔하다 싶을 만큼 낙관적인 경향을 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건 자기가 의도한 게 아니라 ‘낙관주의’가 자기를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기운 나게 하고 좋은 소식들이 많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 책의 이야기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다른 독자들은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하여간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청소년인 우리 집 작은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석유가 거의 없는 시절이 온다면, 너는 산업 시대 이전과 조금은 비슷할 수도 있는 ‘가난한’ 생활양식을 잘 견뎌낼 수 있겠니? 가령, 먹을 것과 따스한 잠자리를 위해 육체노동을 많이 하고, 목욕은 일주일에 한번 하고, 꽤 먼 거리를 짐을 진채 걸어 다니고, 슈퍼마켓이나 대형 마트는 사라지고, 뭐든 수거해서 재활용하거나 수리해서 쓰고, 수입 식품이나 열대과일 같은 사치품들은 거의 없고, 지금의 아동기나 청소년기처럼 지나치게 갇혀서 보호받는 시기가 사라진다면 너는 어떨 것 같으니?”
 
(한참 생각한 뒤) “뭐, 나는 그럭저럭 살아갈 것 같아. 물론 아쉽거나 불편한 것들이 많이 있겠지? 휴우, 솔직히 나는 힘들게 일해야 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어쩌겠어.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참 편히 사는 것 같다, 그치?”
 
(나도 한참 생각한 뒤) “어쩌면 말이야. 이 위기는 인간성의 온전한 발현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될 지도 몰라. 지금처럼 감각과 지성과 양심이 마비된 채 기계에 의존해 사는 기형적인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롭고 신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잖아. 더 이상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시키지도 않을 테고. 또 우리 시대가 석유란 흑마술의 도움으로 눈부시게 빛나긴 했지만 파괴적인 어둠도 매우 컸잖아? 그렇다면 이제 이 흑마술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자연스럽고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갈지를 인류가 고민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지도 몰라. 왠지 난 그렇게 믿고 싶은 걸.” (도은)

    <장기 비상시대>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갈라파고스
    <(거의) 석유 없는 삶> 제롬 보날디, 고즈윈
    <축복받은 불안> 폴 호켄, 에이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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